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기획 : ‘귀농 열풍’ 그 현장을 찾아서-8> 경북 상주의 ‘포도밭 농사꾼’ 박종관 씨

귀농바람이 한창이다. 귀농 붐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비롯됐다. 1970~198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차출’돼 탈농을 이끌었던 이들 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회귀해 ‘인생 2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낀 30~40대까지 귀농에 가세, 농촌에서 제 2의 인생을 꿈꾸는 귀농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귀농인들은 주로 소일거리를 통한 활력 회복, 전원생활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건강 추구 등을 이유로 농촌행을 결심하고 있다. 물론 생계수단으로 귀농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위클리서울>은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들어간 이들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 이후의 생활 등을 들어봄으로써 귀농의 현실을 짚어보기로 했다. 이번호에는 경북 상주 모동면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있는 박종관(42)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땀 흘리는 보람 있어야

박종관 씨는 1998년 대학을 졸업한 직후 귀농했다. 졸업하기 1년 전부터 지역 농가를 돌아다니며 귀농지를 물색했다. 당시 나이 27살. 결혼을 약속한 애인과 함께 떠났고, 귀농과 동시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아내 역시 귀농을 꿈꾸었던 터라 귀농 자체에 관해선 의견 충돌이 없었다.

큰 뜻이 있어 젊은 나이에 귀농을 결심한 건 아니다. 신학대 학생이었던 박 씨는 신앙적인 고민과 이십대에 갖고 있던 실존적인 고민 사이에서 늘 선택의 순간을 기다려왔다. 목회자의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말 보단 행동을 앞세우고 싶었고 땀을 흘려 살고 싶었다. 

“사회행동적인 삶보다 말로 살아야하는 위치에 서게 되잖아요. 흔히 관념적이 되거든요. 거기에 대한 반동심리가 있었죠. 좀 더 정직하게 땀을 흘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직한 땀을 흘리고 싶은 바람이 있었고, 그러다 귀농을 결심하게 됐죠. 부모님도 일단 제 결정을 찬성했어요. 처가에서도 믿어주셨고 자연스럽게 귀농해서 지금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부부의 첫 행선지는 경북 김천이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었다. 농사는 번번이 실패했다. 김천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2001년 김천보다 임대조건과 토양이 상대적으로 좋은 상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야말로 땅을 찾는 여정이었죠. 3년간 워밍업을 했습니다. 그런 뒤 이곳 상주에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상주엔 포도가 잘 된다고 해서 주작목을 포도로 정했죠. 물론 포도농사도 처음엔 어려웠어요.”   
  
상주에 처음 짐을 내려놓을 당시, 인근엔 농가가 없을 정도로 삭막했다. 골짜기 지대에 있던 집을 수리해 살았다. 농사지을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아 난감한 상황이었다. 무작정 동네 주민들을 쫓아다니며 농사를 배웠다.

“서두르지 않았어요. 처음엔 남의 땅에서 임대농 하다가 2006년에 땅을 사게 됐어요. 그 때가 정착시기라고 보면 되겠죠.”

오랜 세월 상주에 머물렀지만 주민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숙제거리라고 한다. 이장 직을 맡기도 했지만, 연세가 많은 대다수 주민들을 상대하는 일이 여전히 녹록치 않다는 박 씨. 그는 이장이라고 해서 주민들로부터 100%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선거로 당선된 이장이어서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주민들 입장도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선거열풍이 불었잖아요. 우리 마을도 마찬가지였죠. 선거에 당선돼 저도 올해 이장이 됐어요. 주민 모두가 절 마음에 들어 하진 않으셨겠지만 기본적인 신뢰관계는 구축된 것 같아요. 초기엔 아무런 연고 없이 들어와서 도시에서 사고치고 온 놈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식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죠. 이장하기 전까지 6년간 마을회 총무 일을 맡았었거든요. 거기서 신뢰가 많이 쌓인 것 같아요.”

그래도 마을 일원으로 적응하는 데까진 어려운 과정이 많았다. 정착 초기엔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컸다. 

“상주에 정착하고 8년 정도는 떠돌이 생활을 했어요. 초기엔 제 땅이 없어서 이 동네 저 동네 떠돌며 농사를 지었죠. 그래서 이사도 자주 했습니다. 어디 빈집 있으면 들어가 살고 그랬어요. 다행히 지금 사는 집은 제 명의입니다. 숨 좀 돌릴 수 있게 정착한지는 불과 몇 년 안 된다고 봐야죠. 물론 지금도 경제적으론 여전히 어렵고 농사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무사 정착. 축하받을 일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정착할 때쯤 서울에 있던 친구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처음 귀농할 때 주변 지인들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동의를 받은 것도 아니었어요. 물론 제 일이니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돌이켜보면 귀농 이후 도시에 있는 친구들에게 신경을 못 쓴 것도 사실입니다. 도시 사람들은 그들대로 바쁘고, 농촌 사람들은 농촌대로 바쁘니까 자연히 단절되더라고요. 요즘은 도시 친구들과 연락도 뜸 하고 그렇습니다. 대신 이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웃음).”  




베테랑? 여전히 미숙한 농군

현재 박 씨는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 4월부터 5~6월까지는 눈 코 뜰 새조차 없다. 이른 새벽 일어나 해질녘까지 현장을 돌본다.  

“바짝 일을 해야 할 때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중노동을 합니다. 저녁 먹고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져요. 낮에 가끔 가볍게 막걸리 한잔씩 마실 때도 있지만 속 편하게 술 마실 여유도 없습니다. 한 해 농사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기니까요. 농한기에도 곶감 작업을 해야 하니까 봄철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요.”

귀농 16년차, 아무리 힘든 농사일이지만 이제 기본은 안다는 박 씨의 얘기. 포도밭 3000평, 논 1400평 등 5000여 평에 이르는 농지에서 포도와 곶감 등을 재배하고 있다.

“연 4000만원 정도의 매출을 냅니다. 도시노동자들보다는 돈 들어갈 일이 적으니 같은 연봉이라면 여기서 생활하는 게 풍요로울 수밖에요. 도시에서의 100만원과 시골에서의 100만원은 다르잖아요. 한편으론 땅 살 때 낸 빚이 있어서, 돈 좀 번다고 여유를 부릴 수는 없어요.” 



박 씨는 후배 귀농인들에게 농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매스컴들이 예비 귀농인들에게 환상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막상 귀농하면 현실과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큰 환상을 가지면 안 됩니다. 매스컴에서 행복하냐고 물으면 행복하다고 말할 뿐이죠. 제 경우는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살고 있지만, 제가 시골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무척 고됐거든요. 저도 귀농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 귀농인’ 입니다. 물론 돌아보면 행복하고 나름 의미가 있었죠. 하지만 귀농도 현실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현실은 끝이 없어요. 농촌에서의 삶도 항상 치열하고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도시에서도 야근을 하지만 여기서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은 싸움의 과정이고 자기갈등의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한번쯤은 고민하고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박 씨.

“농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삶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있다면 귀농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도시에서 기계부품처럼 사는 것보다 낫잖아요. 도시에서 살다보면 자기주관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농촌에선 자기주관을 가질 수 있거든요. 열악한 환경 가운데 경제적인 수단으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저는 높이 삽니다. 삶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니겠어요.”





박 씨는 여전히 농사일이 어렵다고 했다. 남들은 베테랑 농군이 다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박 씨. 평생의 목표는 ‘제대로 된 농사’를 짓는 것이다. 동시에 어떻게 가치 있는 삶을 주민들과 함께 영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제 꿈은 단순해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아요. 아직도 농사에 미숙한 것 같거든요. 그래서 농사를 지속적으로 잘 짓고 싶어요. 마을에서 가장 꼬장꼬장한 최고 어르신이 와서 ‘제대로 된 농사를 지었다’고 칭찬하는, 그런 작품을 만들어내야죠. 농사 이외에도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할 일이 많아요. 귀농해서 살아보면 자기가 마을에서 뭘 해야 할지 눈에 보이거든요. 농사일 외에도 마을 주민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어요. 아직은 젊은 농군으로서 주민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앞장서야겠죠.”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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