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기획 : ‘귀농 열풍’ 그 현장을 찾아서-12> 전북 순창귀농인협회 회장 김필환 씨

도시민들이 농촌으로 가고 있다. 바야흐로 귀농 붐이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귀농 붐은 시작됐다. 1970~198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차출돼’ 탈농을 이끌었던 세대 중 많은 이들이 농촌으로 회귀해 ‘인생 2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낀 30~40대까지 이런 열풍에 가세, 농촌에서 제2의 인생을 꿈꾸는 귀농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은 주로 소일거리를 통한 활력 회복, 전원생활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건강 추구 등을 이유로 농촌행을 결심하고 있다. 물론 생계수단으로 귀농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위클리서울>은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들어간 이들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 이후의 생활 등을 들어봄으로써 귀농의 현실을 짚어보고 있다. 이번호에는 2011년 전북 순창으로 귀농해 지금은 지역 귀농인협회 회장까지 맡고 있는 김필환(60) 씨의 스토리를 풀어본다.



여전히 어려운 농지 구입

김필환 씨는 2011년 가을 순창군 복흥면으로 귀농했다. 정착 초기부터 지금까지 고추와 두릅을 주로 심고 있다. 이제 두 번째 정식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군의 신세. 앞으로 넘어야 할 장애가 많을 수밖에 없다. 정식으로 첫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난해엔 찌는 더위와 크고 작은 태풍으로 특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지난해 느낀 게 많아요. 다른 농군들에게는 최악이었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저는 귀농하자마자여서 그런 어려움을 겪은 거죠. 마치 1년짜리 단기 속성반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어요. 한 해 동안 고생 제대로 했죠. 큰 태풍이 3~4개가 왔고, 가뭄도 길었어요. 농사에는 엄밀하게 때가 있는데 잘 몰랐고, 그렇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하늘까지 도와주지 않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그저 이웃들 농사짓는 거 곁눈질 하면서 따라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기후도 기후지만 가장 어려운 건 농법, 즉 농사짓는 법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애초 관행농법을 지양하고, 친환경농법을 추구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많이 쓰더라고요. 이왕 시작한 거 제초제 등을 배제하고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다행히 올해 두릅은 친환경 인증을 받아서 자가 배양 액체비료를 주며 키우고 있습니다. 내년부턴 고추도 친환경 인증 받아보려고 올 농사부터 무농약으로 시작했어요. 시작은 했지만 성공여부는 두고 봐야죠.”

햇수로 3년차지만 농지구입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집을 빼고 김 씨 명의로 된 땅은 아직 없다. 주민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아직까지 땅을 소개받진 못했다.

“이웃들과는 귀농 초기부터 친하게 지냈어요. 잡음이 없었어요. 처음 와서 집을 지을 때도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20~30가구 정도 되는 마을인데 다들 연세가 많아요. 70~80대죠. 다들 빠듯하게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죠. 아마 이 분들 중 몇몇이 은퇴하시면 저한테도 돌아오는 땅이 좀 있지 않을까요.”

캠핑카 대여업하며 텃밭 경험

김 씨는 귀농하기 전까지 경기도 판교에서 캠핑카 대여업을 했다. 그러다 그저 자연이 좋아서 연고도 없는 이곳 순창으로 귀농하게 되었다. 

“귀농하기 전까지 경기도 용인에서 살았어요. 그곳도 공기가 좋은 편이죠. 주변에 여유 땅이 있어서 텃밭도 가꿔봤는데 농사짓는 재미가 솔솔 나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여행을 좋아하고 또 산을 좋아해서 언젠가는 귀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일부 다른 이들처럼 건강이 나빠져서 귀농하게 된 것도 아니에요. 순창은 우연히 들렀다가 그냥 말뚝 박게 된 겁니다. 이쪽이 산세가 좋아요. 인근에 내장산이 있어서 공기도 좋고 물도 좋지요.”

귀농 결심 후엔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부닥쳐야 했다. 특히 두 딸은 ‘문화적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내세우며 강력히 반대했다. 



“다행히 하나는 결혼해서 경북 안동으로 갔어요. 시댁이 농사를 짓는데 결국 귀농한 거나 마찬가지가 됐죠(웃음). 막내는 처음엔 시큰둥했지만 지금은 잘 지냅니다. 막상 와보니 좋거든요. 친구들이야 날 잡아서 만나면 되잖아요.” 

때론 도시생활이 그립기도 하지만 탁한 공기를 떠올리면 금세 고개가 저어진다. 지난해엔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김 씨네로 휴가를 와 뜻있는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가끔 일 있을 때면 서울이나 광주에 나가기도 합니다. 요즘은 교통편이 좋아서 이동하는데도 그리 불편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특별한 일 없으면 농사일에 모든 힘을 쏟지요. 지난해 여름엔 친구들이 놀러와 난리도 아니었어요. 직접 키운 토종닭도 잡아먹고, 산과 강, 들에서 모처럼 실컷 즐기고들 돌아갔죠. 이 친구들이 집에 안 가려고 해서 아주 혼났습니다. 내일 간다던 사람들이 내일이 되면 또 그 다음 날 가겠다고 자꾸 미루니…. 우리 마누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나중에 빨리 가라며 쫓아내야 할 정도였어요(웃음).”


젊은 패기 절실

김 씨는 현재 순창지역 귀농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변 귀농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지난해 12월 임기를 시작했다.

“덕을 많이 쌓아놓아 회장이 된 것 같아요(웃음). 귀농인협회 회장을 맡다보니까 신경 쓸 일들이 많습니다. 월 1회씩 지역 귀농인들과 만나 저녁식사도 하고 정보도 교환해요. 때론 작목 기술 잘 아는 분들을 불러서 강의도 듣죠.”

김 씨는 귀농인협회와 같은 단체가 초보귀농인들에게 큰 힘이 된다고 했다. 김 씨도 귀농 초기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귀농인협회의 존재 때문이었다. 

“초기에 사실 많이 외로웠어요. 농사법도 모르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으니 말이죠. 주민들에게 섭섭한 부분이 있었다는 건 아닙니다. 처음부터 허물없이 다가설 순 없잖아요. 소외되는 부분이 있죠. 그런 측면을 보완하는데 있어 귀농인협회가 많은 도움이 됐어요. 지역마다 이런 단체들이 있을 겁니다.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떠나 초기엔 어쩔 수 없이 거쳐 가야 할 통로인 것 같아요. 지자체도 도움을 많이 주더라고요. 지자체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조금만 시간을 내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농업 기술을 배울 수 있어요.”



협회엔 젊은 귀농인도 많다. 패기로 똘똘 뭉친 인생 후배들 덕에 협회 선배들이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영농후계자 덕목을 고루 갖춘 패기 있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요. 젊은 덕분에 나름 실험적이면서도 특별한 비법들을 시도해볼 수 있고, 특별한 작물도 재배해보고 그러죠. 다 같은 초보 귀농인이지만, 젊은 사람들 창의력 앞에선 선배들이 못 당해요. 오히려 배우는 게 많죠. 게다가 다들 성격이 시원시원하니 좋습니다. 잡일, 궂은일도 알아서들 도맡아서 해요. 보기 좋습니다.” 

아직 농사엔 서툴지만 김 씨는 이처럼 농촌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한편으론 시골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농촌에서 살았어요. 도시생활을 오래하다가 수십년이 흘러 다시 내려와 봤더니 농촌도 굉장히 많이 변한 걸 알게 됐어요.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농촌까지도 깊이 확단돼있어요. 옛날 농촌의 그 인심을 기대해선 안 돼요. 거의 모든 것들이 돈과 연결되더라고요. 물론 그럼에도 아직까지 도시보단 인심이 낫지만…. 하긴 다 자기 탓입니다. 미운 정, 고운 정, 모두 자기 탓이죠.”

최근의 ‘귀농 열풍’에 대해선 올바른 현상이라면서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인데, 정말 귀농하고 싶다면 미리 공부를 좀 했으면 합니다. 농촌현실에 대해 잘 알아야 하죠. 토지 문제 등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디테일하게 1년이고 2년이고 준비한 뒤 내려오면 시행착오가 줄어들 것 같아요. 저만 봐도 그래요(웃음). 저는 준비를 거의 못하고 갑자기 내려왔잖아요. 때문에 아직까지 농지도 구입하지 못했어요. 그저 마을 어르신들이 농사일에서 손 놓을 날만 기다리고 있죠.”

김 씨에 따르면 귀농인들의 3분의 2정도는 관행농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잇따른 FTA 체결로 인해 피해를 입는 농업을 살릴 방법 중 한 가지는 친환경농법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기존 70대 이상의 원주민들은 친환경농법에 관심이 없어요. 사실 저도 지금까지 농약 안치고 일해 보니까 리스크에 대한 부담이 있어요. 하지만 극복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행농으로는 향후 미국, 특히 중국과는 경쟁이 안 될 것 같아요.”
김 씨는 향후 친환경농법, 자연농법 등을 통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했다.

“제 나이 60입니다. 남은 인생 친환경농법을 통해서 제대로 된 농군으로 거듭나고 싶어요. 농지도 하루빨리 마련해서 젊은 귀농인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제가 사는 동네에선 막내에요. 비록 외지에서 온 사람이지만 저로 인해 마을에 활력이 넘쳐났으면 합니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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