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52주년 특집 시국진단 연속인터뷰> 정동익 사월혁명회 의장-1


동아일보 해직기자, 30여년 동아투위 위원장 
“4. 19, 우리 운동의 역사 중 첫 번째 장”
“민주의식 전 세계에 과시, 68혁명에 영향 주기도”
“이승만, 4. 19때 국민들 평가 끝났음에도 미화해”





한국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보안법 사범 증가, 노동 탄압, 생태환경 파괴 등의 문제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공안정국’에서 파생된 숱한 문제들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위클리서울>은 2007년부터 국가보안법, 남북관계, 노동 인권, 생태 환경, 교육 등의 문제와 관련 각계 인사들과 연속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 씨, 재야인사 김낙중 선생,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김상봉 전남대 교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송환’의 김동원 감독, 김세균 서울대 교수, 강기갑 민노당 대표, 노회찬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 정세현 이종석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우종 덕성여대 명예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 선생, 박원순 변호사, 장석춘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정지영 감독, 이상돈 중앙대 교수, 손호철 서강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고은 시인, 이한열 열사 모친 배은심 여사, 박창근 관동대 교수, 배우 최종원 문성근 권해효 씨, 김용택 시인, 지율스님, 박인배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 강정구 동국대 교수,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박재동 화백, 문정인 연세대 교수,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 손혁재 한국NGO학회 회장,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박경석 장애인철폐연대 대표, 가수 안치환 씨, 김두관 경남도지사, 안종주 박사, 김정헌 공주대 명예교수, 이근행 전 MBC노조위원장,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이강택 언론노조위원장,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문재인 변호사, 서정민 한국외대 교수,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이진석 서울의대 교수,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이호철 작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유홍준 명지대 교수, 강남훈 교수노조위원장,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정연주 전 KBS 사장,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장석웅 전교조 위원장, 윤기돈 녹색연합 사무처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 ‘하얀 정글’의 송윤희 감독, 신율 명지대 교수, 강병화 고려대 교수, 정혜신 정신과전문의, 이은봉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 김명곤 전 문광부 장관,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조헌정 향린교회 목사,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방송인 김미화 씨, 조화순 목사 등 230여 명의 사회 각계 인사들과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이번호에는 4. 19를 맞아 정동익 사월혁명회 의장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어린 학생들이 2008년 거리로 엄청나게 진출했다. 국민들 의식 속에 정의를 갈구하고 불의에 맞서는 민주의식이 계승된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4. 19 정신은 이 정의와 민주의식을 대표한다. 여전히 현재적이다.”

정동익 의장은 4. 19에 대해 “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민중혁명이 성공한 예가 별로 없었다. 우리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민주의식을 전 세계에 과시한 혁명”이라며 “우리 역사에서 보더라도 민중들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으로 기록될 사건이었다. 앞으로도 우리 운동사의 역사중 첫 번째 장을 장식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4. 19는 5.18, 6월 항쟁, 촛불집회 등으로 계승돼 왔다. 6.15, 10.4 선언 등도 4월 혁명의 계승으로 평가한다”며 “비단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도 영향을 줬다. 68혁명도 4. 19에 일정 영향을 받았다. 억압이 있는 곳에 반드시 저항이 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정 의장은 70년대 동아일보 해직기자이자 30년 넘게 동아투위 위원장직을 맡아온 언론계 원로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언론장악 문제와 관련해선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척된 걸로 사람들이 착각했다. 이게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명박 정권이 잘 교육시켜주고 있다. 구속된 언론인들이 10명이 넘고, 200여명 이상이 징계 및 해고를 당하는 등 언론 분위기가 엉망”이라며 “언론자유야 말로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볼 때, 엄청나게 후퇴했다고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정 의장은 이어 “다행히 총파업에 나서고 언론인 본연의 자세를 찾겠다는 투쟁 모습을 보니까, 그래도 예전의 기개가 남아있구나 싶어서 박수를 보낸다. 이번 총파업 투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으로 끝나는 투쟁이 돼서는 안 된다”며 “이번에 확실하게 성공해야지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언론을 장악하려는 마음을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4.19혁명 52주년을 맞아 이뤄진 정동익 사월혁명회 의장과의 심층 인터뷰 전문이다.  

- 사월혁명회는 어떤 단체인가.
▲ 4월 혁명과 관련된 단체들이 상당수 있다. 대부분은 체제에 순응하는 식이고, 보훈처에서 보조금을 받아 사무실을 운영한다. 때문에 4월 혁명의 의의를 찾는데 한계가 있다. 반면 우리들은 순수하게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한다. 4. 19 주역 중에서도 대부분이 변절하거나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고 사는 반면 우리 회원들은 4. 19 당시의 정신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래도 각종 재야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운동조직이라고 보면 된다.
회원들은 4. 19 당시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이 주축이다 보니 다들 연세가 많으시다. 벌써 52주년이니까 대부분 70대 이상이다. 그래서 이제는 4. 19 정신을 계승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젊은 후배들을 영입하고자 하는데, 아직까진 진행 상황이 미비하다.

- 4. 19 그러니까 4월 혁명에서 쟁취하고자 한 것들은 무엇이었나.
▲ 4월 혁명은 4. 19를 전후해 일어났던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당시 민주주의 쟁취가 최대 목표였다.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 가뜩이나 민주주의가 압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정선거 문제까지 터졌다. 이미 국민들의 불만과 염증은 누적돼 있었다. 당시 청년들과 학생들이 정권을 타파하기 위해 맨주먹으로 들고 일어났다. 또한 통일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젊은 학생들은 북쪽 땅도 우리 땅인데 왜 오도가도 못하냐고 절규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구호가 커져갔다.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학생들이 선두에 서서 이승만의 아성에 맞서 투쟁한 것이다 이게 가장 큰 의의다.

- 우리 역사에서 4. 19는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는가.
▲ 당시만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민중혁명이 성공한 예가 별로 없었다. 우리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민주의식을 전 세계에 과시한 혁명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보더라도 민중들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으로 기록될 사건이었다. 앞으로도 우리 운동의 역사 중 첫 번째 장을 장식할 것이다.
4. 19는 이후 청년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5.18, 6월 항쟁, 촛불집회 등으로 계승돼 왔다. 6.15, 10.4 선언 등도 4월 혁명의 계승으로 평가한다. 세계적으로도 영향을 줬다. 68혁명도 4. 19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았다. 억압이 있는 곳에 반드시 저항이 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혁명이었다.

- 이듬해의 5. 16 쿠데타로 인해 4. 19가 빛을 바랜 것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 이 혁명이 1년도 못돼서 쿠데타로 싹이 잘려나갔다. 어린 싹이 제대로 크기도 전에 군사쿠데타로 뒤엎어졌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이라고 한다. 분명 안타까운 부분이다. 나중에 밝혀진 얘기지만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부는 4. 19 전에 이미 쿠데타를 계획했었다. 당시엔 군부와 학생 빼놓고는 조직화된 세력이 없었을 때였다. 노조도 없었고, 대학생 수도 적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 4. 19의 현재적 의미를 짚어보자면.  
▲ 4. 19 당시엔 대학생들만 거리로 나온 게 아니고,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나왔다. 모든 학생들이 들고 나섰다. 몇 년 전 촛불집회 역시 젊은 중고등학생들이 들고 나온 것이다. 그동안 아무런 의식 없이 학업에만 쫓기던 어린 학생들이 2008년 거리로 엄청나게 진출했다. 국민들 의식 속에 정의를 갈구하고 불의에 맞서는 민주의식이 계승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이명박 정권 들어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더라도 이번 정권으로 끝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는.
▲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국회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친일파를 전부 요직에 세웠다. 그런 세월을 통해 친일파들이 모두 친미파가 되고 사대주의 세력들로 변모해갔다. 친일파들을 이 나라 집권층으로 군림하도록 만든 원초적인 잘못이 이승만부터 있었다고 본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독재자 이승만, 박정희를 미화하고 띄우는 작업이 아주 노골화됐다. 도를 넘었다. 사실 이승만은 4. 19 혁명으로 국민들의 평가가 다 끝났다. 그때 끝났다. 그런 사람을 이제 와서 띄우는 저의가 뭔가. 이는 당연히 정치적인 음모이다. 수구냉전 세력들의 후예가 다시 재집권할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도로 보인다. 이승만을 띄우는 건 과거 독립운동 역사를 지워버리자는 것이다. 숱한 독립운동을 통해 애국선열들이 순국했는데, 그런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48년을 건국 시점으로 만들려고 한다.

<기사 이어집니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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