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고용노동자 투쟁의 상징’ 재능교육 노조원들의 1800일

특수고용노동자 투쟁의 상징이 된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의 투쟁이 1800일을 넘어섰다. 이명박 정권 출범과 동시에 꼬박 5년여를 길 위에서 살았지만, 이들의 투쟁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재능교육 노사는 교섭을 벌여왔지만 번번이 결렬됐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기나긴 투쟁에 대한 우려 역시 커져만 가는 상황이다. 대선을 맞아 야권에서는 특수고용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길게는 10여 년간 지속돼 온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요구를 그대로 담아내기란 역부족이다.
하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최근엔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와 회사를 상대로 한 재능교육 해고자들의 권리 주장도 탄력을 받게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23일 1800일을 맞이해 재능교육 농성장에선 “투쟁 속에서 재능교육지부는 여전히 정치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승리하는 싸움을 모든 노동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교섭안 수용은 곧 패배

길고 긴 투쟁 기간, 노조는 간간이 회사와 노사교섭을 해왔다. 하지만 노사 대화는 번번이 결렬됐다. 지난여름까지도 노사는 교섭을 벌였다. 회사는 8월 28일 노조 측에 최종 교섭안을 전달했다. 하지만 노조는 교섭안이 ‘말장난’에 불과하다며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회사 측의 최종 교섭안은 언론 등에 뿌려졌고, 노조는 다시금 ‘강성 노조’로 규정됐다. 기약할 수 없는 투쟁 장기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졌다. 하지만 5년을 싸워온 노조에게, 그 최종 교섭안 수용은 곧 ‘패배’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유명자 재능교육지부장은 “그 최종안을 받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이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적어도 조합원들에게 ‘우리가 노동조합을 인정받았고, 5년 동안 싸워서 단협을 체결했다. 부당영업 문제도 없애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우리 다시 한 번 노조를 조직해 보자’라고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조차 없다면 우리 5년의 투쟁과,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유 지부장은 “우리는 부귀영화 누리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역사에 ‘장기투쟁 끝에 특수고용노동자도 노동자라는 인정을 받고 승리해서 현장에 복귀했다’라는 한 줄은 남기고 싶다”며 “그러면 이후에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우리처럼 노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장장 1800일 동안 단식, 노숙농성, 1인 시위 등 해보지 않은 투쟁이 없다. 같이 투쟁하던 조합원들이 속속 현장으로 복귀할 때, 기쁘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하다. 그야말로 온갖 복잡미묘한 관계와 감정을 겪어내야 했던 1800일이다.

강종숙 전국학습지노조 위원장은 “투쟁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현장으로 복귀해 다시 일상생활을 하게 되면, 그 5년 전의 일상을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며 “특히 요즘 들어서는 주변의 충고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적을 받으면 울컥해서 참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실 힘든 기간을 함께 오래 겪은 주변사람들부터 사이가 벌어지곤 한다. 1000일을 넘겼을 때가 고비였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맞부딪히며 아픈 곳을 건드리기도 했었다”며 “하지만 그 기간을 견뎌내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 만큼 연대 단위들도 모여들었고, 조합원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도 크다. 승리해서 현장에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로자성 인정 첫 판결

재능교육지부는 대선후보들과의 싸움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이들은 5년간의 이명박 집권기간 이전부터 정권과의 싸움을 이어온 사람들이다. 유 지부장은 “17대 대선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도 출마했는데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여론이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건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덕이 컸다”며 “그럼에도 2002~2004년까지 3년간 단협 쟁취를 위해 투쟁해야 했다. 특히 2003년도는 열사정국으로 많은 동지들이 죽은 해였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친노 인사인 문재인 후보를 마냥 지지할 수는 없다. 재능교육지부가 정치권과의 협력 관계를 꺼려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간 숱한 투쟁사업장에서의 정치권의 개입과, 그로 인한 현장 상황을 직접 봐왔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나서야 해결되곤 하는 투쟁사업장의 분위기로 인해 노동진영의 투쟁 기운이 빠져 있는 것 역시 영향을 끼쳤다.

유 지부장은 “동희오토, 기륭전자, 현대차 비정규직, 한진중공업까지 모두 정치권이 나서서 해결했다”며 “하지만 정치권의 입김으로 노사 합의가 타결된 사업장 중 모든 문제가 마무리 된 곳은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너무 답답하다. 재능교육지부의 투쟁이 최대 모범답안이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우리처럼 5년을 싸워도 원칙이 있으면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한편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학습지 교사들에게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회사를 상대로 재능교육 해고자들의 권리 주장도 탄력을 받게 됐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부장 박태준)는 지난 1일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등이 재능교육과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 해고 및 부당 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학습지 교사에게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성은 인정되지 않아도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며 “비록 위임계약을 체결해 왔지만 일정 정도 사용 종속관계가 인정되므로 노조법상 근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학습지 지도라는 노무 제공은 학습지 회사 운영에 불가결한 요소”라며 “사측이 노조 활동을 이유로 위탁계약을 해지한 것은 부당 노동 행위에 해당돼 무효”라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부당 해고와 관련해서는 ▲수수료 실적에 따라 수입의 차이가 많이 나는 점 ▲매일 출근을 강제하지 않는 점 ▲근무 시간과 장소를 회사가 정하지 않는 점 등을 바탕으로 “학습지 교사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다”라며 기각했다.

앞서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은 2011년 7월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 및 부당 노동 행위 구제신청’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당시 중앙노동위원회는 2005년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학습지 교사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볼 수 없고 전국학습지노조도 노조법상 단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연대의 힘으로

23일 오전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는 1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사회 인사들이 모였다. 이들은 집회를 개최한 뒤 시청 앞의 재능교육지부 농성장까지 행진을 이어갔다.

유성기업지회, 현대차비정규직지회, 골든브릿지지부, 용산범대위, 강정마을 주민, 김소연 노동자대통령 후보 등 많은 연대단위가 재능교육지부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평택 송전탑 위,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문기주 쌍용자동차지부 정비지회장의 목소리도 울려퍼졌다.

“1800일의 투쟁을 이어온 재능 동지들을 존경합니다. 자본과 정권을 향해 투쟁하며, 노동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

이날 행사에는 정리해고 철회와 국정조사 실시를 요구하는 쌍용차 노동자, 용산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 제주해군기지 백지화와 핵발전 정책 폐기를 요구하는 시민단체, 기초생활보장법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장애인, 단체협약 개악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 200일을 넘긴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노동자,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탄압 없는 세상을 위한 공동투쟁’ 등이 참석했다.

조희주 노동전선 대표는 “우리의 요구는 어찌 보면 하나일 수 있다”며 “노동자와 민중, 소외받는 계층의 요구를 자본과 정권이 수용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김황식 국무총리는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면서 원전이 안전하다고 국민들을 협박하고 있다”며 “전라남도 영광 원전 주변 마을 주민 1500명은 불안해서 못 살겠다며 집회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 위원장은 “(전기 소비의) 53%가 산업용 전기”라며 “삼성 현대 포스코 같은 대기업은 원가보다 싼 가격으로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대기업에는 1년에 수천억 원을 가져다주고 국민들에게는 절전만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의헌 민주노총 위원장 대행은 “재능교육 사측은 노조의 교섭안을 받지 않으면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재능교육 노조가 제시한 첫 요구안이 그대로 최종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단체협약 원상회복과 해고자 전원복직의 약속이 지켜지고 부당해고와 폭력에 희생된 조합원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없는 한 끝까지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도 투쟁해 나갈 것”이라며 “연대의 힘으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공민재 기자 selfconsole@naver.com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