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봄의 문턱에서




느림의 미학

새들이 반겨준다. 한 마리, 한 종류가 아니다. 여러 종류 여러 마리의 새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른다. 어제까진 듣지 못했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새들의 노래 소리에 취해본다. 그렇게 청아할 수가 없다. 정신이 맑아진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그런데 전날까지 새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새소리가 들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어제까지 살지 않았단 새들이, 오늘 갑자기 이사를 온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새들은 언제나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텃새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새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일까. 내 귀의 문제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마음의 문제이다. 새들은 늘 그 자리에서 즐겁게 노래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단지 그 새소리를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듣지 못한 것이다. 마음이 준비돼야 귀가 작동을 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귀도 열리지 않는다. 비단 새소리 뿐 아니다. 귀가 열리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귀가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새소리를 듣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실제론 들었어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던 건지, 알 수 없다.

하루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가는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하는 일도 없는데, 시간만 그렇게 멀어지고 있다. 그럴수록 나의 삶은 위축되어간다. 빨리 가라고 쫓는 사람도 없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달리고 있을 뿐이다. 다른 곳에는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라도 달리는 걸음을 세워야겠다. 느리게 살아간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쫓기면서 살아가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마찬가지다. 느리게 살아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들을 수 있다. 오관을 열어놓고 살아가는 삶은 행복한 삶이다. 작년 가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억새처럼 살아가고 싶다. 좀 더 천천히 보고 느리게 생각하고 한껏 느끼고 싶다.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인생이다. 바삐 서두를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안개 그리고 시간

안개다. 그것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주 짙은 안개다. 맑게 걷힐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안개는 계속되고 있다. 안개 속을 걸어가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이 안개는 무엇을 머금고 있는 것일까? 무얼 그리 감추고 싶기에 이리도 진하게 머물고 있는 것일까?

일요일 아침, 내장사 가는 길이다. 봄을 맞이한 산사를 찾아 마음의 평화를 얻어 보고 싶어서 출발했다. 안개는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무겁게 내려앉아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걷힐 것이라 생각하고 달렸다. 그런데 웬걸 걷히기는커녕 더욱 더 진해지는 것이다. 분명 뭔가 감추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내장사에 도착한 뒤에도 걷히지 않는 안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방법으로 풀이할 수는 있겠지만 그리하고 싶지는 않다. 저 안개, 혹 인생을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운명을 나타내고 있는 건 아닐까. 당장 내일을 알지 못하고 오늘 방황하고 있는 영혼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시간이 떠올려졌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다. 다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같은 시간이 주어졌어도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르게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비탄과 미움 그리고 이기심으로 가득 채운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되어져 있다. 그런 시간을 친절과 사랑, 웃음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웃음을 짓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시간이다.

안개를 바라보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생각하였다. 한정된 시간, 마음껏 웃고 사랑하는데 사용하여야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대함으로서 웃음꽃을 피워낼 수 있다.  절대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안개처럼 불확실한 상태로 보내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한다. 내장사의 안개가 흔들리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고목과 나이 듦

한 눈에 보아도 오래된 고목임을 알 수 있다. 휘어진 나무의 모습에서 인고의 세월을 볼 수 있다. 바르게 자라지 못하고 휘어진 것은 세월의 훼방 때문이었으리라. 그동안 숱한 역경이 앞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비바람이 불기도 하였을 것이고 눈보라가 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극복해냈기에 오늘의 모습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의 시련을 이기지 못하였다면 오늘은 존재할 수 없다.

내장사 일주문 앞 고목은 그 모습이 기기묘묘하다. 구부러질 곳에서 구부리지 않고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휜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오묘한 자연의 신비를 생각하니 감탄사가 절로 난다. 저런 모습으로 자랄 때까지 감내하였을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으리라. 하지만 나무는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이겨냈다. 저 모습이 그걸 말해준다.
나무가 견뎌낸 세월을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극복하였기 때문에 주변의 어린 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다. 어린 나무에서는 그런 멋을 찾을 수 없다. 고목은, 어린나무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다 세월 덕분이이라. 세월을 이겨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이라.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누구나 비켜갈 수 없다. 흐르는 세월에 의해 나이를 먹어감으로서 늙어간다. 늙어간다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에는 어렵지 않았던 일들이 나이를 먹어감으로서 할 수 없게 된다. 늙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에 질겁한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인 걸.
고목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바꿔본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끝이 없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바꾼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아픔을 간직한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시련이 될 수 있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듯이, 나이가 우리의 삶에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고목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이순을 바라보면서 나이 먹어가는 것을 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라도 생각을 달리해야겠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게 된다면 노년의 아름다움을 발산할 수 있을 것이다.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질 수 있다. 연륜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저 맥문동처럼…

아직 세상은 회색이다. 겨울의 빛깔이 채 완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다. 봄은 아직 어른거리고만 있을 뿐이다. 봄의 힘이 시나브로 커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겨울의 힘이 미치고 있다. 어디를 보아도 초록은 채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 내장사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봄의 기운이 완연하지 못하다. 아직 겨울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다. 회백 무채색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마음까지 무거워지게 만든다. 그런데 그 가운데 초록으로 빛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맥문동이다. 맥문동은 한겨울에도 저리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문득 계절을 초월한 저 맥문동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리라. 비가 오는 날은 비 오는 날대로, 눈이 오는 날은 눈 오는 날대로 좋은 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맥문동의 초록은 계절을 초월하고 있지 않은가?



대학 시절 들었던 한 강연회가 떠오른다. 양주동 박사의 강연이었다. 그분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구름이 내려앉은 우에노 공원에서의 일을 말씀해주셨다. 분명 구름이 끼었는데 밝은 달이 떠있었다고 했다. 첫 데이트를 하는 청춘에게는 구름마저도 밝은 달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따라 날마다 달이 뜨고 햇살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아름다운 날이 되고,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이 부는 대로 멋진 날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햇살 좋은 날은 말할 것도 없고, 눈이 오는 날도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가라앉아 있으면 그 어떤 날도 좋은 날이 될 수 없다. 마음이 우울하면 날마다 고통이다.

초록으로 사시사철 제 빛을 지키고 있는 맥문동을 바라보면서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살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날마다 지루한 날이 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한 번이다. 한번 뿐인 내 인생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은가? 날마다 좋은 날일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맥문동이 초록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군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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