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얼치기 초보 농사꾼의 주말 텃밭 농사 일지 11회

매년 여름 딸아이와 걷기여행을 한다. 이곳을 발견한 건 2010년 여름이었다. 딸아이와 걷기여행을 나선 길이었다. 평소 막연하게 전원생활을 꿈꾸어오던 터.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주말에만 지낼 생각으로 덜컥 임대계약을 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얼치기 농부의 주말 텃밭농사 짓기. 그러고 보니 햇수로 벌써 3년째다. 그저 담담하게 그려보려 한다. 피땀 흘려 농사짓는 수많은 농부들에겐 항상 죄송한 마음이다. 필자가 하는 ‘짓거리’가 장난 같기 때문일 게다. 양해를 바라며….







비온 뒤 하늘은 높고 푸르다. 입추도 처서도 지났다.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해준다. 일주일 만에 이렇듯 달라질 수도 있구나,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지난 며칠이 새삼 떠오른다. 바람에 실려 흘러가는 저 구름처럼 계절은 가고, 또 다른 계절은 다가온다. 고추잠자리들이 파란 하늘을 수놓는다. 한껏 몸집을 키운 메뚜기와 여치, 방아깨비가 그들의 몸색과 유사하게 탈색돼가는 잔디 위를 톡톡 튀어 다닌다. 지난여름을 가득 채웠던 매미 자리엔 여치가 들어앉았다.
매미 소리도 여치 소리도 서울의 그것처럼 시끄럽게 느껴지진 않는다. 산골이어서 가능한 마음의 여유 덕분이리라.

잔뜩 매달려 기대를 부풀렸던 첫 참외수확은 처절한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일주일 만에 썩어문드러져 말 그대로 초토화가 돼버렸다. 그나마 조금 상태가 양호한 것 네다섯 개를 따서 속을 열어보니 이 역시 먹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얼마 전까지 그렇게 노랗고 싱싱했던 게 이렇듯 하루아침에 온통 망가져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비도 내리지 않았고, 참외가 영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햇볕 작렬하는 날씨의 연속이었는데. 윗집 할아버지에게 물었더니 그게 바로 원인이라고 했다. 한동안 비가 내린데다가 바로 뒤이어 지나친 폭염에 가뭄이 이어지면서 생겨난 사태라고 했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 한동안 얼치기 농부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했던 참외농사는 이렇듯 허무하게 종말을 맞고 말았다. 텃밭 위 언덕배기에 심었던 수박 네 송이는 어찌 됐냐고? 묻지 마시라. 속상하다. 사실 별 기대도 없었지만 역시나, 풀 더미에 묻혀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가 돼버렸다. 혹, 모르겠다. 나중에 그 풀 더미 사이에서 주인 모르게 주먹만 하게라도 몸집을 키워 지나는 행인의 눈에 뜨이는, 눈 먼 놈 하나라도 걸려들면 다행인 거고. 얼치기에 게으르기까지 한 농부 탓이리라. 순전히, 100%!!




#1.
수확의 계절이다. 가녀린 줄기에 어른 주먹만 하게 매달려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토마토는 따주지 않으면 이 한 몸 터트리고 말겠소, 붉게 시위를 한다. 포도송이 마냥 주렁주렁 매달린 방울토마토도 건드리면 톡하고 떨어져 내릴 정도로 완숙했다. 이른 새벽마다 얼치기농부와 강아지 똥깡이의 입을 즐겁고 상큼하게 해주는 훌륭한 양식이다.

새우젓애호박볶음에 미쳐 환장하는(정말 그렇다) 얼치기농부의 입 성향 덕분에 텃밭 주변 이곳저곳 많이도 심어져 자라난 애호박과 단호박은 끊임없이 생명들을 잉태하고 키워낸다.

가운데 손가락만 하던 애호박은 하루 이틀만 지나면 족히 팔뚝만 하게 굵어져 그래 제발 나 좀 빨리 잡숴주쇼, 노래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수확 때마다 커다란 광주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덕분에 윗집 할아버지네도, 아랫집 태성이네도, 또 서울의 이웃들과 형제들도 올 한해 애호박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



여전히 몸에 무당벌레의 흔적을 간직한 채 자라는 자줏빛 가지를 따는 재미도 짭짤하다. 구부러지고, 벌레 먹어 결코 이쁜 모습은 아니지만 딸 때마다 얼치기농부의 얼굴에 자줏빛 화색이 돌게 한다. 애호박과 더불어 올 한해 효자노릇 제대로 했다.

윗집 할머니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아온 고추도 나날이 색깔을 바꿔가고 있다. 붉게 변한 놈들을 벌써 다섯 차례나 따냈다. 따낸 고추들은 올 가을 김장을 위해 마당가 바위 위에서 말려진다. 청양고추도, 거의 매주 밥상에 오르는 꽈리고추도, 오이고추와 피망도 모두 마지막 결실의 시간을 향해 몸부림을 친다. 일부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잔뜩 꽃들을 피워낸다. 꽃마다 고추가 더 열릴 것이다.




* 아버지 어머니처럼 항상 온정을 베풀어 주시는 윗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2.  
제 겨울 김장용 배추와 무 등을 심을 시기다. 윗집 할아버지네는 배추와 무의 씨앗을 파종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마당가 시멘트 바닥위에 가지런히 놓인 육묘상자의 새싹들은 밭에 심어질 그 날을 기다리며 무럭무럭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약 10여일 뒤엔 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밭은 거름을 뿌린 뒤 로터리기계로 갈아엎고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비닐 멀칭까지 해둔 상태이다. 삽으로 이랑의 모양을 잡는데 얼치기농부도 손을 보탰다. 할아버지는 올해 약 300폭의 배추를 심을 계획이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요즘 고추 따서 말리느라 바쁘다. 따낸 빨간 고추 일부는 창고 건조기에서, 일부는 배추 묘종옆 시멘트 바닥 위에서 말려지고 있다.



작년 다른 곳보다 한참 늦게 김장용 배추와 무 심기에 나섰던 얼치기농부네도 이제 슬슬 준비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작년엔 얼치기농부네 텃밭에 50포기, 할아버지네가 빌려준 텃밭에 80포기 총 130포기의 배추를 심었더랬다. 배추 모종은 읍내 종묘상에서 샀고, 총각무와 김장용 무 등은 씨앗을 사다 직파하는 방법을 썼다. 올핸 가능하다면 배추는 약 200여포기 정도를 심어보려 한다. 물론 무도 심어야 하고, 김장에 필요한 갓과 쪽파 등도 심을 계획이다. 대파와 부추 등은 지난 번 새로 씨앗을 뿌렸던 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텃밭에 아직 빈곳이 많이 나지 않아 작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벌레에게 거의 온몸을 다 내주고 있는 양배추를 뽑아내야 하고, 거의 끝물인 토마토와 가지나무도 뽑아내야 한다. 풀을 뽑아 태우거나 발효시켜 만들어 둔 퇴비를 밑거름으로 쓸 생각이다. 또 한바탕 삽질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득해진다. 지난봄엔 얼치기농부 땀 뻘뻘 흘리며 삽질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윗집 아저씨가 새로 산 로터리기계를 끌고 내려와 밭을 갈아엎어 주셨더랬다. 이번엔 거들어줄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나중에 배추와 무를 나눠주겠다며 꼬드기고 있다. 효과가 있을 것이다.




#3.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아랫집 태성이네가 이사를 했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태성이가 얼마 전 제주국제학교 수시모집 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이 된 것이다. 태성이네는, 급작스럽게 진행된 일이라 몇 주간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부랴부랴 제주도 학교 근처에 살 집을 얻었고, 이삿짐을 옮겼다. 태성이네는 지난 20일 입학했다. 동생 윤성이도 그곳 유치원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일단 태성이, 윤성이와 엄마 셋만 내려가고 태성 아빠는 서울 본가에서 지낼 것이라고 했다. 지난 해 봄 집을 사서 이사를 왔으니 1년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참으로 아쉽다. 지난 주말 마지막으로 집을 정리하기 위해 들른 태성 아빠와 막걸리 몇 사발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집은 부동산중개업소에 내놓은 상태라고 했다.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었는데…. 집이 나갈 때까진 가끔 들를 것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 이번에 이사를 간 아랫집 태성이 아빠와 윤성이



새 아침저녁으론 냉기가 느껴지는 요즘이다. 늦은 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평상에 앉아 있으면 온 세상은 고요와 적막 속으로 빠져든다. 간혹 구구구구 짝을 찾는 비둘기와 여치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밭 주변 한껏 키를 키운 옥수숫대의 실루엣이 스산하게 흔들린다. 깜깜한 하늘은 별들로 가득하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시릴 정도로 별들은 많이 빛난다. 땅에선 소담하게 피어난 코스모스 꽃들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난다. 별 헤던 시인 윤동주의 모습이 바람결에 스쳐간다. 가을이다. 별 헤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정서룡 기자 sljung99@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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