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기획 : ‘귀농 열풍’ 그 현장을 찾아서-9> 전북 순창의 ‘꾸지뽕’ 농사꾼 김종윤 씨

귀농바람이 한창이다. 귀농 붐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비롯됐다. 1970~198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차출’돼 탈농을 이끌었던 이들 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회귀해 ‘인생 2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낀 30~40대까지 귀농에 가세, 농촌에서 제 2의 인생을 꿈꾸는 귀농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귀농인들은 주로 소일거리를 통한 활력 회복, 전원생활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건강 추구 등을 이유로 농촌행을 결심하고 있다. 물론 생계수단으로 귀농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위클리서울>은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들어간 이들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 이후의 생활 등을 들어봄으로써 귀농의 현실을 짚어보고 있다. 이번호에는 전북 순창에서 꾸지뽕 나무 농사를 짓고 있는 김종윤(59)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꾸지뽕으로 건강 되찾아

‘뽕나뭇과의 낙엽 활엽 소교목. 또는 관목. 잎은 긴 타원형 또는 거꾸로 된 달걀 모양이며 흔히 세 갈래로 갈라진다. 초여름에 노르스름한 꽃이 두상(頭狀) 화서로 피고 열매는 장과(漿果)로 9~10월에 붉게 익는다. 열매는 식용하며 잎은 양잠 사료로 쓰고 나무는 목공재, 땔감으로 쓴다. 산기슭 양지 쪽이나 마을 근처에서 자라는데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Cudrania tricuspidata)’ <네이버>

‘꾸지뽕’에 대한 설명이다. 김종윤 씨가 경기도 인천에서 이곳 전북 순창으로 내려온 건 2006년의 일이다. 애초 귀농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친 김 씨에게 도시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이어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아내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을 키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살고 있던 집을 팔고 농촌으로 내려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농촌행을 결심했다. 돈 욕심을 버린 귀촌이었다. 

“도시에선 더 이상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시골로 내려온 건 아닙니다. 그나마 시골에 있으면 도시보단 돈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무작정 내려온 겁니다. 집사람도 심장이 안 좋아 공기 좋은 곳이 필요했고요. 딸만 셋 있는데 이 중 결혼한 둘은 손자들과 함께 내려왔어요. 도시에서의 삶을 힘들어하더라고요.”

내려온 뒤 아내의 병세는 호전됐다. 김 씨 역시 서서히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딸들도 시골생활에 만족했다.

“여기 온 뒤 아내는 굉장히 좋아졌어요. 심장도 좋아졌고 관절도 좋아졌죠. 완전하진 않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니까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완치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가벼운 일도 하고 함께 열매도 따고 그래요.”

김 씨 가족이 안정을 되찾게 된 데는 ‘꾸지뽕’의 덕이 컸다. 꾸지뽕 나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고, 꾸지뽕 잎차를 마시며 건강을 되찾았다는 게 김 씨의 얘기다.

“꾸지뽕 나무의 좋은 것을 순서대로 열거하자면 뿌리, 나무, 잎, 열매 순입니다. 열매는 많이 안 먹어요. 주로 잎을 많이 먹죠. 잎이 재배하기도 편하고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하거든요. 집에서도 항상 잎차를 끓여먹고 그걸로 밥도 짓습니다. 사람들이 꾸지뽕에 대해 잘 모르니 광고를 좀 하자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소변이 잘 나오고 피부가 좋아져요.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혈액순환도 잘 되고 항암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가장 큰 특징은 살균력이 좋다는 겁니다. 나무 자체에 병도 없어요. 우리 몸속의 염증도 제거해주죠. 관절염에도 좋고 남자들 전립선에도 좋다고 해요. 집사람도 꾸지뽕 잎차를 꾸준히 마신 뒤 관절이 많이 좋아졌어요.”



건강에 좋다는 꾸지뽕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많이 알려지진 않은 나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드물어 ‘귀농업계의 블루오션’이라 불려도 무방하다는 김 씨의 평가.

“알 만한 사람들만 알아요. 그래서 수확을 하고나면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으로 팔수 있더라고요. 서울 등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잎과 토막 낸 나무줄기를 팔죠. 택배로 직거래하는데 돈이 좀 됩니다. 사실 땀 흘리는 것에 비하면 돈을 좀 많이 벌어들이는 편이예요. 지금은 수확량이 얼마 안 돼서 비싸게 받는데, 농사짓는 사람이 늘고 생산량도 늘어나면 가격도 싸지겠죠.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이 못 사먹을 정도로 비싼 건 아니에요. 5만원 정도의 꾸지뽕잎이면 6개월 정도 끓여먹을 수 있죠. 그래도 저는 비싼 거라고 봐요. 생산량이 늘어나면 가격이 내려갈 겁니다. 그렇게 돼야 하고요.”

꾸지뽕 사업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고 말하는 김 씨. 그는 꾸지뽕 사업이 활성화 돼 모든 국민이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려오자마자 텃밭이 될만한 땅부터 찾았어요. 간단한 텃밭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에 집을 짓고 살려고 했죠. 그런데 집을 짓고 보니 집 뒤에 꾸지뽕 나무 한그루가 있는 겁니다. 당시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 줄 몰랐어요. 저게 무슨 나무지, 하고 궁금하긴 했죠. 동네에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사시는데 그 분이 꾸지뽕 나무에 관심이 많아서 마침 자신의 뜰에서 자라는 꾸지뽕 나무를 연구하고 계시더라고요. 이게 몇몇 지역에 많이 자란다고 해요. 전라도 지역에도 많죠. 지금 제가 사는 동네 뒷산에 가면 꾸지뽕 나무가 널려 있어요. 문제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무인데다 가시가 많아서 경계한다는 거죠. 어쨌거나 그 국어선생님이 예전부터 꾸지뽕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은 학계에서도 약효를 인정받고 있는 나무라고 하더라고요.”

김 씨는 귀농 초기부터 그 교사와 꾸지뽕을 재배할 수 있는 방법을 수년간 연구했다. 

“열매가 잘 나면서도 가시가 없는 꾸지뽕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와 접목해봤죠. 번식시키기 위한 노력도 계속했습니다. 씨를 심어서도 접목을 시도해봤는데 결국 성공했어요. 하다보니까 가시 없는 꾸지뽕 탄생하게 된 겁니다.”



 
주민들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

최근 들어 국내 의학계 등에서 암에 좋다는 발표가 이어지고 있는 꾸지뽕. 김 씨는 현재 묘목 생산에도 한창이다.

“산에 다니면서 여름에 표시해놨다가 겨울에 파와서 팔아요. 지난해에도 꽤 수익을 올렸어요. 시골로 내려오고 몇 년간 꾸준히 큰 수익을 내고 있어요.”

꾸지뽕 외에도 재배하는 작물이 많아 김 씨의 연 수익은 1억대에 달한다.

“꾸지뽕 외엔 다른 농사 생각이 없었는데, 누가 땅을 싸게 팔아서 샀어요. 2000평 넘는 땅을 개간해서 배농사도 짓고 있어요. 배농사, 청국장 판매 등 해서 1년에 3000만원 정도 벌어들여요. 여기에 꾸지뽕 잎과 나무로 매년 6000~7000만원 정도 벌어들이니까 1억 정도 번다고 봐야죠.”

김 씨는 귀농 직후 2년 동안은 마을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처음엔 동네 사람들하고 무조건 가깝게 지내려고만 노력했어요. 농사엔 욕심이 없었죠.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남의 논에서 농사 짓는 걸 돕다보니까 건강도 좋아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주민들의 도움으로 꾸지뽕 사업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김 씨는 억대 연봉을 벌어들이는 입장이지만, 귀농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귀농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전혀 안지어본 사람들이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을 많이 하죠. 그래서인지 대부분은 빈손으로 내려오지 않고 돈을 싸들고 오더라고요. 일종의 여유자금이죠. 그런데 저는 여유자금 없이 내려왔어요. 그냥 쉬려고 왔던 거죠.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이나 잃지 않고 서로 돕고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온 겁니다. 농사 욕심도 없었죠. 처음엔 날마다 동네 어른들과 막걸리 마시며 그렇게 지냈어요. 그러다가 동네 교회 목사님이 반찬도시락 배달하는 일을 돕게 되었어요. 무상으로 하기도 했죠. 그렇게 살다보니, 농사도 안 짓는 제게 동네 사람들이 쌀 몇가마니 씩을 주더라고요. 귀농 첫해에 있었던 일이예요. 귀농은 그런 각오로 했으면 해요. 똑똑하다고 계산하면서 살면 안 돼요. 그저 어울리고 희생하려고 해야죠. 희생한 만큼 돌아오는 게 있어요. 시골 인심이 그렇게 팍팍하진 않거든요. 다들 나누며 살아요.”
연봉 1억원대의 김 씨. 그는 이제 베푸는 입장이다. 귀농보다 귀촌의 뜻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의외의 행운을 가져다준 건 마을 사람들이라는 김 씨의 얘기. 

“지금의 저는 베푸는 입장입니다. 제가 ‘쏘는’ 경우가 많죠(웃음). 동네 사람들에게 고기나 술을 사는 일이 잦아요. 이게 다 그분들 덕택이니까요.”

김 씨는 예비 귀농인들에게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처음 내려가면 마을사람과 가깝게 지내야 해요. 두달만이라도 바짝 친해지려고 노력하면 길이 보일 겁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가깝게 지내다보면 정보를 많이 줘요. 좋은 집과 땅도 구할 수 있어요. 다 준비해서 내려 갈 수는 없거든요. 일단 그렇게 의지할 곳이 확보가 되면 다른 마을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알선해줘요.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3~4년은 고생한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농사도 쌀농사와 같이 1년짜리가 있고, 저처럼 장기간 걸리는 나무 농사가 있죠. 이것저것 함께 하다보면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게 돼요. 저는 운이 좋아서 쌀농사보단 손이 덜 가는 꾸지뽕 나무를 재배하고 있죠. 저는 이제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돈보단 나무를 가꾸겠다는 생각이에요.”



귀농 초기 힘들었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김 씨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내’라고 한다. 

“처음엔 집을 못 짓게 하더라고요. 마을 꼭대기에 집을 짓는다고 하니까 주민들이 반대하더라고요. 그냥 밀어붙였어요. 포클레인이 등장하니까 마을 어른들도 다 포기하더라고요. 그땐 외지인에 대한 그저 그런 인식 때문에 저도 신경이 날카로웠죠. 생각해보니 그때 어르신들과 사이가 틀어졌다면 지금 이렇게 살 수 없을 겁니다. 다행히 술 잘 마시고 친해지며 잘 무마됐죠(웃음).”

사계의 일상이 그저 한가롭다는 김 씨. 꾸지뽕 나무 접목 시기인 4월이 지나면 가을까지 크게 힘들 일이 없다고 한다. 돈 보다는 아내의 건강과 가족의 건강 그리고 마을주민들과의 소통이 우선이라는 김 씨. 그는 오늘도 마을 주민들의 부름을 받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주작목인 꾸지뽕엔 손이 많이 안 가요. 알아서 잘 자라거든요. 저보다 어려운 어르신들 일 도우러 가야죠.”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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