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지음/ 문학과 지성사




지난해 출간한 장편소설 『레가토』(창비, 2012)로 제45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며 “항쟁세대의 고해성사라고 부를 만한 권여선 소설의 절정이자 한국 문학에서 기억의 윤리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평을 받아안은 권여선이 네번째 소설집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 2013)을 선보인다.

2010년에서 2012년에 걸쳐 발표된 중단편을 모은 이 책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하지만 앞선 작품 『레가토』가 ‘학생운동’의 절정인 한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 것이라면, 이번 소설집은 짧고 긴 인생들 사이에서 쌓고 지워가는 기억과 망각의 깊이를 통해 삶의 심연을 가늠하게 한다.

절대 잊지 못하리라던 기억을 깨우는 잔상들을 하나씩 좇아 힘겹게 불러내지만 그 또한 실제 ‘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젊은 날 한 시기를 동거하며 매일같이 함께 생활한 친구와 그 속에 품은 자신의 치기와 과오들을 까맣게 잊고 살아 왔음을 떠올릴 때, 우리가 인생이라는 망각의 힘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잊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면 섬뜩하다. 또 우리의 인식 뒤로 숨은 그 많은 망각들은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하지만 이것은 목적한 대로 살 수 없다는, 인생이 하는 일에 인간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절망인 동시에 해방이고 자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을 통해 우리는 실로 무수한 비자림에 가려진 인생들을 성찰하고 삶이 품은 기억과 시간의 흔적을 받아들인 권여선의 해방과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은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애인의 죽음, 형의 죽음, 아들의 죽음을 가운데 두고 있는 세 인물의 만남을 다룬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아픔의 상기이고, 상처의 복기인 이들의 만남은 시작 전부터 ‘대체 왜?’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한 가족의 만남처럼 투닥거리며 식사를 나누고 바람을 쐬러 비자 숲으로 향하며 형을 추억하는 한 일화를 말하면서, 한여름 뙤약볕 아래를 달리는 차 안에서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다. 불러 애도할 이름이 소멸된 것이 존재의 소멸보다 애석하다고 말하던 주인공은 그 순간 발작을 하듯 웃음을 터뜨린다. 이는 긴 시간 속에서 상처도 추억도 그러안는 인간의 너른 품과 살아 있는 한 웃을 수 있다는 인생의 또 다른 단면과 마주하게 하며, 그들이 향해 달리는 “점점이 깃털처럼 흩어진 구름 사이로 햇살이 분말처럼 반짝”이는 그러나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비자 숲(삶의 굴곡)으로 들어가기를 기꺼이 반기게 한다.

정리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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