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 근대종교문화유산 4 명동대성당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구세군본영, 정동제일교회, 성공회 성당에 이어 이번 호에선 근대 종교문화유산의 대표격인 명동성당을 찾아가 봤습니다.


명동성당은 100여년 가까이 이 땅의 상징으로 그 역할을 해 왔다.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 ‘민주화의 성지’, 그리고 ‘이웃사랑의 아이콘’.

종교와 상관없이 서울 명동성당은 많은 이들에게 낯익은 장소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잦고, 땅값도 비싸다는 명동에 우뚝 솟은 종탑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곤 했다.

명동성당은 천도교 중앙대교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더불어 일제시대 지어진 3대 건축물 중 하나다. 한국전쟁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해 오고 있다. 명동성당 입구 맞은편은 고산 윤선도의 집터이기도 하다.


명동성당 앞 양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상


명동성당은 1970, 1980년대 격동기엔 민주화와 인권시장의 성지로서 독재 정권에 끊임없이 경고음을 울렸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끝없이 이어졌던 참배 행렬은 ‘장기기증’ 이라는 이웃 사랑과 기부 확산이라는 아름다운 파문을 남겼다.

볼거리 풍성한 ‘내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명동 거리를 지나 명동성당 들머리에 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양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상과 종탑이다. 찾는 날에 따라 그 분위기가 시시각각 변한다. 성당 입구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한가하면서도 천진난만하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자리잡아왔다.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명례방 종교집회 때였다고 한다. 이후 1894년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했으며 1898년 5월 한국 교회의 주보인 무염시태의 마리아를 주보로 대성당이 봉헌됐다.


명동성당 내부 전경


명동성당 제대


명동성당 뒤편 파이프오르간


성당 내부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

1942년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가 부임했으며 최초의 한국인 주교 노기남 주교의 수품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종현대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 초기 벽돌조 성당이며 순수한 고딕양식 구조로 지어진 명동성당은 사적 제258호로 지정됐다. 건물 양식 하나만으로도 종교와 건축사에서 모두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다.


지하성당

대성당의 평면은 라틴십자가형으로 건물 높이는 23m, 종탑의 높이는 45m다. 성당 외벽은 장식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해 순수 고딕 양식을 살렸다.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성당 내부엔 평일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신자들 뿐 아니라 명동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명동성당은 반드시 들려볼 만한 곳이 됐다.

내부로 들어가면 곳곳에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외벽과 달리 성당 내부는 아치형 복도와 스테인드글라스 등 한눈에 봐도 아름다움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조용히 기도 중인 사람들

유리화인 스테인드글라스는 원래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교육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원래는 프랑스 베네딕도회 수사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것은 1982년 고 이남규 화백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성당 앞 제대 주변으론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 12사도를 그린 성화가 배치돼 있고 최초의 한국 신부인 김대건 신부와 방한 경험이 있는 교황 요한바오로2세, 건축가의 주보성인인 성베네딕도 상도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주변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다면 최대한 가까이 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다.

성당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중앙 복도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이 역시 국내 근대 건축물에선 자주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뒤쪽 중앙엔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이 역시 한국 최초다.

조용한 쉼터 ‘지하성당’

성당에서 나오면 사제관 앞으로 묵직한 작품이 보인다. ‘예수 사형선고 받으심’ 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굳게 다문 입과 단호한 얼굴, 이마를 둘러싼 가시관이 인상적이다. 마치 이 땅의 고통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수하려는 듯하다.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 상


이 땅의 고통을 모두 짊어진 듯한 사제관 앞 작품


명동성당의 뒷모습



명동성당을 찾을 때 빼놓아선 안 될 곳이 바로 지하성당이다. 건물 왼쪽 측면에 입구가 있지만 지나치기 쉽거나 들어가기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성당은 말 그대로 성당 제대 하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미사 장소와 안치실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건립 초기엔 9개의 제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두 개만 남았다. 현재 지하성당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엥베르 범 주교를 비롯 최경환 등 5명의 성인과 4명의 순교자 유해가 있다.


명동성당은 현대사 격동의 시기마다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됐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웃사랑 정신은 법인 ‘바보의 나눔’ 설립으로 이어졌다.

명동성당이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조금 번잡한 반면 이 곳은 하루 종일 조용한 편이어서 종교와 상관 없이 눈을 감고 잠시 쉬어가기 좋다. 지하성당 고해소에선 거의 일년 내내 매일같이 고해성사가 계속된다.

명동성당 뒤편 마당엔 성모상이 있는데 이 곳 역시 기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1948년 축성 5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성당 현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나오는 길 명동 거리로 가는 길목에 ‘한마음한몸 장기기증센터’가 찾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를 ‘바보’라고 불렀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후 신청자가 대폭 늘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며 각막기증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 김 추기경의 나눔 정신은 지난 4월 설립된 법인 ‘바보의 나눔’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시대를 밝히는 또 다른 종탑이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