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갈 길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사방에서 감지할 수 있다. 온몸의 세포들까지도 손을 들어 환영한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따뜻한 햇살 속에서도 봄의 기운을 찾을 수 있다. 세상은 힘을 얻어가고 있다. 혹독한 겨울바람에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시나브로 일어나고 있다. 봄의 활기를 받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있다.

이순의 나이에 또 한 번의 봄을 맞이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그동안 수많은 봄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순의 나이에 만나는 봄은 여느 때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온 몸에 전달되는 봄기운을 만지면서 예년의 봄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갈 길을 인식한 상태에서 봄을 맞이하기 때문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가야할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인식을 하고 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길을 가야 한다. 열정이 넘치던 젊었을 적에는 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였다. 아니 의식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냥 바쁘게 걸음만 재촉했을 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순의 나이가 되니 다르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머뭇거리게 된다.



이순의 나이가 되면 보인다. 갈 길의 끝이 보인다. 끝이 보이는 길을 가다보면 당혹스러워진다. 길을 따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갈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싶은 욕망이 커진다. 끝에 도달하고 싶지 않다. 그 끝은 너무나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 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두렵다. 가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누구라도 가야만 한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오늘에,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그 끝이 아무리 허망할지라도 오늘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차근차근 채워가다 보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갈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하더라도 당당하게 걸어가련다. 봄은 왔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별들을 헤아리며 꿈을 생각하였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세다가 지쳐서 그만두기를 수도 없이 하였다. 그래도 다음날 밤이면 다시 별들을 세면서 즐거워하였다. 어린 시절의 얘기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아니 하늘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저 땅만, 아래만 내려다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는 이내 습관으로 굳어져버렸고 별 또한 멀어져 갔다.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었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 중에 내 별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많은 별들 중에서 내 별을 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하늘 어디 즈음에 내별이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는 내 별을 따다가 꿈을 이룰 것이라 다짐하곤 하였다. 커가면서 고개는 자꾸 아래로 향했고 그러면서 내 별도 사라졌다. 꿈도 함께 사라졌다.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야 우연히 하늘을 보게 되었다.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들이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동안은 잊고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잃어버렸던 것일까? 아리송한 일이다. 분명 의식적으로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놓아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별은 내 곁에서 사라져버렸다.

별을 잃어버린 삶은 삭막하였다. 웃을 일도 많지 없었다. 꿈을 잊어버린 사람의 인생은 절대 아름다울 수가 없다. 상대방을 배려하기도 어렵고 존중할 수도 없다. 커지는 것은 욕심뿐이었다. 상대를 존중하는 대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욕심을 채우려는 이기심이 커질수록 더욱 더 괴물이 되어갔다. 따스한 정이 사라지고 욕심만을 앞세우는 사람이 되었다.

하늘의 별을 다시 찾고 나서는 달라졌다. 나도 모르게 욕심이 줄어들었다.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됐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별처럼 빛나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소함과 무상

살다보면 별의 별일을 다 겪게 된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해내야 하는 일도 많기 때문에 겪는 모든 것을 다 가슴에 새길 수는 없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고 사소한 일들은 무시하게 된다.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은 없다. 그냥 관행대로 그렇게 사소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소한 일을 무시하지 않게 되면 살아가는 일은 고행이 된다.

일단 사소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나면 쉽게 생각한다. 사소한 일보다 더 중요하고 꼭 지켜야 할 일을 챙기는 것은 지극한 당연한 것이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조차도 모두 다 해낼 수는 없다.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도 있고 능력 범위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사소한 일까지 신경을 쓰며 살아갈 수가 없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오늘 뜬 태양과 내일 뜬 태양도 다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감으로 인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을 우리는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우리 몸도 쉴 사이 없이 변하고 있다. 세포가 바뀜으로 인해 시시각각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니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뀌는 세포를 우리 눈으로는 구별해낼 수가 않다. 그 변화를 사소한 일이라고 여기고 무시하게 된다.



사소한 일을 무시하는 일이 생활이 되어 있다. 사소한 일은 무시하여도 삶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작은 변화까지 챙기면서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중요한 일만을 챙기면서 살아가기도 힘들고 벅찬데, 어떻게 사소한 일까지 챙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느냐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문득 사소한 일을 무시함으로서 잃는 것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상은 작은 변화를 의미한다. 바위가 풍화작용에 의해 모래가 되는 것도 사소한 일이 모여서 이루어진 결과다. 물론 바위가 깨져서 모래가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소한 일이 원인이 되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사소한 일을 무시함으로서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사소한 일은 전체를 보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소한 일도 그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일이 모여서 큰 결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상은 그래서 중요하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미리미리 대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소한 일이라도 적정한 대처를 한다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무상한 세상, 사소한 일도 중요하게 여기면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살림

‘살림’하면 흔히 어머니를 생각한다.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분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집안의 살림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가정의 살림은 어머니가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이 굳어져 있었다. 살림이 잘 꾸려지면 현모양처라 이름을 붙였고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다. 살림은 어머니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이었다.

그런데 달라졌다. 어머니가 전담을 하던 살림이 이제는 어머니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 경계선이 무너졌다. 아버지가 살림을 도맡아 하기도 하고, 가족 모두가 살림에 참여하기도 한다. 살림의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지 않으면 화목한 가정이 되기가 어려워진 점도 있다. 소통과 대화를 통해 힘을 합해야 살림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살림’은 ‘살리다’라는 뜻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살림을 잘하였다면 가정을 살려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 살림을 잘하였다면 나라를 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림은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고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생동이다.



살림은 살려낸다는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풍요로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개인을, 가정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나라의 번영과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다.

가부장 시대에는 어머니가 살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남녀평등시대로 바뀌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살림의 주관자가 어머니에서 가족 모두에게로 확장되었다. 어머니 혼자선 할 수 없게 되었다. 구성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화를 통해 마음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마음이 될 수 있다.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상호간에 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대화가 살아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살림은 물론이고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군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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