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기획 : ‘귀농 열풍’ 그 현장을 찾아서-13> 전북 순창 정산리 김민성 씨

귀농바람이 한창이다. 귀농 붐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비롯됐다. 1970~198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차출’돼 탈농을 이끌었던 이들 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회귀해 ‘인생 2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낀 30~40대까지 귀농에 가세, 농촌에서 제 2의 인생을 꿈꾸는 귀농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귀농인들은 주로 소일거리를 통한 활력 회복, 전원생활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건강 추구 등을 이유로 농촌행을 결심하고 있다. 물론 생계수단으로 귀농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위클리서울>은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들어간 이들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 이후의 생활 등을 들어봄으로써 귀농의 현실을 짚어보기로 했다. 이번호에는 전북 순창에서 귀촌생활을 이어가는 김민성(50)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고향으로 귀촌

김민성 씨가 귀촌한 지역은 순창군 복흥면 정산리로 해발 320미터에 달하는 곳이다. 순창 읍내에서 가장 먼 곳으로, 인근엔 내장산과 백양사가 있어 풍경만큼은 어느 명소에 뒤지지 않는다. 귀촌 4년째인 김 씨는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아 귀촌한 케이스다. 귀촌한 곳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이기도 하다.

“가족들이 제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어요. 이후 줄곧 서울에 있었죠. 그러다 몇해전부터 부모님이 도시생활에 지치셨는지 많이 편찮으셨어요. 그래서 함께 내려왔습니다.” 

고향이다 보니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30년 뒤 돌아온 고향은 변해있었고 모르는 주민들이 대다수였다.
“도시 정서도 잘 알지만, 어릴 적 살았기 때문에 시골 정서를 좀 알죠. 4년간 살다보니 금세 시골 사람이 됩디다. 예전에 알던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잘 몰라요. 그런데 주민들이 도시에서와는 달리 이른 새벽 일어나 일을 시작해요. 한참 자고 있는데 아침 일찍부터 문을 두드려요. 그런 부분에서 집사람이 좀 힘들어했죠(웃음). 지금은 적응이 돼서 무난하게 지냅니다.”



김 씨는 50여 가구, 10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이 동네의 사무장을 맡고 있다. 동시에 순창귀농인협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해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다.

“협회에선 회원들과 월 2회 정도 모임을 갖습니다. 코드가 좀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도 하고 정보도 나누고 그래요. 여러 귀농정보, 지원적인 부분에 있어 초기에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군대로 따지면 행정보급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서울에서 한 잡지사를 운영했던 김 씨는 재능을 살려 지역에서 귀농 관련 책을 내기도 했다.

“귀농인협회 이름으로 냈고 비교적 잘된 책이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여러모로 지역에서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귀촌인 신분이지만 원주민 입장에선 귀농?귀촌인끼리 뭉치는 게 보기 안 좋을 수 있다.



“전남 완주 같은 곳에선 귀농인협회 이름을 안 쓰고 뿌리협회라는 이름을 쓰더라고요. 어떻게든 위장하려는 것이겠지만, 그만큼 원주민들 눈치를 본다는 것이겠죠. 그렇게 해서 원주민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해요. 귀농인이라는 이름을 뺐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본다. 하지만 분명히 귀농인들이 만든 단체죠.”

물론 원주민들이 귀촌?귀농인들의 심정을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김 씨 역시 귀촌 초기 홀로서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귀농인 모임 같은 곳은 사실 잠깐 들렀다 가는 곳이죠. 중간다리 역할을 할 뿐입니다. 작목 정보도 얻고 마음도 달래고 할 수 있으니까요. 교육이 실제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요. 원주민들에게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의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모임 차원에서 각 작목들을 연구하고 교육을 해요. 예를 들어 매실 농사 교육이 심층적으로 교육이 이뤄지면 시골생활로의 흡수가 빠르죠. 귀농인협회 같은 모임이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잠시 멘토 역할 하면서 혼자 살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죠. 그걸 너무 아니꼽게 볼 필요는 없잖아요.”


지자체 혜택, 실제론 원주민이 더 돌아가

김 씨는 귀촌?귀농인들에 대한 원주민들의 오해가 있다고 일정 부분 있다고 했다. 원주민들 입장에선 귀촌?귀농인들이 지자체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는다고 여긴다는 것. 이에 김 씨는 겉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론 원주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많다고 했다.

“귀농인들에게 지원비, 이사비 등이 나와요. 집수리비는 최대 500만원까지 지원돼요. 소득사업은 최대 1000만원까지 되죠. 그런데 그게 대단한 혜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집수리비는 혜택이지만, 서울에서 누가 내려와 정착하려면 동네사람들에게 술도 사야하고 고기도 사야 하잖아요. 그런 건 지원해주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소득사업비는 기존 주민들에게도 적용돼요. 기존 주민들은 보조사업으로 혜택을 챙기죠. 실제 계산해보면 돌아가는 혜택은 원주민들에게 많아요. 귀농인에겐 불리한 입장인데, 홍보가 잘 안 되다보니까 마치 귀농인들만 혜택을 받는 걸로 오해하는 거죠. 금전적으로 사실 따지고 보면 실제 원주민들이 10% 많이 받아요.”

터전을 완전히 바꿔 사는 귀농인들 입장에선 여러모로 고민거리가 많다는 게 김 씨의 얘기다.



“도시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살다가, 여기 오니까 갭이 생기죠. 도시는 서로 몰라도 관계가 없어요. 시골은 어쨌든 개방적입니다. 도시가 폐쇄적이라면 시골은 개방적이며 항상 문이 열리게 돼있어요. 그런만큼 자주 부딪히게 되죠. 정도 들지만, 갈등도 생기기 마련이죠. 그런 부분이 어려운 부분 중 하납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는 ‘귀촌 귀향’이어서 적응이 비교적 빨랐어요. 이미 고향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동네에 친척도 있어요. 그래서 편하게 정착할 수 있었죠. 고향이 아닌 사람들이거나 시골서 자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진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수입적인 측면에서도 어려움이 따른다. 2~3년 수입이 없어 토로하는 귀농인들도 많이 봐왔다.

“도시에선 월수입이 들어오잖아요. 정 돈이 없으면 일용직이라도 뛰면 돼요. 시골은 1년 단위로 수입이 들어옵니다. 그러니 계획 잘 못 짜면 2~3년 쫄쫄 굶습니다. 토지를 구입하고 싶어도 토지가 없죠. 웬만해선 잘 안 팔아요. 빈집 있어도 안 팔죠. 팔아봤자 돈도 안 되고, 게다가 자식들이 언젠가 귀향할 생각이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가지고 있는 편이 낫다는 계산이 나오죠.”

김 씨는 특히 귀농한 이들에겐 철저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리 준비해서 내려와야 합니다. 농법 공부를 하더라도 작목별로 재배 년차가 다르니 수익을 잘 따져서 귀농해야 해요. 복분자, 오미자 등은 기본적으로 몇 년 걸리거든요. 주작목이 복분자면 감자나 고구마, 고추 등 짧은 시간 내 얻을 수 있는 작목도 선택해서 와야죠. 단년과 중장년 계획을 동시에 세워야 해요. 그게 안 돼 수익이 없으면 부부간에도 갈등이 생깁니다. 집안이 평온할 리 없겠죠.”



김 씨는 이 때문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구비해올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시골엔 노인들이 많고 그에 비해 요양보호사는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센터가 많아요. 거기서 할머니, 할아버지 돌봐주는 일을 당장 할 수 있거든요. 농사에 실패했을 경우 대안이 된다는 얘깁니다. 차만 한 대 있으면 일하는데 수월해요. 주로 여자들이 많이 합니다. 남편이 돈 못 벌 때 생활비라도 보탤 수 있는 일이거든요. 또 동네 어르신들 상대로 일하다보면 좋은 정보도 얻고 나중에 농사도 수월하게 할 수 있어요.”

실제 김 씨의 아내는 센터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당장 농사일을 할 여력이 안돼 맞벌이 부부로 시골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저는 마을에서 사무장 일을 하면서 용돈을 벌고 있죠. 그러면서 농사지을 시기를 고민하고 있어요. 우선은 마을 사무 업무에 충실하려고요. 아직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사무일은 제가 해야 합니다. 조경에 관심이 많은데, 언젠가 제게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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