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한창세의 고대와 현대의 만남 ‘멕시코’ (1)> 영화 ‘007’작전 같았던 입국과정


‘멕시코’ 하면 먼저 선인장이 떠오른다. 멕시코는 여러 면에서 일찍부터 나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체육선생이 전교생에게 포크 댄스(Folk Dance)를 가르친다고 점심시간 전, 운동장에 집결시켜 멕시코 전통음악인 ‘베사메무쵸(besame mucho)’ 음악에 맞춰 남녀 쌍쌍이 춤을 췄던 기억이 난다. 이 음악은 ‘레이 카닙싱어즈(ray caniff singers)’가 편곡했는데 당시 세계적으로 대히트한 경음악이다. 어린나이에 들었지만 학교에서 매일 듣다보니 멕시코 특유의 애잔하면서도 멋진 멜로디가 와 닿았다. 중학교 때는 그림에 관심이 많아 당시 서양화가인 미술 선생님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분이 갑자기 멕시코로 이민을 가버려 무척 아쉬웠다. 크면 멕시코로 찾아가서 미술선생님을 만나겠다고 결심했을 정도였다.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멕시코’는 알게 모르게 직간접으로 내 곁에 늘 있어 왔다. 그리고 멕시코는 결혼이라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인연으로 내게 다가왔다. 결혼과 함께 멕시코로 건너가 생활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펼쳐보려 한다.[편집자 주]



‘구통도가’의 신통하고 정확한 ‘운’

멕시코는 또 결혼이라는 인연으로 다가왔다. 1991년 3월 모 신문사 취재부 차장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전국 주요 대학교를 주축으로 파고들어 주역과 전통기예를 가르치는 `구통도가(九通道家)`가 젊은이들 사이에 붐이었다. 흥미가 있어 이 단체의 여자 간사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그녀가 내게 사주를 봐주겠다며 생년월일을 알려 달라고 하기에 알려 줬다.

그녀는 잠시 후 내게 “올 추석 무렵 외국에 나갈 운이 있네요”라고 했다. 외국에 나갈 일도 없고 친척도 없는데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두고 보면 안다며 추석쯤 외국에 갈 일이 꼭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려니 하고 잊고 있었는데 그해 추석을 하루 앞둔 밤 9시경 늦은 시간 마실을 다녀온 어머니가 대뜸 "너, 저 너머에 사는 오순네집 알지?" 하신다. 안다고 했더니, "그 집 이모가 멕시코에 산지 15년째인데 딸이 나이가 차도록 시집을 못 가서 알아보다가 너에게 중신을 하겠다는데 어떠냐?"고 물으셨다. 생각해보고 며칠 후 답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구통도가의 여 간사가 말한 것이 생각이 났다.



# 멕시코시티 중심인 소칼로 광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다.


# 수도인 멕시코시티에는 2천만명이 사는 메가시티이며 계획도시다.

‘나염사업’ 꿈 펼치려 멕시코로

"추석 때쯤 외국에 갈 일이 생긴다더니 신기하게 맞네!"라며 평소 점을 믿지 않았지만 그 정확성에 놀란 적이 있다. 결혼여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결국 멕시코에서 온 여인과 만나 1991년 결혼을 하고, 부평에 살다 이듬해인 1992년 4월 나염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아내와 멕시코에 가기로 했다. 멕시코는 사계절 내내 가을 같은 날이어서 늘 티에 청바지 등 간편한 옷을 주로 입는다.

나염사업이 시장전망이 크다고 판단한 것은 나염디자인 기술이 내게 있었고, 멕시코에서 처갓집이 나염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큰 규모의 4층 건물인 이곳의 3층을 내가 인수해서 멕시칸 직원 4명을 고용해서 금요일까지 나염 티 1000장을 찍어 아내의 올케에게 납품만 하면 즉시 수금이 되는 사업이기에 결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1992년 비자만료일 관계로 멕시코로 먼저 들어간 아내를 보내고, 나는 멕시코 비자를 받은 뒤 뒤따라가기로 하고 준비기간을 3개월 잡았다.

당시 미국과 멕시코 비자를 취득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 두 나라는 서로 국경이 접해 있어서 이민관계와 입국문제에 매우 예민했다. 그래도 한국인에게 미국은 천국이었다. 가기만 하면 뭘 하든 돈을 벌수 있기 때문에 고액의 비용을 들여 브로커를 통해 비자를 받던 시절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경우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아예 발급을 거부했던 때였다. 

 

# 마야후예 제사장이 주술용 풀잎을 태워 연기를 통한 정화의식을 하고는 모습


# 고대 마야문명의 후예들이 전통주술복장을 하고 제사의식 춤을 추고 있다.

LA흑인 폭동사건이 불러온 ‘행운’

그래도 비자를 받기위해 장충동에 있는 멕시코 영사관에 월요일 서류를 접수하자 한국인 여직원이 목요일에 영사와 면접시간을 잡아주었다. 면접날 멕시코 여자 영사관이 “멕시코에는 왜 가는가?” 묻기에 “단순 관광차 간다”고 하자, 벌써 미심쩍어 하는 눈빛이었다. “며칠간 가느냐?” “1주일이다” “어느 호텔에 예약 했나?” 등등 꼬치꼬치 묻는데 답이 궁색해지자 결국 비자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멕시코 교포와 결혼해서 입국을 하려한다고 터놓고 말했으면 비자를 받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도 운명인 것을…. 비자를 거부당하면 여권 맨 뒷장에 멕시코 영사가 찍어주는 거부사인 겸 비밀사인이 찍힌다. 이는 미국을 통하던 어떤 나라를 경유하던 멕시코 입국 시 이 비표가 있으면 절대로 입국이 안 된다. 바로 내 여권에 이것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멕시코에 못 가게 된 것이다.

고민이었다. 이러다 생이별 하는 게 아닌가. 별의 별 방안을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내가 비행기 티케팅을 단골로 해오던 명동의 한 여행사 직원을 만났다. 그간의 일을 말했더니 방법을 알려주었다. 우선 여권 뒤에 찍힌 거부 사인의 파란색 직인을 감쪽같이 지우는 작업이었다. 그 직원이 여의도에 잘 아는 여행사 형님이 있는데 이 분야 삭제전문가라면서 5000원만 주면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 후 그 형님을 만나서 여권을 주었더니 정말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한국사람 머리 좋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여권으로 다시 미국비자 신청에 들어가기로 했다.


# Besame Mucho는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라틴음악이다.


# 멕시코 북동쪽에 위치한 3천년전에 세워진 테오티와칸 피라밋 도시의 모습

멕시코 ‘거부’, 미국 3일 만에 ‘OK’

하지만 미국비자 받기는 아예 하늘의 별 따기이던 시절이었다. 비자는 그야말로 선택받은 소수만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 포기를 한 상태였다. 그런데 하늘이 도우려는 것일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92년 4월 초였던가. 때마침 미국 ‘LA 흑인 폭동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돈은 흑인사회에서 벌고 백인사회에 가서 써대는 이중적인 한국인에게 불만이 많았던 흑인들이 상가를 불태우며 상품을 약탈해간 사건이었다.

이민국가인 미국도 당황했다. 특히 한국인이 많이 사는 LA에 친척방문차 간다고 하면 비자를 무조건 발급해 주었다. 이때다 싶어 월요일에 광화문 미국대사관에 서류를 접수시켰는데 수요일 비자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이런 일이…. 나는 운이 너무나 좋게도 5년짜리 미국행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멕시코로 가는 일 뿐이다. 아내에게 미국비자를 받았다고 전화를 했다. 내가 곧 주변을 정리하고 일단 LA공항까지 갈 테니 아내의 친오빠, 그러니까 처남과 만나서 육로를 거쳐 멕시코로 입국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오빠와는 나와 중학교 동창이었지만 같은 반에 있지 않아서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멕시코에는 15년간 아내와 장인, 장모, 올케, 처제인 동서집안이 살고 있었다. 남미 생활에 익숙한 처남은 멕시코 말을 잘했기에 나와 함께 멕시코 입국 시에 대동하기로 했다.



#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큰 바실리카 성당


# 멕시코에는 고대 마야와 아즈테카문명이 현대와 공존한다.

LA공항에서의 해후 그리고 곤드레∼

멕시코 입국 방법은 먼저 ‘김포공항-LA공항-샌디에이고-티후아나 국경-멕시코시티 입국’ 순으로 결정됐다. 마치 007작전을 펼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드디어 김포공항에서 LA행 비행기에 오후 6시 탑승했다. 이륙 후 하늘에서 한국 땅이 내려다보였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언제 다시 올 것인가. 마음이 착잡했다. 곧 일본을 지나 망망한 태평양 상공을 지나는데 검은색 바다만 보일뿐 지루한 여정이었다. 여승무원에게 양주한잔 시켜 마시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13시간을 날아갔다.

말로만 듣던 LA공항에 내리니 하루 늦은 오후 2시였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환영객들 틈에서 처음 보는 처남을 만나 인사를 하고 바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해밀턴호텔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여장을 풀고 근처에서 처남과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2차, 3차까지 하다 보니 술기분에 라스베이거스까지 가자는 것 아닌가. 심야시간인데 말이다. 다음날 멕시코로 출발해야하는데 라스베이거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포기하고 호텔에 피곤한 몸을 뉘인 뒤 LA에서 아침을 맞았다. LA의 날씨는 아침에 약간 쌀쌀하다가 오전 9시 이후엔 점점 기온이 올라 따뜻한 기후여서 살기에 쾌적하다.

<한창세 님은 언론인입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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