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 지음/ 자음과모음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동주’라 적었다. 윤동주의 동주다. 윤동주가 주인공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윤동주는 전면에도 화자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서술자는 올해 스물일곱 살인 재일한국인 3세 김경식과 요코라는 여인이다. 두 사람은 각각 글을 남긴다. 남긴 글 속에 윤동주는 후경(後景)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작가는 일찌감치 시인 윤동주에게 반했기 때문에 ‘동주’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작가가 반한 것은 윤동주의 시도 아니고 항일 정신도 아닌, 윤동주의 얼굴, 눈빛, 미소 등 사진에 박힌 그의 모습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소설에서도 ‘윤동주는 왜 죽었을까’가 궁금하다. 그에 대한 답으로서 역사적 사실은 이미 웬만큼 밝혀져 있다. 경찰 조사 기록이 공개되면서 더 분명해졌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피검되어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윤동주의 죽음을 두고 생체 실험에 의한 희생이라는 논란이 있어왔다. 체액 대용으로 쓰일 생리 식염수 확보를 위해 규슈 대학교 의료팀이 조선인 재소자들에게 바닷물을 지속적으로 주사했다는 설은 정황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윤동주도 그 주사를 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인’ 윤동주의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추론(追論)일 뿐 ‘시인’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논담(論談)에는 미치지 못한다. 심장이 멈춤으로서 생의 종말을 고하는 게 자연인이라면, 시인은 무엇이 멈추어 존재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죽게 했을까. ‘민족저항시인’으로서의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 윤동주는 이미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순간 죽음을 맞이했다. 사상을 검증한다는 구실로 윤동주에게 자신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강압하는 그 순간에 말이다.

『동주』는 작가의 기존 작품들과는 또 다른 차별성을 보이는 작품이다. 사회와 권력의 횡포를 고발하는 작품을 즐겨 써온 작가는 최근 일상의 소소함과 눈물겨운 삶의 풍경을 그리는 작품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이런 경향을 다시 한 번 벗어나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윤동주의 죽음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민족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닌, 진정한 ‘시인 윤동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윤동주의 죽음 이면에 또 다른 이유를 ‘시인 윤동주’라는 관점에서 찾고 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서 민족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닌, 시인 윤동주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동주』는 순수한 ‘시인’ 윤동주의 의미를 언어에서 찾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은 언어, 말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는 간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간도(間島)는 ‘사이의 섬’이라는 뜻이다. 당시 간도는 여러 나라의 영향력이 충돌하던 곳으로 조선인만 살던 곳도, 조선어만 쓰던 곳도 아니었다.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란 간도의 특성상 여러 ‘세계’의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그는 늘 불안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사이의 세계’ 간도에 적을 두고 평양과 서울, 일본을 오가며 시를 썼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특정한 가치와 이념, 국가와 민족공동체에 치우치지 않았다. 조선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모어인 조선어로 시를 썼을 뿐이다. 사상을 검증한다는 구실로 자기 시의 번역을 강요당하는 순간, 시인에게서 시인의 언어를 빼앗는 순간 시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시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런 윤동주의 언어를 다시 ‘사이의 세계’로 돌려보내 그를 되살려냈다.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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