<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억새

은빛으로 빛난다. 얌전한 모습으로 가을의 한 구석을 바라보고 있다. 은빛으로 빛나기 전까지는 그에게 관심을 보인 이는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억새는 불평하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묵묵히 뜨거운 여름을 감내하고 피어난 것이어서 더욱 더 마음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억새는 가을의 상징이다. 가을의 구색에는 여러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단풍이다. 산에 단풍이 없다면 가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빨간 감도, 국화도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구색을 다 갖추었다고 하여도 억새가 빠진다면 뭔가 허전하다. 억새는 그만큼 가을의 구색을 맞추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맑은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이 어찌나 눈부신지, 정면으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 억새의 특징은 온통 다 반짝인다는 점이다. 어느 한 부분만 특별하게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꽃 전체가 말간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그래서 가을의 상징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가을이 묻어난다.





억새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사람이 드나들기 좋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못한 곳이라 하여도 상관없다. 발아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자투리땅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니 억새는 평등의 식물이다. 편을 가르지 않는다. 공평함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꽃이다. 그래서 서민의 꽃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어김없이 억새는 피어났다. 예년과는 달리 올 여름은 유난히도 힘이 들었다. 오랜 장마에 힘이 들었고, 뜨거운 열기에 고통스러웠다. 그런 모든 어려움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서 피워낸 꽃이어서인지 더욱 더 정감이 간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난 뒤의 결과는 더욱 더 눈부시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반짝이는 억새가 곱다.
억새처럼 빛나고 싶다. 인생의 노년에 서서 나를 본다. 이제까지는 그렇게 빛나지 못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인생이라도 빛났으면 좋겠다.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번쩍번쩍 빛났으면 좋겠다. 어려움과 힘든 과정을 이겨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빛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논두렁에 피어난 억새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빛이 났으면 좋겠다.

메밀꽃과 사랑

가을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이곳저곳에서 축제가 한창이다. 전북 완주의 와일더 음식 축제를 비롯하여 김제의 지평선 축제 등 다양한 축제들이 펼쳐지고 있다. 지방 자치단체마다 제 고장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서 축제를 하고 있다. 주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대동단결한다는 점에서는 아주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메밀꽃 축제는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학원 농장에서 주최하는 작은 잔치다. 대대적인 선전도 하지 않았고 전라북도의 구석진 곳이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메밀꽃 잔치를 보기 위하여 달리는 도로에는 가을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다. 하늘은 말없이 높아져 있고 햇살은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나서기를 참 잘하였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저절로 입에서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나올 정도다. 세상사 모든 시름 다 잊어버리고 여행을 나서니 날아갈 것만 같다.
자동차가 정읍을 지나 선운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선운사는 지난주에 방문하여 꽃무릇 구경을 하였다. 선운사 입구에서 아산면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메밀꽃 잔치를 보기 위해서는 무장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잔치가 벌어지는 곳은 무장과 공음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비산비야의 아름다운 고장이다.





메밀꽃 잔치가 펼쳐지고 있는 곳, 봄에는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푸릇푸릇 자란 청보리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메밀을 심어서 관광농업을 하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광활한 토지에 심어져 있는 메밀들이 일제히 꽃을 피워내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메밀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옆을 보아도 하얀 메밀꽃뿐이니, 메밀꽃 신선이 된 기분이다.
메밀꽃이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란 단편 소설 때문이었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밀밭, 휘영청 밝은 달밤 아래 단 한 번의 인연을 맺은 허생원의 사랑이야기 때문이다. 메밀밭 사랑의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괜히 그럴 것 같은 총각과 다시 메밀밭을 걸어가는 허생원의 마음을 통해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소설 덕분에 메밀은 사랑의 꽃이 될 수 있었다.
메밀은 원래 가뭄을 극복할 수 있는 곡류다. 가뭄이 들게 되면 모내기를 할 수 없고 모내기를 하지 못하게 되면 한 해 농사를 공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손실이 너무너 커서 대체 작품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메밀이다. 가뭄으로 늦게까지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이라도 메밀을 심으면 가을에 수확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메밀은 고맙고도 아름다운 작물이다. 서민들의 기아를 해결해줄 수 있는 고마운 곡식이다.



메밀꽃 한 가운데에 서 있으니, 허생원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어진다. 평생에 단 한번뿐인 인연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남녀 간의 관계가 견고하지 못한 시대가 되었지만 사랑의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록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되기는 하였지만 사랑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한 평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허생원처럼 단 한 번의 인연을 맺고 다시는 찾지 못해 애달파 하는 사랑도 있고 수많은 상대자와 인연을 맺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허생원에게 한 평생은 길기만 할 것이고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 사람에게 인생은 짧기만 할 것이다. 긴 인생을 살아가던 그렇지 않건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본질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떠있고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곳에서 인생의 단 한번뿐인 사랑을 하고 싶다.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지라도. 가슴에 심어두고서 두고두고 꺼내보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비록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지라도 상관없다. 가슴에 사랑을 심어놓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새날의 자유

맑지 않은 연못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부럽다. 무엇 하나 거리낌이 없다. 가고 싶은 곳 어디라도 마음대로 헤엄치는 모습이 자유롭다. 걸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작지도 않은 몸을 유지하면서 연못의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물고기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 나래를 펴고 마음껏 날아오르고 싶다.
넓지 않은 크기의 연못임에도 물고기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물고기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만족할 줄 알기 때문이다. 연못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욕심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날이다. 어제는 어제일 뿐이다. 물론 내일은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날이다. 그러니 오늘은 영원히 새날이다. 새날에는 새로운 일들을 써내려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새날인 오늘에 어제의 일을 써내려가는 것은 반칙이다. 마찬가지로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내일의 일을 써내려가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조급성을 버리지 못한 나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





어제 못다한 일들을 오늘에 해내려고 무리를 한다. 내일 해야 할 일을 미리 당겨서 해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욕심들은 모두가 제약이 되어서 나를 억누른다. 나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고 발걸음을 잡는 것이다. 새날인 오늘에는 오늘에 맞는 새로운 일들만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무리하게 어제의 일을 하려고 하고 내일의 일을 하려다 보니,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다.
연못 속의 물고기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물고기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물고기보다는 훨씬 우월한 존재로 태어나기는 하였지만 내 욕심이 내 스스로를 추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내 잘못이다. 그러니 버려야 한다.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를 버린 것이다. 버린 자유를 다시 주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날아가고 싶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떠나고 싶다. 비록 가시밭길이 된다고 하여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자유를 얻었는데, 또 다른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연못 안의 물고기들처럼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자유를 얻는 대신 많은 것을 잃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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