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추끈 묶기. 배낭에 나일론 고추끈을 두 개 넣고 가면서 묶는데 엉거주춤의 이 스타일이 사람 골병들게 한다.


<이야기 하나> 고추 심던 날 풍경

아침 챙겨먹고 마산면 이사리에 도착하니 8시다. 박병문 서천농민회장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고추 심을 밭으로 이동, 모종판도 돌리고 몸도 돌리고 뭐든 막 돌리고, 한참을 정신없이 바쁘게 돌렸다.

박 회장 부부, 고석홍 이장 부부, B급 일꾼인 나. 이렇게 5인이 착착 손발을 맞추어 돌리니 오전 중에 600평의 밭에 2200포기의 고추를 다 옮겨 심었다.

점심을 금강하구둑 볼테기 냉면집에 가서 먹고, 오후엔 고춧대(쇠파이프 말뚝) 600개를 박아야 한다. 점심 먹고 나니 한낮의 날씨는 100퍼센트 여름이다. 졸음이 살짝 몰려오고 근육에 젖산이 쌓이기 시작한다.

마음속으로 아자아자를 외치면서 배터리에 충전을 계속하는 한편, 농사용 연료인 막걸리를 만땅으로 채우니 기계는 무리 없이 잘 돌아간다.

잠시 나무그늘에 앉아 쉬는데 마을 이장님이 “목사님, 이제 보니 진짜 ‘자유인’이시네요. 나는 입을 나불대는 목사들 별로로 생각하는데 목사님이 딱 맘에 듭니다”라면서 다시 악수하자고 손을 내민다. 이거야! 바로 이거! 자유인! 앞으로 쓸 배터리 10년분이 충만 되었다.


▲ 물을 공급하면서 구멍을 뚫고 고추모종을 넣고 흙으로 덮는다. 정신없이 돌리고 돌리고.


▲ 말뚝 박기. ‘고춧대 세우기’라고도 하는데 이게 중노동이다. ‘고추심기’ ‘말뚝 박기’ ‘고춧대 세우기’ ‘고추끈 묶기’…어쩐지 어감이 이상하다.


▲ B급 일꾼, 자유인…나의 모습 되시겠다.



부인들이 고추끈을 묶어서 화룡정점을 찍으니 오후 2시반. 파릇한 소녀처럼 예쁘고 군대열병처럼 늠름한 고추밭이 눈앞에 있다.

자리를 다시 옮겨 고이장님 고추밭으로 이동, 엊그제 이미 심어논 고추밭에 쇠말뚝박기를 한다. 밭이 비탈진데다 완전 돌밭이다. 그야말로 악전고투. 2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고춧대 박는 철구조물 비슷한 쇠뭉탱이를 높이 들었다가 팔의 근육과 허리힘과 이른바 똥꼬힘이라는 괄약근을 사용하여 아래로 힘껏 내리쳐야 한다. 그런데 팅팅 거부감과 반동이 팔에 전율하듯 전해온다. 역시 500개가 되는 말뚝을 다 박고 나니 부인들은 이미 기권을 하고 집으로들 가셨다.

“오늘만 날인가, 평생 농사를 짓는데 허리 아파 골병들면 우짤겨….”

마지막으로 고이장님 댁으로 가서 이장님이 피처럼 아낀다는 ‘정력주’를 내왔다. 그 정력을 어디다가 쓸는지 모르지만. 새삼 넝쿨을 오랫동안 술에 우려낸 것이다. 돼지머리 눌린 수육과 산에서 방금 뜯은 산나물 안주. 그야말로 오늘의 고된 농사노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화룡정점을 찍었다.

집에서 따뜻한 물로 사워를 하면서 “내가 자유인이라고…?” 자꾸 되뇌면서 한바탕 미친 듯 웃는다. 
 




▲ 바람과 태양을 골고루 받기위해 과감히 전지한다. 잘라낸 가지들을 한곳에 가지런히 정리해야 한다.

<이야기 둘> 풍류농부? 
 
박병문 회장의 밤나무 농장에서 가지치기를 한 나무들을 한곳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산비탈의 경사가 엄청 가파르다. B급 농사꾼인 내가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요령도 없이 부지런히 일하다 보니 어느덧 시작한 지점에서 800미터 정도 진척됐다.

허리를 펴고 일을 시작한 지점을 바라보니 까마득하다. 그냥 산보하듯 걸어서 그곳을 가라고 해도 숨을 헐떡거리고 갈만한 거리다.


▲ 팥배나무. 요즘 산에 가면 쉬 볼 수도 있고 정원수로도 환영을 받고 있다. 아주 흡사한 나무로는 ‘산가막살나무’가 있는데 가막살은 꽃자루에 꽃이 두툼하게 많이 달린 것으로 쉽게 구분한다.


▲ 이것이 개두릅이라는 엄나무다. 사실 엄나무는 잎이 활짝 피어도 먹을 수 있으니 요즘은 두릅보다 환영받는다.



밤농사에 들어와 보니 쉬운 농사가 하나도 없고 더구나 돈 되는 농사는 그냥 놔두지 않는다. 밤이라면 과거 공주가 명산지였고 지금은 부여와 서천, 보령으로 서진했다.

박병문 회장은 부친의 밤농사를 이어받아 20년을 넘게 짓고 있다. 중국 밤이 몰려오고 날씨마저 따라주지 않아 수년째 경영이 어렵다 한다. 그래서 밤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도 많단다.

그래도 농부의 넉넉한 마음으로 일하다보면 땀을 식혀주는 소슬한 바람과 갖가지 꽃들이 보이고 그것들이 마음의 시름까지 씻어주는 듯하다.


▲ 띠풀 같기도 하고…. 비단결같이 고운 머리카락 같은 풀 


▲ 개펄의 함초를 닮은 풀이 군락을 이뤄 빨간 꽃을 피우고 있다.


▲ 황정은 약효와 모양이 둥글레와 거의 같다. 새롭게 심는 약초인데 둥글레는 둥그런 활모양으로 휘지만, 황정은 꼿꼿하다.


농부에게는 돈으로 가늠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 농(農)이라는 한자가 말해주듯, ‘새벽(辰)의 노래(曲)’가 농부의 마음에 있으니 진정 농부라면 다 풍류농부가 되어야 하리라!

고사리는 이미 세어졌고 숲은 여름을 부르고 있다. ‘팥 알갱이 배’라는 팥배나무의 화사한 개화, 여기저기 흩어져 나는 황정(黃精 둥글레 일종), 개펄에서 나는 함초를 닮은 작은 풀은 빨간 꽃을 일제히 피우고 땅바닥에서도 바람을 받아 춤을 추고 있다. 

새마갈노=송인규 기자 <송인규 님은 목사로 귀농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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