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블루베리 농사짓는 김천회 씨





보이지 않는 가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을 만나면 즐겁다. 그는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멀리 있는 어떤 것을 본다. 그것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철학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농사에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무식하게 물었다. 농사에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질문에 답하는 그의 표정은 때로 진지하고, 때로는 엄격하고, 가끔은 냉소적이기도 했다. 이야기는 길었다. 세상사 바쁠 게 뭐 있느냐는 투로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제가 좀 바빠서,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 김천회 씨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일어서야만 하는 내가 많이 작아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돌아가는 나를 배웅한다고 밖으로 나온 뒤에도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외로워서일까? 아니었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세상의 모든 농사꾼들을 향해 고함이라도 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왜? 농사를 한낱 밥벌이의 수단으로,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고 덤비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밉다는 말을 그는 차마 대놓고 하지는 못하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

“농사는 함부로 덤비는 게 아니더라고요.” 

지상 최고의 직업을 나열하기로 하자면 아무래도 농사를 첫손에 꼽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쯤 되는 것 같다. 농사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고, 따라서 철학이 있어야 한다. 철학은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거다. 들으면서, 혹은 듣고 난 뒤에 자신과 이 세계 사이에 놓인 강의 깊이를 헤아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거다. 그것이 삶이다. 감동해서, 감격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을 수 있다면 가히 성공한 삶이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식물의 원하는 바를 그때그때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식물의 언어를, 그 욕망을 사람이 아직은 해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독할 수 없는 식물의 언어를 알아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심과 관찰이 있어야 한다.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살피다 보면 식물이 원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태양과 식물의 각도가 어떠했을 때 물을 주느냐에 따라 과실의 당도와 크기가 달라진단다. 덮어놓고 만지작거리며 물주고 거름 주고 한다 해서 식물이 만족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놀라웠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내가 굳이 놀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주체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삼 년밖에 안 된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내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였다.

어느 해의 겨울 한철 서울특별시 노량진동에서 살아본 것을 제외하고는 대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람, 바야흐로 사십대 중반에 들어서 있는 김천회씨.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주소를 두고 있는 그의 본래 직업은 농사꾼이 아니었다. 지역 종합병원의 관리과장과 총무과장을 거쳐 사회복지관에서 일을 하다가 일 년 전에 그것조차도 그만두었다. 전업 농사꾼으로 나선 요즘도 가끔 중소규모의 종합병원에서 사무장직을 제안해 오지만 들은 체도 안 한다.


# 꽃과 벌


사람이면 사람마다 안정적인 직장을 소망하는 현대라는 이름의 세상에서, 심지어는 자본가에게 잘 보일 목적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까지도 뜯어고치기를 마다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믿고 저런 배짱을 부리는 것일까. 사람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나아간다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성찰의 결과인가? 전업농으로 나선 배경을 듣다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직장생활 하면서 늘 고민을 했어요. 이건 아니지 않느냐 하고.”

이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옷은 내가 입을 만한 옷이 아니다. 그런데 그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고민을 했고, 고민 끝에 농사를 선택했고, 거기서 다시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를 놓고 새로운 고민에 빠졌고, 새로운 고민 끝에 블루베리를 선택했다는 이야기였다.


# 블루베리농장


블루베리로 결정을 내린 뒤에는 블루베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다. 공부가 어지간히 됐다 싶을 즈음 묘목을 구입해서 심었고, 묘목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눈 먼 사랑은 아니었다. 투기와 질투와 시기심으로 눈이 멀어 광분하고 괴로워할 일이 전혀 없는 사랑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그놈의 직장생활을 때려치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농사인가. 자영업도 있고 사진에 대한 감각이 있으니 그쪽으로 진출할 수도 있고 기타 등등 사람이 할 만한 일은 세상에 널리고 널려 있지 않은가. 그 많은 일 중에서 농사는 그 과정과 이유야 어떻든 현실 세상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단호하고 명쾌했다. 

“농사 외의 다른 일들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상대해야 하잖아요. 사람이란 개인과 개인일 경우에는 우정도 발생하고 신뢰도 생기지만 업무와 연관되기 시작하면 더러 속임수도 쓰고, 사람이 차마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경우도 있고, 뭐 그렇지 않나요.”


# 비닐하우스 안의 블루베리


종합병원 총무과장 시절에 그런 일들을 많이 겪었단다. 특히 제약회사 관계자들과의 만남은 지금도 ‘지옥에서의 한철’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본말이 완벽하게 전도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사람의 생명을 살리자고 약을 만들어 팔아먹는 사람들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일들은 내가 아무리 그 일 자체를 사랑한다 해도 상사나 부하직원 혹은 거래처에서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농사, 아니 식물과의 만남은 내가 식물을 속이지 않는 한 식물이 나를 배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병으로 죽는다면 내가 식물의 원하는 바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결과이니 결국은 내가 식물을 속인 셈이 된다. 태풍이나 홍수로 인한 피해의 경우는 천재지변인 것이니 내가 끼어들 틈이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다 해도, 식물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본말을 전도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농사란 생물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고, 생물은 어떤 종류라도 진정한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에서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저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돈이 얼마다, 하는 것은 이미 진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싹을 내서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 하나하나를 경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쓰다듬고 만져주고 물을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러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불루베리효소


결과를 미리 상정하지 않고 과정에 충실하다 보면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농사꾼 생활 3년 밖에 안 되었지만, 김천회씨의 작은 농장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제법 많다. 수십 년간 농사를 지어온 사람도 있고, 이제 막 농사를 시작하려 하는 귀농인도 뭔가를 배우고자 김천회씨의 작은 농장을 찾는다. 돈을 먼저 생각하면 돈이 안 되고, 돈 생각 안 하고 다만 그 일이 좋아서 열심을 바치다 보면 돈이 되기도 하는 아주 기막힌 역설의 현장이 농사라는 것을 김천회씨는 자신의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농사에 사랑을 바치기 위해서는 규모가 작아야 한단다. 크면 좋을 것 같지만 크다는 것 외에 달리 봐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다. 규모가 커지면 사랑도 부실해지기 마련이다. 사람간의 사랑에서 양다리를 걸친다든가 삼각관계 등등으로 관계가 복잡해지면 부실한 사랑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듯이, 농사도 가능한 한 규모를 줄이고 역량을 집중하는 게 좋단다.

그래서 그는 강소농을 주창한다. 강소농(强小農), 규모는 보잘 것 없어도 열매는 풍성한 농사 즉 내실이 꽉 찬 농사라는 뜻이란다.


# 마당에 내놓은 묘목을 보고 있는 김천회 씨


“농사의 핵심은 사람이 먹는 것을 길러낸다는 것이란 말이거든요. 규모를 작게 하면 내가 짓는 농사의 산물을 먹는 사람들의 기분까지도 생각해 가면서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농약 같은 것을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미국식의 대규모 농사는 농약이 없이는 안 되게 돼 있단 말이거든요.”

강소농을 역설하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대농위주의 농업정책은 그 발상부터가 불온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전부리 과자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부분이 대기업에 장악돼 있는 마당에 농사까지 자본가들에게 내준다?

자본가들이 농업을 장악하면 그동안 재래식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자본가들의 농장에서 머슴을 살면 되지 않으냐 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가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본가들의 농법은 분명히 현대식일 것이고, 현대식 농법에는 당연히 품종개량이란 이름의 유전자변형도 포함될 것이다.


# 삽목으로 묘목도 키워낸다.


만약에 정부가 대농위주의 농업정책을 포기하고 강소농 육성 정책을 펼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가설에 대한 답을 함부로 낼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도시와 농촌이 농산물을 매개로 서로의 안녕을 걱정하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김천회씨의 블루베리는 거의 백 퍼센트 직접거래로 소비된다. 인터넷 시대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천회씨뿐만 아니라 요즘은 농산물의 상당수가 인터넷 주문을 통한 직거래 형태를 띠고 있다. 물건과 물건 대금만 오가는 게 아니다. 소비자가 생산현장을 찾아와서 하룻밤 정도 묵어가며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체험학습을 할 수도 있다. 대농위주의 농업정책에는 사람의 삶이 빠져 있는 까닭에 이러한 상생이 불가능하다.

사람이 살자고 하는 일에 사람의 삶이 빠져 있다는 이 지독하게도 모순된 현실을 김천회씨는 주시하고 있었다.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해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시류가 그렇다 해도 아닌 것 속으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각오와 배짱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살려고 태어났으니까. 자본의 노예나 되자고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보자면 농사란 정말이지 지상최고의 직업이라 할 만해 보였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