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다름

비교는 삶의 적이다. 아니 행복을 방해하는 최대의 암초다. 비교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것이어서 스스로의 생각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비교를 하게 되면 만족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교 당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교하는 일까지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지렛대가 된다. 비교는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구나 안다. 비교가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게 된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된다. 비교는 살아가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교’라는 단어가 의식에 개입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그만큼 자신을 좀 먹어 들어가는 행위이다.

비교는 차별에서 시작이 된다. 사회 속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숙명이다. 홀로 살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함께 살아가다보면 필연적으로 차별감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더 잘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것이 비교다. 차별을 느끼지 않으면 비교도 시작되지 않는다.



차별은 필연적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저마다 독특한 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니 당연 똑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르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차별을 느끼게 되면 다르다는 생각은 어디론가 실종이 되고 만다. 같은 사람인데 왜 저 사람은 나와 달리 더 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차별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사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비교는 시작되지 않는다. 같은 사람인데 왜 나와 차이가 나는지 궁금증을 가지게 되면 비교는 시작된다. 그 사람은 태어난 부모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다고 인정하게 되면 이해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차별이 아니고 다름이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면 비교는 사그라지고 만다.

살아가면서 비교하지 않을 수는 없다. 비교가 시작되면 얼른 깨달아야 한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세상을 바르게 보면 다름을 인정할 수 있고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 자족할 수 있다. 자족하게 되면 행복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함으로서 불행은 시작된다. 사람마다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내 삶도 부드러워진다.




슬픔

살다보면 기쁨과 노여움 그리고 슬픔과 즐거움을 겪게 된다. 희로애락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온다. 기쁨만을 원하여도 슬픔은 다가온다.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쁨을 원한다고 하여 기쁨이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슬픔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다가오는 슬픔을 막을 수는 없다. 기쁨과 노여움 그리고 슬픔과 즐거움은 살아가는 요소일 뿐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기쁨은 짧다. 반면에 슬픔은 길다. 기쁨의 여운은 없다. 순간을 호탕하게 지낼 뿐이다. 그러나 슬픔은 다르다. 여운이 길다. 그 끝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많은 것을 얻게 된다. 겪는 동안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동반하지만 그 여운은 길게 남아서 삶에 많은 영향을 준다. 기쁨은 순간의 쾌락에 불과하지만 슬픔은 마음에 오래 공명되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슬픔보다는 기쁨을 선호한다. 마음을 아리게 하고 아프게 하는 슬픔은 멀리하려 한다. 다가오는 슬픔을 멀리 차 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살아가면서 기쁨의 희열만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슬픔이 다가오는 것 같으면 멀리 돌아가려 한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리 간단하단 말인가? 피하고 싶다 하여 피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삶이란 거부할 수 없는 길이다. 피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기쁨이 다가오면 기뻐하고 슬픔이 다가오면 감내하는 것이 삶이다. 보통 사람들은 다가오는 기쁨에 젖기도 하고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기쁨은 당당이 받아들이고 슬픔 또한 거부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삶은 더욱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기쁨은 그대로의 기능이 있고 슬픔은 또 그대로의 기능을 한다. 기쁨만을 선호한다 하여 다가오는 슬픔을 피해갈 수는 없다. 기쁨은 찰나의 감정이지만 슬픔은 오랜 기간 여운으로 남는다. 삶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다.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슬픔은 회피할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승화해야 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슬픔이 다가왔을 처음엔 아리고 아플 수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을 소화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여운으로 남게 된다. 마음에 슬픔이 여울지게 되면 오랜 기간 동안 반추할 수 있게 된다. 슬픔은 인생을 넓게 해주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게 한다. 다양한 빛깔을 가지게 되면 삶 자체를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슬픔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더욱 더 심오하게 만드는 자양분이다.




우울증

살다보면 기분이 가라앉는 순간이 있다. 하는 일이 싫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지기도 하다.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짜증이 나고 상대하기도 싫어진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괜히 슬퍼지고 의욕상실로 이어진다. 그 이유를 찾아보지만 쉽게 찾을 수 없다. 악순환이다. 짜증이 심화되고 즐거운 기분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를 우울증이라고 한다.

우울증은 병이다. 정신병의 일종이다. 우울증이 심화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심각한 정신병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개인이나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된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스스로 이를 극복해낼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우울증을 찾아보면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슬픔·절망·비관·자기비하·자기비난·식욕감퇴·수면장애·불면증과 일상생활의 보람·흥미가 감소 또는 상실되고, 열정·활력이 감소되며 사고·행동이 느려지는 등의 증상을 경험한다. 우울증은 소중한 사람이나 물건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슬픔이나 비통과는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불행을 초래한 사건이 있을 경우, 우울한 기분이 그 사건에 걸맞지 않게 심하거나 오래 계속된다면 우울증으로 간주된다. 조증 (mania)과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를 조울증(躁鬱症)이라 한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세상의 나쁜 일은 모두 우울증에서 발현된다.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외면함으로서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마음 한번 돌리면 되는 일인데 그것을 하지 못한다. 실시간으로 압박하는 정신적 고뇌는 참기 어려운 아픔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구에게나 우울증은 온다. 단지 그 때가 다르고 그 내용이 주관적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우울증은 주관적인 병이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여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스스로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치료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친구의 도움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치료는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깊이 빠져 있는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가능하다.

살다보면 누구나 우울증과 부딪히게 된다. 나에게 다가온 우울증의 차이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강력한 의지로 맞대응하게 되면 우울증은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반대로 의지가 심약하다면 우울증은 극성을 부리게 된다.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우울증의 결과는 달라진다. 강한 의지로 우울증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세상을 찬양하자.


하루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느껴지는 세월의 속도는 엄청나다. 가속도가 붙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다. 어찌나 빠르게 가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하루는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이 금방이다. 아니 한 달이 느낄 겨를도 없이 멀어지고 만다.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야속한 세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멀리 도망가 버린다.

야속하다. 그저 속절없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 둘 곳을 찾을 수 없다.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 대상이 없다. 마음은 간절한데,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저 멀어지는 세월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허망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멍한 상태에서 지켜보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붙잡고 싶은 욕심으로 몸부림을 쳐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다. 60여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다. 엊그제의 일처럼 눈앞에 생생한데 벌써 30년, 40년이 지난 일들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앞에서 하루란 하나의 단위가 될 수 없다. 일주일도, 한 달도 금방인데, 하루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 하루를, 24시간을 경시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생각도 나지 않는다. 세월의 단위를 일주일 아니면 한 달로 여기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의 나에게 하루는 너무나 짧은 찰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루를 경시하게 됨으로서 시간은 더욱 더 빨리 지나가게 되었다.

세월이 아무리 빨리 지나간다고 하여도 세월의 단위는 하루다. 스스로 아무리 무시하고 경시하여도 하루는 존재한다. 하루 24시간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세월이 더디 가고 있었을 때에도 있었고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 지금도 분명 하루는 존재하고 있다. 단지 내 의식에서만 사라져 있을 뿐이다. 무시함으로서 나는 잊어버렸다.

이제라도 되찾아야 한다. 스쳐 지나가는 세월을 잡기 위해서라도 하루를 찾아야 한다. 하루를 알차게 채워갈 수 있어야 세월을 붙잡을 수 있다. 하루 24시간을 보람으로 가득 채울 수 있어야 내 인생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하루를 채우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하루는 그래서 소중하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군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