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각 지음/ 서해문집





효명세자는 조선의 제23대 국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맏아들이다. 1827년(순조 27) 2월 18일부터 1830년(순조 30) 5월 6일 급서할 때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에 임하면서 조선을 경영한 실질적인 국왕이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3년, 그 짧은 시기는 양난으로 멸망 지경에 이른 조선이 영·정 시대를 거쳐 재기할 수 있던 유일한 기회였다. 부패한 관료와 양반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반발은 홍경래의 난으로 대표되는 민란으로 속출했고, 천주교로 대변되는 서구 세력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던 상황에서 그가 시도한 개혁의 의미는 실로 자중했다. 죽어서는 문조익황제(익종)로 추존될 정도로 뜨겁고 강렬하던 효명세자가 꿈꾸고 시도한 개혁의 비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효명세자는 무엇보다도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일방독재로 쇠약해진 왕권 회복에 힘썼다. 국왕 부부를 위해 여러 차례 진찬과 진작을 거행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아울러 그는 할아버지 정조처럼 탐관오리를 엄하게 다스리고, 과거제도를 정비하는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전 방식으로는 고착된 현실을 타파할 수 없다고 깨달은 그는 이전까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예악禮樂’이란 무기를 꺼내든다. 마치 성군 세종이 즉위 초기부터 예악을 정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처럼.

이에 효명세자는 부왕에 대한 효성을 빌미로 전례 없이 화려한 궁중 연회를 주관하면서 치사와 전문을 직접 지어 올리기도 하고 이름만 남은 옛 정재呈才(국가 행사와 연회에 쓰이는 무용)들을 자신의 악장으로 되살려내기도 했다. 또 ‘춘앵전’을 비롯해 수많은 정재를 직접 새로 만들거나 재창작했다. 지금까지 전하는 53종의 궁중 정재 중 무려 26종이 이때 효명세자가 새로 만들거나 되살려낸 것이다.

그런데 효명세자가 이처럼 유명무실하던 궁중 의식과 정재를 왕권 강화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실로 창의적이고 혁명적이다. 이전의 정재들이 국가 창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춤이던 데 반해 효명의 정재는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영광을 재현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효명세자는 신권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안동 김씨 세력의 일방통행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권 내내 전국을 휩쓴 기근과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들고, 강고한 세도정권에 충성하는 탐관오리들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세자는 절망감에 휩싸인다.

그 와중에 세자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 세도정권은 맹공을 퍼부음으로써 세자의 노력을 신권정치의 틀 안에 가두어버렸다.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심신의 피로를 이겨내지 못한 세자는 갑자기 숨을 거두었고, ‘효명孝明’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치장되어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아울러 조선의 중병을 치유하고 왕권을 회복하려던 원대한 포부도 깨끗이 지워졌고 파탄 지경의 정재를 발전시켰다는 예술적 허명만 남았다. 그의 개혁이 물거품이 되면서 박규수를 비롯해 새 조선을 꿈꾸던 젊은 지식인들도 아득한 절망에 빠졌고 밀려들어오던 서구 열강의 포효를 들으며 전율해야 했다.

정리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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