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기획 : ‘귀농 열풍’ 그 현장을 찾아서-10> ‘2대째 귀농’ 함용재 씨

귀농바람이 한창이다. 귀농 붐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비롯됐다. 1970~198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차출’돼 탈농을 이끌었던 이들 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회귀해 ‘인생 2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낀 30~40대까지 귀농에 가세, 농촌에서 제 2의 인생을 꿈꾸는 귀농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귀농인들은 주로 소일거리를 통한 활력 회복, 전원생활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건강 추구 등을 이유로 농촌행을 결심하고 있다. 물론 생계수단으로 귀농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위클리서울>은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들어간 이들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 이후의 생활 등을 들어봄으로써 귀농의 현실을 짚어보고 있다. 이번호에는 아버지에 이어 2대째 귀농생활을 하고 있는 함용재(32)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사진 왼쪽이 함용재 씨

이제는 원주민?

함용재 씨는 1994년 초등학생 시절 서울에서 경주로 내려왔다. 당시 함 씨의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 가족 모두가 함께 내려온 것이다. 함 씨의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농촌생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4년간은 경주 시내에 머물며 귀농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1998년 경주 서면 도리에서 본격적인 귀농생활을 시작했다. 주 작목은 벼와 고추였다. 감자 등 각종 야채를 재배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있는 함 씨도 거의 비슷한 작물들을 재배하고 있다.
“몇몇 야채는 조금씩만 재배해요. 집에서 식구들이 먹거나 동네 주민들과 나눠 먹을 정도죠.”

2대째 농사일을 이어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는 주민들로부터 귀농인이 아니라 원주민으로 인정받아야 할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을 주민이나 다름없다고 여길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살고 있어요. 여기가 사실 ‘한 씨 집성촌’이거든요. 처음에 주민들이 우리 가족을 ‘한씨네’로 알고 잘해줬었어요(웃음). 마을 어르신들의 ‘긍정적인 오해’로 인해 첫출발은 좋았죠. ‘함씨네’로 알게 된 이후에도 잘 지냅니다. 주민들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황이지만 경제적인 부분은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농민들 대부분이 풍족하게 살 수 없는 형편이잖아요. 다만 삶에 대한 철학이나 관점이 농사짓는 것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견디고 사는 겁니다.”



자급자족엔 무리가 없지만 ‘작물의 상품화, 현금화’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이제 먹고 사는 건 문제가 없어요. 다만 작물을 상품으로 만들어 현금화 하는 부분에 있어선 아직 미진해요.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어요. 농사 규모가 큰 건 벼와 고추인데, 이것만으로는 수익을 내기가 힘들거든요. 부업으로 닭을 키워서 팔고 계란도 팔아요.”   

아버지와 늘 함께 농사를 지어온 함 씨. 지난해 연로하신 아버지가 농사에서 손을 떼면서 이제는 혼자서 도맡아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제 함 씨의 농사일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아버지는 이제 귀촌인이 되신 거죠. 그동안 고생하셨거든요. 제가 아버지 곁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많으니 지난해부터 모든 일을 저한테 일임하셨어요. 요즘은 늘 지켜만 보시지 지시하거나 가르쳐주는 건 거의 없어요. 실패할 게 뻔한 일인데도 그저 지켜만 보시는 거죠.”

지난해는 함 씨에게 있어 숱한 실패의 경험을 쌓는 한 해였다.



“아버지를 돕는 것이랑 제가 직접 하는 것이랑 천지차이더라고요. 막상 해보니까 생각대로 안 되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그저 때맞춰 심고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이론상으로만 알고 있으니 실패를 많이 한 거죠. 몇몇 작물은 단 한 번의 실수로 한 해 농사 완전히 망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죠.”

그중 우렁이농사는 함 씨에게 가장 큰 아픔을 가져다준 경험이었다. 하지만 함 씨는 혹독했던 아픔만큼 성숙해질 수 있었다.

“제때 우렁이를 풀어야하는데, 때를 놓쳐서 다 죽인 거였어요. 힘든 시간이었죠. 기계적으로 고민하고 매뉴얼대로 일을 진행하다보면 실제로 생명을 죽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경험을 통해 생명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죠. 한편으로는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시발점이 된 사건이었죠.”


친구들 다들 부러워해

아버지가 귀농인이라고 해서 무작정 아버지의 농사일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한 때 귀농하지 않고 도시에서 살 생각도 했었다. 유년시절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고, 당연히 성인이 되면 도시생활을 할 줄로만 알았다.

“가족이 시골로 이사했다지만 애초 그건 제 의지가 아니었죠. 그런데 한 권의 책이 제 인생을 바꾼 것 같아요. 90년대일 겁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이 유행한 적 있었잖아요. 유 교수의 책엔 경주 지역 답사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요. 그걸 보고 시골 답사를 많이 다녔죠. 대학 생활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재미가 없었어요. 제가 꿈꿔온 생활이 아니었거든요. 졸업한 이후 광개토대왕비를 보기 위해 배낭여행도 갔죠. 그러면서 아버지의 농사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농업을 살려야한다’는 식의 거창한 계획은 없었지만, 농촌의 문화와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거죠.”

비록 벌이가 시원치 않아도, 서울 등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이제 함 씨를 부러워하는 신세다.

“돈이야 친구들이 많이 벌죠. 하지만 다들 부러워해요. 아직 어린 나이들인데도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다들 그럽니다. 어서 돈 모아서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고.”



함 씨는 그런 친구들에게 굳이 돈을 많이 모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이미 농촌에는 관련 모임들이 많고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보다 수월하게 귀농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해서 해당사항이 아닙니다만, 젊은 부부들 중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분들이 많아요. 이른바 ‘조기유학’이라고 할 수 있죠.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조기유학을 보내는데, 이곳에 오는 부부들은 그 반대입니다. 농촌유학을 보내는 거죠. 아이들 교육은 시골에 맡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정규수업을 마치고, ‘방과후수업’을 인근 논이나 텃밭이나 하는 거죠. 오히려 아이들이 ‘여기서 영원히 살자’고 보채기도 해요. 그래서 2007년부터는 기숙사처럼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생겼어요. 방학 때는 캠프가 차려지기도 하죠. ‘산촌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현재 이곳에선 6명의 아이들이 대안교육과 공교육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귀농해 이곳에 사는 학부모들도 책을 읽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는 게 함 씨의 얘기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귀농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소수자 입장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선 지역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내면도 가꿔야 하거든요. 그래서 인문학이나 철학에 관심을 많이 가져요. 보통사람과 대충 섞여 사는 게 아니라 특별하게 엉켜있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점이 남달라야 하지 않겠어요.”



얼마 전 한 방송매체에서는 농촌으로 내려가 사기를 당한 귀농인들의 삶을 집중조명하기도 했다. 많은 귀농인들이 시골에 집과 토지를 샀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함 씨는 ‘왜곡보도일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역 분위기에서 따라서 상황이 달라요. 물론 사기를 치는 지역 주민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도시인들을 경계할 뿐이지, 일부러 사기를 치려고 들지는 않아요. 한쪽만 봐서 왜곡된 부분이 있죠. 빈집이 있어도 소개를 잘 안 시켜주는 배타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사기를 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함 씨는 예비 귀농인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도시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시선이 기본적으로 있어요. 좀 잘 살고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내려왔다는 느낌을 주면 배타적으로 봐요. 그러니 충효제 등 마을 행사 등에 늘 참석하고, 어르신들과 가깝게 지내야 합니다. 귀농인들이 많이 모이는 동네의 경우 귀농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따로 만드는데 그건 오히려 괴리감만 줍니다.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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