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고난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
일제 시대 고난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
  • 승인 2012.01.2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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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역사 현장 탐방 9 - 서대문 독립공원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포함하는 독립공원을 찾았습니다. 일제 시대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걸고 독립을 위해 항거했던 순국 열사들의 정신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곳입니다.





# 서대문 형무소의 냉기는 한여름에도 서늘할 정도다.


▲ 05 : 00 기상
▲ 05 : 00 - 06 : 30 방 정리, 세수, 아침식사, 공장으로 이동, 체조, 조회
▲ 06 : 30 - 09 : 00 작업
▲ 09 : 00 - 09 : 15 오전 휴식
▲ 09 : 15 - 12 : 00 작업
▲ 12 : 00 - 12 : 30 점심
▲ 12 : 30 - 15 : 00 작업
▲ 15 : 00 - 15 : 15 오후 휴식
▲ 15 : 15 - 18 : 00 작업
▲ 21 : 00 취침

(1933년 5월, 서대문 형무소 수형자 일과표)

하루 10시간 30분 강제 노동. 좁은 공간에서 벌여야 하는 날씨와의 싸움은 죽음보다 잔인했다.

이 뿐 만이 아니다. 일본 경찰들과 간수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기 일쑤였고 그 과정에서 반항이라도 했다간 1평도 안 되는 독방에 갇혀야 했다. 일제 시대 항일 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매일 같이 생사를 넘나드는 투쟁을 이겨냈다.

이 곳에 4년 반 정도 수감됐던 이병희 여사는 "때리고 비틀고 전기찜질하고 비행기고문하고…. 살아 있어도 거의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야"라며 "(그래도) 우린 죽음이 무섭지 않았어. 그거 무서우면 어떻게 일을 해"라고 증언했다. 가장 늦게까지 생존한 의열단원인 이 여사는 친척이었던 이육사 선생의 시신과 시 작품을 수습한 장본인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혹은 옥사로 생을 마감한 순국 선열들은 강우규 유관순 등 4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현재 자료에 의해 확실히 고증된 숫자는 90여명에 이른다.

이완용이 쓴 `독립문`

서대문 형무소역사관과 독립문을 포함하는 `서대문 독립공원`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지난 달 28일, 서울시와 서대문구는 독립문 주위를 둘러쌓던 철제 울타리를 철거하고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 있는 독립문(사적 32호)은 구한말인 1896년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가 지은 회색 화강암 건축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을 본 떠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 최근 전면 개방되며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독립문`. 글씨는 이완용 작품이라고 한다.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엔 `영은문`이 있었다. 이는 조선 태종 7년(1407년)에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영빈관 앞에 세운 문이었다. 당시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영은문을 헐고 바로 뒤에 독립문을 세웠다. 지금 독립문 앞에 남아 있는 두 개의 돌기둥이 영은문의 일부다.

1896년 7월부터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펼쳐 공사를 시작했는데 서재필의 구상 아래 설계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도와 작성했고 공사 감독은 심의석이 맡았으며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해 진행했다고 한다. 당시 화폐로 3825원이 들었다.

문 앞뒤로 새겨진 `독립문` 글씨는 처음에 개화파였다 나중에 민족반역의 원흉으로 변질한 이완용이 썼다고 전해진다.
독립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네거리 자리다. 하지만 일제가 주변으로 차도를 내면서 사람들의 통행이 불가능해졌고 1979년 고가도로를 만들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서울시는 지난해 8월부터 239억원을 들여 독립문 주위의 철제 울타리를 철거하고 주위의 낡은 시설물을 교체하는 독립광장 조성 사업을 실시했다. 일본식으로 조성돼 비판을 받았던 독립문 뒤 연못도 우리나라 전통 방식인 방지 형태로 바꿨다.

매년 80만명(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50만명)이 찾는 교육의 장임에도 불구하고 무질서하게 배치됐던 공원 내 시설도 돌아보기 쉽게 재정비했다.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곳곳에 있던 계단들도 모두 없앴다.

일제 강제 철거 `독립관`

독립문 뒤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주도한 서재필 선생 동상과 3.1독립선언기념탑이 있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원래 탑골공원에 있었던 것이다. 1979년 공원 정비사업 때 뜻하지 않게 철거 됐다가 각계의 복원 건의가 잇따르자 항일운동의 터전인 독립공원에 원상태로 다시 세웠다.












# 위로부터 서재필 선생 동상, 3.1 독립선언 기념탑, 순국선열 추념탑



독립문 왼쪽으론 `독립관`이라는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1층 목조건물이 보인다. 당초 이 곳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모화관`이었는데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사용되지 않다가 1897년 독립협회가 건물을 고쳐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했다. 황태자였던 순종이 직접 `독립관`이라는 현판을 하사했다고 한다.

독립관은 이후 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자주독립, 자유언론, 신교육, 민족문화 등을 주제로 1898년 말까지 매주 토론회가 개최됐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일제는 1910년 독립관을 강제 철거했다. 당초 위치는 현 복원 장소보다 동남쪽으로 350m 떨어진 곳이다. 독립관 위로는 순국선열추념탑이 있다.








# 독립관에서 큰길을 따라 내려오면 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통곡과 한(限)` 미루나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공원을 둘러보는 데 있어 핵심이다. 공원을 돌아보기만 해도 역사관 외형은 볼 수 있지만 안에서 만나고 느끼게 되는 체험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어른과 청소년 입장료가 각각 1500원, 1000원이며 65세 이상과 6세 이하는 무료다.





# 서대문 형무소 정문


1908년 경성감옥으로 시작된 형무소는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일제시대 `무력통치`의 상징이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엔 서울교도소와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후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각종 전시물



역사관은 중앙사와 옥사, 공작사, 사형장과 시구문, 유관순 지하감옥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현재는 종합정비사업(2008.3-2010.7) 진행으로 조금 어수선한 편이다. 전시관으로 사용됐던 구보안과청사는 타일을 떼어내 원래 붉은 벽돌 건물로 되돌아갔다. 뒤 이어 취사장과 격벽장(부채꼴 형태의 운동장 시설), 유관순 지하감옥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 구 보안과 청사. 타일을 떼어내 원래 붉은 벽돌 건물로 되돌아갔다.





# 취사장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 수감자들의 운동시설인 `격벽장`도 복원될 예정이다.



한여름에도 냉기가 느껴질만큼 서늘한 옥사는 2층 구조로 돼 있는데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사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재현된 독방과 벽관을 보고 있노라면 오래 전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 독립지사들이 고초를 겪었던 독방(위)과 벽관





# 역사관 내엔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각종 모형들로 가득하다.


고문과 수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체험관이 있는 공작사도 사람들이 오래 머무르는 곳이다. 손톱찌르기, 상자·전기고문을 간접 체험할 수 있으며 재판과 사형 현장도 재현됐다. 공작사는 투옥자들을 강제로 동원해 일을 시켰던 곳이다. 형무소 외곽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는 붉은 벽돌도 모두 그 산물이라고 한다.




# 수형자들을 강제 동원해 일을 시킨 `공작소`. 붉은 벽돌도 이 곳 산물이다.  


1923년 지은 사형장 벽 안팎으론 같은 해 심었다는 두 그루의 미루나무가 있다. 바깥쪽 미루나무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순국선열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고 해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린다. 벽 안에 있는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사형장 안팎의 미루나무. 비슷한 시기 심어졌다고 하지만 굵기의 차이가 현저하다.



사형장 뒤론 시구문이 있다. 사형을 집행한 뒤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로 옮기는 비밀 통로였는데 일제가 만행을 숨기기 위해 폐쇄했으나 1992년 공원 조성 때 입구에서 40m를 복원했다.









# 사형장과 시신을 옮기는 통로였던 `시구문`


지하감옥은 일제가 여성만을 위해 1916년 신축한 옥사로 지하 독방에서 애국 지사들을 가혹하게 고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관순 열사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로 불린다.





#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지하감옥






근대화와 일제시대라는 격변기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까지 바쳤던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이번 겨울 서대문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







# 역사 교육의 장이자 시민들의 휴식처로 바뀐 `서대문 독립공원` 풍경들



김승현 기자<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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