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벌, 벌, 벌과의 한철 마지막 회




# 수꽃은 피었고 암꽃은 아직...


드디어 꽃소식이 전해졌다. 전라남도 광양이다. 광양에 밤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몇 사람이 벌통을 싣고 고창을 출발했단다. 그러면 가야지. 얼른 가야지.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그날 바로 짐을 꾸려 출발했다.

그런데 또 네비 아가씨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시흥에서 문산 가던 날 우리를 그토록 골탕 먹인 아가씨를 우리는 그만 잊고 있었다. 인간이란 역시 대단하다. 이렇게도 쉽게, 이렇게도 금방금방 잊어버리다니.

야생 상태의 동물들은 치욕과 굴욕의 역사를 잊지 않고, 심지어는 유전자에까지 각인시켜두기 때문에 쥐도 옛날 쥐약을 먹지 않고, 사과 벌레도 옛날 농약으로는 잡을 수가 없어서 무시로 새로운 쥐약과 새로운 살충제를 개발한다는데 인간은 글쎄, 이것이 무슨 대단한 능력인지 모르겠다.

대부도에서 광양을 가자면 서해안고속도를 타는 게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해도 뭐 틀리지 않을 거다. 서해안을 타고 가다가 장성쯤에서 호남고속도로와 남해안고속을 조금씩 타면 된다. 그런데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 어디쯤에서 네비 아가씨가 다른 길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다른 길인지도 몰랐다. 호남고속도로 어디쯤에서 무슨 사고가 있거나 공사 중이라서 일시적으로 다른 길을 안내하는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가다 보니 국민 전체를 위한 고속도로가 아니다. 특정 개인사업자의 이익을 목적으로 개설된 도로 즉 민자고속도로다. 중간에서 요금을 내란다. 내라는 요금을 소처럼 묵묵히 냈다. 그리고 얼마쯤 달리다가 다시 티켓을 받았다. 나중에 계산을 해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길을 사용했을 때보다 무려 4000원이 요금으로 더 나갔다.

그렇다고 시간이 단축되었을까.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서해안고속도로만 타고 간 트럭운전 기사는 우리보다 30여 분이나 먼저 도착해 버렸다. 덩치도 크고 벌통을 실었기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우리보다 이삼십 분 늦게 도착하리라 여겼던 거대한 트럭이 우리보다 오히려 먼저 도착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네비 아가씨와 민자고속도로 사업자가 공모해서 우리의 피 같은 돈 4000원을 갈취했다고 봐야 하나. 뭐 그렇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나 의심을 지울 수는 없다. 또 있다. 민자 사업이라는 것, 이것은 대체  그 의도와 정체가 무엇이란 말이냐….

민자라든가 민영화라든가, 어감으로만 보자면 뭔가 대단히 그럴싸하게 국민을 위하는 것 같다. ‘작은 정부’라는 매우 아름다운 수식어로 포장된 그 속내가 무엇인지는 사실 밝혀진 게 거의 없다. 정부가 왜 작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정부가 작아지면 무엇이 커지나? 국민이 커지나? 이 또한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오직 하나 대기업이 더 큰 대기업으로 커져갈 뿐이다.

민자사업의 핵심은 수익구조가 아주 오묘하고 절묘하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익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발생하면 아무 소리 없이 그것만을 취하지만, 예상보다 덜 발생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보전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하늘 아래 이런 누워서 땅따먹기 식 사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묘하고 절묘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날도 순식간에 일금 8000원을 추가로 강탈당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우리는 피 같은 돈 8000원을 강탈당하고도 아무런 항거도 없이, 항거의 의사도 없이, 당면과제인 꿀이나 따러 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하느님이 보호하사 꿀 좀 따게 해 주소서, 따위 그런 기도까지야 없었다지만, 누군가 만약 그런 기도라도 하라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자세로, 마침내 밤꽃이 피었다는 광양에 도착했다.
사전에 전화로 약속이 된 사람들이 장소는 이미 물색해 두었다고 했다. 고창에서 먼저 온 그들과 계속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농협 앞에서 좌회전을 했고, 직진하다가 장례식장 못가서 우회전을 했고, 다시 직진하다가 다리를 건너 좌회전을 했고, 삼거리에서 비탈진 곳으로 우회전을 했고, 산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다가 또 우회전, 좌회전, 그렇게 굽이굽이 산길을 계속 달리던 끝에 드디어 만나기로 한 사람들과 만났다.



# 광양의 민들레


그들이 봐둔 장소는 공터가 아니었다. 대파가 무성하게 자라는 중인 파밭이었다. 산골짜기다 보니 공터란 것이 없어서, 그래서 오십여 평 규모의 파를 심어놓은 밭을 발견하고 주인을 만나 파 값이며 토지 임대료를 주기로 하고 빌렸다는 거였다. 사람 수대로 달려들어 한밤중에 파를 뽑아내고, 벌통을 내려 봉장 설치를 완료했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숨 잘 자고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동네 구경을 나섰다가 파밭 주인과 조우했다. 할머니 혼자서 밤나무 2000여 그루를 관리하다가 3년여 전부터 그만두었단다. 연로해서 이제 그만 은퇴하기로 하셨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할머니가 그러신다. 20여 년 전에 할아버지가 선산에 밤나무를 심으셨단다. 집안에서 반대도 했지만 5년여 뒤부터 수익이 발생해서 그 돈으로 일가족이 모두 잘 살게 되었다고, 산골짜기에서 많지도 않은 땅뙈기로 쌀농사 밭농사만 짓는 집에서는 자식들 학자금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만, 당신들은 하나도 걱정 없이 자식들 대학까지 다 보냈다고, 그런 뒤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광양의 밤이 인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단다.

충청도 부여 인근의 밤맛이 좋다고 소문나면서부터 광양의 밤은 찾는 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밤이 열리거나 말거나 거름도 주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아하 참, 사람 사는 세상이란 어디를 가나 이렇게 고생 뒤에 기쁨이 있고 기쁨 뒤에는 또 예상치 못한 실망이 찾아오는 것이로구나,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태어난 이후 기쁨이란 것을 모르고 오직 고생만 해온 사람들에 비하자면, 기쁨 뒤에 실망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다음날 신기한 손님이 찾아왔다. 광양농협의 구매 담당자라고 손님이 자기소개를 했다. 그랬다. 그는 밤꿀을 사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아직 수확도 안 한 밤꿀을 미리서 자기 농협에 팔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었다. 그랬다. 노약자들을 주로 공격하는 폐렴의 원인균인 감기 바이러스를 퇴치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지닌 것으로 소문나면서 밤꿀이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해의 광양농협은 밤꿀을 수확 전부터 예약하는 이른바 입도선매 바람이 불었다. 그것도 아카시아 꿀에 비해 30퍼센트 이상 높은 가격으로 말이다.

그가 돌아간 뒤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허, 이게 뭐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어쩌고 그렇게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슬프게도 밤꿀은 아직 기척도 안 보였다. 벌들은 밤꽃 주변을 맴돌기만 하다가 다른 데로 멀리 날아가 버리고 있었고,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분봉이 나서 정신이 어지러운 탓에 우리는 어디 멀리로 구경을 나가기도 어려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꽃은 피었지만 아직은 일렀다. 밤꽃이 활짝 피어 있어서 좋아라 했는데 아니란다. 수꽃들만 피었을 뿐 암꽃은 아직 준비 중이라는 것이다. 수꽃에는 꿀이 없다. 암꽃에만 꿀이 있는데 암수를 구별하는 기준은 아주 간단하고 분명해 보였다. 젓가락처럼 긴 꽃송이에 녹두알만한 밤송이가 달린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는데 달린 것이 암꽃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 몇 마리 남은 벌이라도 살려보자고


생각을 2차원 정도로만 하면서 꽃을 보았어도 아 저것이 암꽃이고 저것은 수꽃이구나, 하고 금방 알 수도 있었던 것을, 밤꽃에서는 정액 냄새가 난다는 어느 소설가의 발언만을 염두에 두는 식의 1차원적 생각만으로 꽃을 보니 보면서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되어 있었다. 오호, 이것이 참, 내가 아직 멀었구나, 멀었어, 어쨌든 새로운 것을 알았으니 기분은 좋았다.

오며가며 건성으로 보았던, 그렇게도 뽀얗게 풍성하게 피어 있던 밤나무의 밤꽃들 중 태반이 수꽃이었다. 굳이 수치를 들먹이자면 수꽃과 암꽃의 비율이 20대 1 정도나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수꽃이 그렇게 많이 피었는데 암꽃은 아직도 준비 중이다. 왜일까. 왜. 왜. 왜. 질문을 하고 또 해봐도 답을 못 내겠다. 그러니 그저 푸념이나 할 뿐이다. 수꽃은 이렇게도 많이 활착했는데 암꽃은 어째서 아직도 준비 중이냐, 응?

그러고 보니 이게 또 그렇다. 자연계에서 수컷의 역할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숫자로만 보자면 엄청나게 많은 생산 활동을 할 것 같지만 극소수 선택된 자들만 그 임무에 참여할 뿐이다. 난자는 하나뿐인데 정자는 수억 개에 달하는 이치를 비로소 알았다고 하면 다소 관념적인 진술이 되겠지만, 아무튼지 수꽃은 개체수가 많은 만큼이나 암꽃보다 먼저 피고, 그리고 암꽃이 수정을 끝낸 뒤에까지도 핀다. 암꽃을 앞뒤에서 포위 내지는 보호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그 바람에 우리는 광양에 도착하고서도 1주일 이상이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러다가 설탕 사양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대부도와 영흥도에서 했던 걱정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마침내, 드디어 밤꿀 수확을 시작했고, 그리고 열흘, 또 열흘, 두 차례 이동을 거친 뒤에 밤꽃도 지고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꽃도 없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장마도 끝나고, 찜통 같은 무더위 속에서 전개되는 태풍의 계절이 되었다. 이제부터 장기전이었다. 아니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계절이었다. 어디 안온한 데로 들어가서 차분히 프로폴리스나 채취하고, 로열젤리나 뜯어먹고, 그러면서 벌이나 키우자. 벌이나 키워서 내년 봄에 팔아먹자,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장소 선정에 앞서 일단 고창은 최우선 순위로 제외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창피하니까.

무엇이 왜 창피한가 하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니까 덮어두고, 어쨌든 고창은 피해서 가기로 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던 끝에 소설 ‘만다라’로 유명한 김성동 선생이 양평의 무슨 산골에 우거하고 있다고, 거기가 아주 명당이라고 인사동의 누군가가 일러줘서 일단 현장답사나 해보기로 하고 가서 보았다. 그런데 이건 뭐냐. 티코급의 승용차나 겨우 들어갈 수 있을까 원, 대형화물 트럭은커녕 포터 한 대도 못 들어가게 생겨서 막걸리나 몇 잔 얻어 마시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국 고창의 고수면 문수사 근처에 자리를 잡기로 하고 현장 답사를 했다. 그런데 답사 전날 태풍이 몰려와서 나무가 쓰러지고 전봇대가 뽑히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 바람에 토종벌 보호구역이라는, 양봉은 들어오지 말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사라져 버렸고, 그 바람에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쪽 어디에 토종벌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채로 벌통을 운반해서 봉장을 설치하고 말았다.

벌통을 옮기는 날에도 비가 내렸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봉장 주변을 둘러보기는커녕 봉장에서 두 시간도 머물지 못하고 바로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서 느긋하게 목욕도 하고, 술도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 버렸다. 다음날은 아침에 잠깐 해가 나오기는 했지만 도로 금방 우중충해지고 있었고, 해서 그날 하루는 온전히 봉장을 가 보지도 못한 채로 사흘째를 맞이했다.

바로 그날, 이른 아침에 우리는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벌통에다 전화번호를 적어둔 덕분이었다. 어쨌든 순경은 말했다. 당신네 양봉이 근처의 토종벌을 습격해서 완전히 몰락시켜 버렸다고, 당장 나와서 문제해결에 협조하라는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가서 보니 그랬다. 할아버지 한 분이 토종벌 20여 통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벌통 주변으로 벌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강을 이루고 있었다. 토종벌만 죽은 게 아니었다. 양봉도 토종벌 못지않게 죽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으로는 그랬다. 전날 두 시간 정도 해가 나왔을 때, 그때 벌떼가 하늘을 까맣게 덮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놀란 할아버지가 농약통에 가득 살충제를 타서 뿌려대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토종벌도 죽고, 양봉도 죽고, 다 죽었다.

그것을 본 내 입에서 한 소리가 나왔다.
“야, 생각해보니 우리가 완전 오리지널 돈벼락을 맞은 것이다, 야.”
“돈벼락이요? 이 상황에서도 형님은 농담할 기운이 나요?”
“생각해봐라. 우리가 돈을 목적으로 양봉을 하겠다고 나선 것 아니냐. 그러다가 망했으니 이게 돈벼락 아니고 뭐냐. 벼락을 맞으면 살아나기 어려워. 그러니까 돈벼락이지. 우리가 쓸 수 있다면,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면 그건 돈방석 아니냐. 우리가 아무리 망해간다 해도 국어사용은 제대로 하자 이거여, 뭔 소린지 알긋냐?”





이것은 물론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온 일종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꼭 그것만도 아니다. 나는 그때 알았다. 내 안에 탐미주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한다. 싸움을 모르는 토종벌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아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비수비오 화산이 폭발했을 때 그 화산재에 묻히는 사람들의 혼란과도 흡사했을 것이다.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 마리의 벌떼가 하늘에서 일시에 내려앉아 토종벌을 습격하는,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 죽이고 그들이 1년 동안 비축해놓은 꿀을 도둑질하는 그 장면은 아마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엄하기도 했을 것이다. 습격해 온 양봉을 죽이겠다고 농약을 살포해서 결과적으로 토종벌의 완전멸망에 가세한 주인 할아버지의 좌충우돌, 동분서주한 장면, 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 장엄인가.

미학적으로, 그리고 건축학적으로 거의 완벽한 금각사에 불을 지르는 꿈을 어려서부터 꾸다가 마침내 불을 지르고 그 현란한 장면을 숨어서 지켜보는 내용의 소설 ‘금각사’를 쓴 탐미주의자 미시마 유키오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불타는 로마 시내를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는 네로황제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그들 못지않은 탐미주의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우리의 꿈같은 유목 양봉사업은 최종적으로 망했다. 그런데 그 망함의 끝이 황홀해서, 너무 황홀해서 망했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크게 얻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당연한 얘기로, 후회나 비애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얼마나 큰 공부였는가 말이다. 언제 또 한 번 기회가 닿으면 주저나 망설임 없이 따라나설 생각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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