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마당에 허천나게 피어난 꽃들. 붉은 것이 양귀비다.

엄마. 미국 하고도 캘리포니아라는 곳에서 어떤 사람이 쪽지를 보내 왔는데 그것을 보고서야 알았어요. 그 사람이 그랬더
라고요. 나랑 자기랑 이메일로나마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 게 작년 이맘때쯤이었다고, 그러니까 일 년, 한 살이 되었다고, 그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어느새? 벌써? 이게 뭔 소리야, 등등 한참을 어리둥절해 있었지요. 그러고 나서야 현실감각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아아 참 그렇구나, 했지요. 마당에 창포꽃이 피었다는 것을, 양귀비가 허천나게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작약조차도 그 거대한 꽃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거예요. 꽃을 보면서도 꽃이 꽃인 줄을 모르고 무심히 밟고 지나다닌 세월이었다고 하면 엄마도 조금은 놀라려나?

그래요. 그러고 보니 벌써 일 년도 넘어 버렸어요. 엄마가 휠체어에 태워져서 양귀비꽃이 빨갛게 피어 있는 마당을 덜컹덜컹 소리 내며 가로질렀던, 등에 업었다가 가슴으로 안았다가 다시 업어서 어렵게, 어렵게, 참으로 어렵게 자동차에 태워야만 했던, 그렇게 간신히 자동차에 태워져서 병원으로 갔던, 가야만 했던, 5월의 햇살이 그렇게도 따갑고 찬란하고 눈물 쏟아지게 부시기만 했던 그날, 그날 엄마는 차 안에서 바나나 한 개를 다 먹어주었지요.


# 수국


그날의 그 장면만 생각하면 내 눈 앞에서 별들이 우수수 쏟아지곤 하지요. 벌써 이틀째나 죽 한 숟갈 먹는 것도 귀찮다고, 아니 속에서 받아주지를 않는다고 고개를 회회 내두르다가 끝내는 헛구역질이나 하곤 했던 엄마가, 그날 차 안에서는 어쩐 일로 그렇게 바나나 한 개를 마치 아이가 젖을 빨듯이 쭉쭉 빨아서 다 먹어주고 있었던 거예요. 운전대를 잡은 채로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나는, 나는 글쎄 무슨 기분이었던가. 하여튼 놀라고 있었지요. 그리고 신기해하고 있었지요. 신기하고 놀라서 더 이상은 운전도 할 수가 없었어요.

차를 세웠지요. 아카시아 꽃이 환장하게도 뽀얗고 하얗게 숭얼거리는 언덕배기에 차를 세워놓고 이번에는 제주산 감귤을 깠지요. 제주에서 새로 개발한 건데 그리 시지도 않고 달달해서 노인분들이 좋아한다고,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서울의 김용희씨가 보내주신 건데 엄마는 그것 또한 한 쪽, 두 쪽, 입에 넣어주는 대로 넙죽넙죽 순한 아이처럼 잘 받아 먹어주고 있었지요. 바나나 한 개에 감귤 한 개, 이거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닌가? 내가 그렇게 의구심을 갖고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쯤 엄마는 신통하게도 그만 먹는다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지요.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나왔던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새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무슨 새인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새가 나를 어디론가 인도하고 있었지요. 그곳이 아마 무 밭 근처였던가 봐요. 차창 밖으로 펼쳐진 무꽃들이 너무도 현란했어요. 전년 가을에 땅에 묻었지만 판로를 찾지 못한 채 봄이 와버린 까닭으로 그냥 흙을 밀고 올라와서 꽃을 피워버린 그 무꽃들이 겁나게도 5월의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요.

그 우울한, 그 서글픈 내력을 간직한 무꽃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외종당숙모가 생각나더라고요. 외종당숙모 돌아가셨을 때, 장지에 도착해서 관을 옮기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그때 눈을 꽉 채운 게 무꽃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때’의 무꽃과 ‘이때’의 무꽃이 너무 달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아니 혼잣말처럼 그랬지요.


#  매발톱꽃


“무꽃이 피었네. 그런데 왜 무꽃이 무꽃 같지가 않지?”
그러자 그때 엄마가 아주 뜬금없는 말을 했지요.“쩌그 노루 간다.”“노루?”
“쩌그, 저그, 어매 가 부렀다.”

그때 엄마는 정말로 노루를 보았을까?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어요. 그렇게도 꽃을 좋아하던 엄마가, 이제는 꽃을 보면서도 꽃인 줄을 모르고 아무런 감탄사도 내놓지 않는 엄마가, 그런 엄마가 도로에 세운 차 안에서 노루를 보았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지요. 그렇게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번에는 또 무엇이 브레이크를 밟게 했던 것일까요. 그래요. 나는 어느새 또 차를 세우고 있었지요. 그리고 엄마를 보았지요. 엄마는 그새 잠들어 있었지요. 엄마의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허리께로 이어지는 안전벨트가 어쩌면 금방 쓰러질지도 모르는 엄마를 붙잡고 있었지요. 하루가 정녕 스물네 시간이 분명하다면, 하루 중 열여덟 시간 이상을 잠으로 채우는 그 무렵의 엄마에게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가 않아요. 그런데도 나는 틈만 나면 자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었지요.

그날도 그랬어요. 조금 가다가 차를 세우고 엄마를 보고, 또 조금 가다가 차를 세우고 엄마를 보고, 그랬었지요. 집에서 병원까지 잘해서 이십삼 킬로미터나 되려나. 천천히 가도 이십 분 안에 도착하는 거리를 나는 그날 한 시간도 넘어서야 도착했었지요. 그래요. 그날의 그 길은 참으로 어렵게도 멀고 무거운 길이었어요. 오늘의 이 길이 엄마에게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어떤 예감 같은 것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거두절미하고 입원수속부터 밟으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엄마는 집에 가자고 슬픈 아이처럼, 버림받은 새처럼 가녀린 목소리로 울먹이다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있었지요. 차에서는 그렇게도 간단하게 바나나와 감귤을 먹어주었지만 병원에서는 다시 아무것도 넘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엄마의 팔에 주사기가 꽂히고, 머리맡에 링거가 걸리고, 엄마는 그렇게 입이 아니라 주사기로 영양을 공급받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명실상부한 중환자가 되어 갔지요.


# 큰꽃으아리


“이것은 댁으로 가져가세요.”
그날 간병인께서 그러더군요. 엄마의 옷을 죄다 벗기고 환자복으로 갈아입힌 다음이었어요.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옷가지들을 푸른 비닐봉투에 담더니 그것을 내게 주면서 집으로 가져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왜요? 퇴원할 때 다시 입어야 하는데? 그러자 간병인께서 그러더군요.
“아이고, 퇴원은 무슨, 여기는 일단 들어오면 퇴원 어려워요.”

기가 막혔지요. 어이가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간병인은 엄마의 손에서 반지를 빼더군요. 팔에 걸린 팔찌도 빼더군요. 엄마의 ‘딸년’이 가져와서 뭐라고뭐라고 종달새처럼 지저귀며 웃어대면서 끼워주고 채워준 그것을 무정한 간병인이 쓱쓱 빼더니 내게 주는 거예요. 패물을 끼고 있다가 깊은 밤중에 도난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나요.

그렇게 엄마는 간병인들 손으로 넘어갔지요. 언감생심 특실은 꿈도 못 꾸고, 내 살림에 2,3인실도 생각하기 어렵고, 간병인들이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노인병동 13인실에 어머니를 눕혀놓고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넋 놓고 앉아 있는데 그녀의 전화가 왔던 거예요.

그녀, 그녀는 참 이상한 방식으로 알게 된 사람이지요. 엄마는 모를 거예요. 하긴 아들도 몰라보고 오빠라 부르는 엄마가 얼굴도 없는 사람을 알아보고 기억할 까닭이 없지 뭐. 아무튼 말이에요. 그녀, 처음에는 여자인 줄도 몰랐고,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자였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기 사흘 전이던가, 오일 전이던가, 하여튼 그때 어느 때 이메일이 한 통 왔거든요. 열어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어요.

자기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혹시 고창 근처에 살 만한 집이 있는지, 있다면 전화로 알려주면 고맙겠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달랑 석 줄이었어요. 문장도 굉장히 무뚝뚝하고, 전후맥락도 없이 덮어놓고 그런 얘기를 써놓고는 자신의 미국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놓은 거예요.


# 작약


전화를 해야 하나? 망설였지요. 생각을 하고 또 했지만 답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뭐라고나 할까. 일단 국제전화라는 단어에서 내 손가락이 움직이지를 않았던 거예요. 자동차가 없으면 교통비가 더 들어가는 농촌의 특수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물 자동차를 두고 있기는 했지만, 기름값이 무서워서 엄마가 입원하기 전에는 한 달에 서너 차례 정도밖에 운전도 안 하는 내게 국제전화란 일단 돈과 직결되고 있었던 거예요. 게다가 전화를 해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인지, 사전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란 말이거든요.

생각다 못해 후배한테 물어봤지요. “야, 미국으로 전화를 하면 요금이 얼마나 나온다냐?” 했더니 후배녀석이 그러더군요. 하여튼 국내전화 요금보다는 훨씬 많이 나올 거라나요. 하나마나한 그런 대답을 왜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 말을 듣고 나니 전화할 생각이 싹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전화 대신 이메일로 답변을 썼지요.

뭐 숨기고 말 것도 없고, 에둘러 가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썼어요. 난 가난하다. 돈을 벌기보다는 안 쓰는 방향으로 살고 있기도 하다. 전화를 해달라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내 사정이 그러하니 이메일로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등등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냈더니 다음 날 답신이 왔더군요.

글벗이 그립고, 한 달에 한두 차례 정도 부추전에 막걸리 한두 잔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그립고, 등등 그리운 것들이 많은데 미국에서는 잘 안 된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애달프다고나 할까, 가까이 있으면 어깨라도 토닥이고 싶어지는 사연이었어요. 사연이라고 했지만 이번에도 내용이 길지는 않았어요. 아주 짧게, 간단하게, 무뚝뚝하게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하게 적어놓고 있었지요. 아, 그리고 또 하나, 고국을 떠난 지 오래돼서 문법도 맞춤법도 다 잊었다는, 그래서 죄송하다는 고백(?)이 한 줄 있었지요.

그것을 보면서 나는 글쓴이가 상당한 연배의 남자라는 확신을 가졌던 거예요. 그 왜 옛말에 수구초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는 말이 있듯이, 글쓴이의 지금 심사가 그런 것이려니 여긴 것이지요. 그래서 즉시 답을 썼어요. 나의 지금 상황이 다소 분주하기는 하지만 기거할 만한 집이 고창에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그러나 역시 전화를 드릴 수는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반드시 통화가 필요하다면 내 전화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그쪽에서 전화를 해주면 고맙겠다고 했었던 건데 엄마를 병원에 입원시킨 그날 오후 늦게 전화가 왔던 거예요.

놀랐지요. 겁나게 놀라고 말았어요.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라서 놀랐고, 나이가 상당히 들었는 줄 알았는데 앳되다고나 할까, 마치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목소리가 여리여리해서 놀라고, 하여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그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녀의 출현이 내게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날마다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다시 집으로 그렇게 출퇴근을 하게 되어버린 그 막막한 시기에 그녀와의 대화는 뭐랄까, 내 몸에서 점점 빠져나가는 어떤 에너지를 붙잡아주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것 참 이상하더라고요. 집에서 병원으로 갈 때는 그런대로 발걸음이 가벼워요. 마음이 바빠서 이것저것 정신없이 준비도 하고 단속도 하고 그러지요. 엄마의 입에 넣어줄 사탕도 챙기고, 휴지도 준비하고, 개밥도 주고, 마당에 풀도 대충 몇 개 뽑는 둥 마는 둥 바람난 무엇처럼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발걸음은 어찌 그렇게도 무거운지, 마음은 또 어찌 그렇게도 열기가 확확 풍기는 동굴 속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암담한지, 어떤 때는 마당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조차도 총쏘는 소리 같아서 무섭고 짜증스러워져 버리지요.


# 작약


꽃을 봐도 전혀 꽃 같지가 않고, 꽃으로 보인다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 꽃이거나 고목이거나 장작개비거나 뭐 차이가 있을 까닭이 없지요. 그러면서도 텃밭에 심어놓은 고추며 가지며 오이 같은 것들은 또 잊지 않고 손을 보고 있었으니 이건 무슨 신기한 작용인가 싶기도 해요. 그러고 보면 엄마도 참, 아들놈 생각은 퍽도 많이 해주었다 싶기도 하네. 고추며 오이며 생강이며 등등 봄날에 심어야 할 것들을 모두 심어놓고 난 뒤에 병원으로 실려갔으니 말이에요. 아니었을까? 그런저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때 병원으로 가야만 할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아무튼지 엄마,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직후에는 내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은근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내가 많이 휘청거렸던 게 사실이에요. 휘청거리다가 주저앉을 지경에 처한 나를 낯선 그녀가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 거예요. 하루에도 두세 통씩 들어오는 이메일을 열어보고, 답장을 쓰고, 이틀에 한 번씩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응대를 하고, 그러는 동안은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잊고 조금은 씩씩해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지금 그녀는 어찌 되었느냐고, 묻고 싶겠지요? 간단히 말하면, 그냥, 소원해졌어요. 금방이라도 한국으로 올 것 같던 사람이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못 오고, 혹은 안 오고, 매달 얼마씩 달러를 넣어줄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는 엉뚱한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항공권을 보내주면 미국으로 올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고, 나로서는 너무 어지러워서 슬슬 피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런데 쪽지가 왔네요. 일 년이 되었다고. 아직 답은 못했어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한 마디도 못한 채 그냥 있어보고 있을 뿐이에요. 일 년, 사람에게 일 년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나 골똘히 생각해보면서 말이에요.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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