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철희의 바라래 살어리랏다> 칠산바다의 조기떼들-2회


▲ 오늘날 위도 치도리의 모습



팔도의 조기잡이 배 몰려들던 치도리

“2만여 척의 어선이 조기의 어장인 칠산바다를 찾어 지금 바야흐로 몰려든다고 한다. 이리하여 칠산바다 한복판에 있는 위도를 중심한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각 도서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천막과 임시건물로 가득차고 각지에서 모여든 유두분면(油頭粉面)한 작부들의 노랫가락과 장고소리는 뱃사공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위는 1935년 4월 6일자 ‘조기잡이 어선 칠산바다에 운집’ 제하의 동아일보 기사다. 이 무렵에는 위도의 치도리에 파시가 들어섰다. 위도의 파시는 1년에 두 차례 섰는데, 4~5월엔 조기, 6~7월엔 고등어와 아지(전갱이) 파시가 섰다. 위도는 조기, 아지, 고등어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청어의 산지로도 유명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1682년(숙종 8) 위도에 진(鎭)을 설치하여 종3품직 무관인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었고, 이 섬에 어민들이 많이 살며 청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해마다 봄에 경향에서 장삿배들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서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강강술래’의 ‘청어엮세 청어엮세 위도 군산 청어엮세’랄지, ‘에해용소리’의 ‘잡어보세 잡어보세 칠산바다 청어잡세’ 등의 노랫말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또 옛날에 청어잡이로 많은 돈을 번 위도 정금마을 장 부자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위도가 조기 외에도 청어의 주 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치도리 해안은 ‘치도리 당집’ 아래에서부터 대리 가는 모퉁이까지 이어지는 위도에서는 가장 넓은 갯벌이 형성된 곳이다. 치도리 사람들은 이곳 갯벌을 장불이라 부른다. 파시가 들어설 때면 각지에서 몰려든 배들로 이곳 장불은 배 댈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치도리 노인들은 치도리 앞 딴치도(썰물때는 갯등이 드러나 걸어서도 들어갈 수 있다)를 가리키며 “그때는 저그 섬까지 배 위로 건너다녔당게” 하며 그때를 회상한다. 치도리 노인들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치도리 앞 딴치도의 ‘조난어업자조령기념비’를 통해 그 시절 얼마나 많은 배가 치도리로 몰려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위도 치도리 조난어업자조령기념비


조난어업자조령기념비(遭難漁業者弔靈記念碑)

이 비는 1931년 위도면 치도리 앞 칠산어장에서 조업 중 3회에 걸친 강한 태풍으로 인하여 500여 척의 어선이 전복되어 익사한 600여 어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932년 3월 전라남도 수산당국이 건립하였다. 오랜 풍상을 겪는 동안 제단에 금이 가는 등 붕괴위기에 놓인 것을 1997년 5월 부안군의 제정지원과 치도리 주민들의 노력으로 전면 보수하였다.

지금이야 치도리 일대를 통틀어 겨우 배 몇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인데, 전국 각지에서 얼마나 많은 배가 몰려들었으면 500여 척의 배가 전복되고, 600여 어부들이 익사했겠느냐는 이야기다.

파시가 들어서면 치도리는 위의 동아일보 기사에서처럼 조기잡이 배들을 뒤따라 몰려온 상인들이 세운 천막과 ‘바라크(이동할 때는 접어서 배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라고 불리는 임시건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집 마당에까지 들어섰다고 한다. 이들은 주막, 요릿집, 여관(유곽), 잡화상, 정육점, 선구상(船具商), 염상(鹽商), 목욕탕 등의 간판을 내걸었다.

해방을 전후해 풍선배에서 통통배(동력선)로 바뀌면서 위도의 파시도 치도리에서 파장금으로 옮겨갔다. 위도사람들은 위도의 파시가 치도리에서 파장금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풍선배는 갯벌에 올려놓으면 그대로 정박이 가능하기 때문에 치도리 장불에 배를 대기가 유리했지만, 동력선은 바닥이 깊은 요즈음과 같은 선착장이어야 가능하지….”



▲위도 파장금

치도리 파시는 파장금으로 이어지고…

파장금 파시는 치도리 파시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먼저 파장금은 치도리에 비해 해안은 협소하지만 수심이 깊어 물때와 관계없이 배들이 드나들 수 있어 포구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치도리의 임시가옥과는 달리 건물들이 들어서고, 목욕탕, 이발소, 다방, 술집, 여관, 세탁소, 정육점, 잡화점, 어구점, 선박수리점 등이 성업을 이루었다. 위도 노인들의 증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파시가 서면 파장금은 중도시가 되었어. 어찌나 많은 배들이 몰려들었던지 파장금에서 저 앞의 식도까지 배 위로 건너다닐 정도였는데 장사꾼들은 뙷마(현지어, 작은 배)로 고기잡이배들 사이를 다니면서 장사를 했지, 물건 값은 주로 조고로 받았어. 밤에는 이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정말로 장관이었지. 술집색시만도 400~500명이 분 냄새를 풍겼응게.”

위도 노인들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경향신문 1961년 7월 13일자 기사가 그 당시 파장금의 파시풍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손바닥만 한 전남 영광군 위도면 파장금리, 숫제 원주민이라고는 열손 안에 들 적막한 곳이다. 그러나 4월이 오면 밀물이 쏠리듯, 일시에 1만여 식객이 몰려들고 대소 1천여 척의 고깃배가 까맣게 바다를 덮는다. 어디서 찾아들었는지 하루아침에 수많은 상인들이 여관 술집 따위의 간판을 내걸고 예쁜 아가씨들마저 무더기로 쏟아놓아 굶주린 뱃사람의 구미를 돋운다. 곳곳마다 푸른 주기(酒旗)가 나부끼고, 미장원, 목욕탕, 그 외의 사설 발전시설까지 한몫 끼어 졸지에 하나의 마을을 이룩하면 3개월 넘기지 못하는 이곳의 파시는 해상의 오아시스라 자부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기호, 영남의 사나이들이 저마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구름처럼 몰려들면 멍청히 바다만 바라보고 살던 주민들은 일 년 살 궁리에 바쁜 모양이다.”



▲조기는 역시 참조기가 맛이 좋다. 문헌에는 참조기를 석수어(石首魚)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머리에 돌처럼 단단한 뼈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 밖에 노랑조기, 황금조기, 황조기 등으로 불리는 참조기는 몸 빛깔이 황금빛을 띤 회색이다. 육질이 향긋하고 쫄깃하고 맛이 좋아 제사상에 올린다. 그 유명한 `영광굴비`는 바로 이 참조기를 말한다. 부세나 백조기, 반애, 황석어 등은 참조기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맛은 참조기만 못하다. 그래서 참조기로 잘못 알고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금(金)으로 넘쳤던 ‘위도`

그 무렵에는 파장금 뿐만이 아니라 위도 곳곳의 배를 댈 수 있는 포구마다에서 어획물의 매매가 이루어졌고, 그런 현장에는 으레 엄청난 돈이 오갔다. 이를 두고 위도 노인들은 “위도에는 맨 금(金, 돈)자 들어가는 지명이여, 이름대로 그 금자 들어가는 마을마다 돈으로 넘쳐났당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위도에는 파장금, 벌금, 도장금, 지픈금(심구미). 미영금, 논금, 살막금, 석금, 시암금(정금), 하방금, 시름금, 선창금 등, 유난히도 ‘금’자 들어가는 땅이름이 많기도 하다. 위도 노인들의 이야기는 돈이 들어오는 마을에 쇠금(金)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는 것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설(說)일 뿐이다. 부안의 향토사학자 김형주 선생은 그의 ‘부안의 땅이름 연구’에서 “해안선이 들쭉날쭉 굴곡이 심한 부안지역엔 금, 끔이, 구미 등으로 불리는 지명이 많다. 이러한 지명은 만(灣)보다 작은 해안의 후미진 곳을 말하는데, 특히 위도에 많아 30여 곳에 이른다”고 하였다. 위도뿐만이 아니라 부안지역에도 이러한 지명이 더러 있다. 살기미(살금)해수욕장(격포해수욕장), 모항 아홉구미, 계화도 살금마을 등이다.

어쨌든, 그 시절엔 위도에 돈이 넘쳤다. 1980년대 부동산 호경기 때 ‘개도 포니를 몰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데, 그 시절 위도에는 ‘새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식도의 송 아무개 부자는 어찌나 돈이 많았던지 항아리에 넣어 묻어 놓은 돈에 곰팡이가 슬자 일꾼들을 시켜 물로 씻은 다음 빨래 줄에 널어 말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안 격포항 변산좌우도 채색필 사본 (3세기 중~후반. 73.5×107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왼쪽 상단에 7뫼(칠산)가 점점이 떠 있고, 바닷물이 지금의 변산면 도청리 도청마을까지 드나들던 시대의 격포, 격포리봉수대, 수성당이 있는 격포리 죽막동 등이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고깃배 뒤쫓는 ‘파시 여인들’

이러한 파시풍 중에서 제일의 관심사는 역시 파시여인이다. 고기를 뒤쫓는 어부, 그리고 어부와 마찬가지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그 어부를 뒤쫒는 여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어부와는 달리 ‘바람아! 강풍아! 석 달 열흘만 불어라!’며 날이 궂기만을 바란다. 그래야만 출어를 중지한 어부들이 그녀들을 찾을 것이고, 돈이 그녀들에게 떨어질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파장금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파장금을 이렇게도 풀이하기도 한다. ‘波/파도가 長/길어야(높아야) 金/돈이 떨어진다.’ 섬 전체를 통틀어 10% 남짓한 농토에서 생산되는 곡식은 위도 사람들 한두 달분 식량도 못된다. 그러니 파장금 앞바다에 서는 파시에서 떨어지는 돈은 파장금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젓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성황을 이루던 위도의 파시도, 아니 서해의 파시도 해방 이후 최고의 풍어였다던 1966년 파시를 절정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해마다 북상하던 조기떼가 1970년 들어서는 발길을 뚝 끊은 것이다. 그 대신 위도에는 삼치가 몰려왔다. ‘옛 조기 대신 삼치떼 몰려’ 제하의 1973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아침바람에 오색 풍어기를 펄럭이며 몰려드는 삼치잡이 유망어선들, 한무리 배가 몰리기 시작하면 3시간도 못돼 마을 앞에는 3백여 척의 어선들로 붐빈다. 보통 20톤급 어선들, 이들 어선의 하루 어획량은 300~600kg. 어선들이 바다의 초콜릿이라는 삼치를 부안군어업위판장에 풀어놓으면 곧 대일(對日) 활선어 수출선에 넘겨진다. 수출선끼리의 경쟁입찰을 통해 정해지는 가격은 kg당 평균 3백 원 안팎. 이 계산이면 한 척당 하루 10~20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섬에 삼치파시가 서기 시작한 것은 불과 3년 전 부터다. 그 전에는 이곳이 흑산도, 영평도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조기파시의 하나였었다. 매년 4월이면 흑산도 근해에 몰려 있던 조기떼들이 북상을 거듭. 5월초면 위도 근해에 조기어장이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 봄부터 조류가 바뀌면서 조기 대신 삼치가 더 많이 그물에 걸렸다. 조기가  안 잡혀 한 때 근심했던 어부들은 삼치가 수출어종으로 각광을 받게 되자 수입도 전보다 높게 되어 얼굴이 펴졌다.”

그러나 서너 해 몰려오던 삼치의 발길마저 뜸해지자 위도의 파시는 옛날의 영화를 뒤로하고 1970년대 중반 문을 닫아야만 했다.







▲파장금 뒷골목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 한 사람 비껴가기도 어려울 좁디좁은 골목, 저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나 의아심이 드는 성냥갑만한 술집 색시들 방, 그 좁기만 한 골목 담벼락에 아직도 남아 있는 다방, 세탁소, 목욕탕 등의 광고문구들이 그 옛날 칠산바다의 영광을 어슴푸레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위도 파시여! 다시 한 번!

이제 ‘칠산바다 조기’는 전설이 되었다. 일구월심으로 ‘위도 파시여! 다시 한 번!’을 기원해보지만 칠산바다를 떠난 조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위도는 한적한 어촌으로 변해 있다. 파장금 뒷골목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 한 사람 비껴가기도 어려울 좁디좁은 골목, 저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기거할 수 있나 의아심이 드는 성냥갑만한 술집 색시들 방, 그 좁기만 한 골목 담벼락에 아직도 남아 있는 다방, 세탁소, 목욕탕 등의 광고문구들이 그 옛날 칠산바다의 영광을 어슴푸레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허철희 님은 자연생태활동가로 ‘부안21’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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