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1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아주머니. 낮춤말로는 아줌마. 우스갯소리로, 이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 아줌마라고 하는데 막상 현실 속 아줌마의 모습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아줌마들이 가장 약해지는 때가 있으니… 바로 남편이 ‘돈 벌어 오는 유세’를 떠는 그 순간이다.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회사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아?”라며 퇴근 후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려 드는 남편을 보면 울화가 터진다. 누구는 왕년에 직장 안다녀봤나? 나도 집에서 애 봐주는 마누라가 있으면 마음 편하게 직장에 나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남편에게는 들리지 않는 혼잣말일 뿐. 바쁘게 저녁 준비를 하다가도 물 한잔 갖다달라는 말에 시원한 물 한 컵을 남편 앞에 대령한다. 누워서 빈둥빈둥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 앞에.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는 범위다. 그래. 직장 생활 힘들고, 우리 가족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니 그까짓 잔심부름은 얼마든지 해주겠다.

문제는 눈치 없는 남편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을 때다. “집에서 놀면서…”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머릿속 퓨즈가 펑~ 하고 나간다.
집에서 논다고? 누가? 내가? 엄마와 아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대한민국 아줌마가?
애 낳기 전까지 10여년 간 기자생활을 했다. 특히 일 많고 치열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러다 과로사할지도…’라는 두려움까지 몇 번이나 가져봤다.
하지만 쌍둥이를 낳고 아줌마가 되어 집안일과 육아를 홀로 도맡아 하다 보니 그동안의 직장생활은 애교로 느껴질 만큼 일의 강도가 고됐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제자리이고, 육아전쟁은 끝이 안 보인다. 어디 나뿐이랴. 대한민국 모든 아줌마들의 삶이 그러한 것을.



문제는 그러한 아줌마들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들의 태도다. ‘집에서 논다’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나온다. 전업주부 아내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니 자연히 ‘돈벌어오는 유세’를 떨게 된다.
‘돈벌어오는 유세’란 게 도대체 뭐냐고 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백이면 백 남자다. 여자들은, 아줌마들은 안다. 남편의 ‘돈벌어오는 유세’란 게 뭔지.
바로 이런 거다. 날이 더웠던 어느 날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원한 칵테일 한잔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침 커피전문점 앞. “요즘에 모히토라는 칵테일이 인기라던데 어떤 맛인지 마셔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소원성취. 시원한 모히토를 한 모금 마시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아줌마가 모히토 마셔서 뭐한다고 8000원짜리 칵테일을 먹냐. 그냥 5000원짜리 아무거나 마시지.”
집에서 노는 아내가 8000원짜리 칵테일을 마셔서 아까웠던 남편은 그날 저녁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보내야 한다”며 동네친구를 만나 8만7000원어치 술을 마시고 왔다.
바로 며칠 전이었다. 19개월째 사용 중인 스마트폰이 최근 들어 이상했다. 충전이 급속으로 되고 배터리가 빨리 소진되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불량 상태가 되다 전원이 꺼지곤 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다.
요즘은 1초에 영화 한 편씩을 다운받는 스마트폰도 있다고 하던데….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커져갔다.

19개월 전에도 ‘집에서 노는 아줌마 타령’하는 남편 때문에 당시에도 가장 ‘후진’ 모델을 샀던 터라, 이번에 바꾼다면 정말 화면도 크고 속도도 빠른 최신형을 사고 싶었다. 남편 역시 1년에 한 번씩 새로운 모델로 스마트폰을 교체하는 ‘얼리 어댑터’라 내 기분을 충분히 이해해줄 거라 믿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구입할 생각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말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공짜폰으로 바꾸던가 수리해서 써라”였다. 
그래. 맞는 말이다. 사용한지 2년도 안된 핸드폰. 고쳐 쓸 수 있으면 고쳐 써야지. 아이들 뽀로로 보여줄 때 말고는 굳이 화면 크고 속도 빠른 게 필요하지도 않지.
맞는 말이지만. 속에서는 분노가 들끓었다. 남편이 거절한 이유가 나를 집에서 노는 아줌마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화가 났다. 

남편들이 ‘돈벌어오는 유세’를 떨며 본인의 씀씀이에는 관대하고 마누라의 씀씀이에는 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내의 일상을, 아줌마의 일상을 ‘노는 것’으로 인식한다. 아줌마의 노동에는 그만큼의 값어치를, 일당을 매겨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쭉 써놓고 보니 내 남편이 아주 ‘나쁜놈’이 된 것만 같다. 악플이 달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내 남편. 그리 ‘나쁜놈’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착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고, 집안일도 돕는다.
다만 이렇게 가끔씩 ‘돈벌어오는 유세’를 떨며 한 번씩 속을 뒤집어놓는데, 유세를 떠는 이유가 본인은 힘들게 밖에서 일하고 마누라는 집에서 편하게 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굳이 내 남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쯤 되면 뜨끔한 남자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내 남편 얘기야”라며 무릎을 치는 아내들도 많을 것이다.

여자들이 바라는 건 큰 게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 모히토 안 마셔도 되고, 최신형 스마트폰 없어도 된다. 다만 남편들이 바깥일 하느라 힘든 만큼 아내들도 집안일 하느라 힘들다는 걸 ‘인정’해 달라는 것.
가슴으론 느끼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알아. 알아” 하지 말고, 아줌마로 살고 있는 아내들의 일상을 진지하게 존중해 달라는 것.
그러고 나면 더는 남편의 입에서 ‘나는 힘들게 일하는데 마누라는 집에서 논다’는 말이 나오지도 않을 테고, 부부의 노동이 똑같이 존중받으니 남편이 본인의 씀씀이에만 관대한 ‘돈벌어오는 유세’를 떨지도 않을 테고, 그런 남편을 보며 아내는 행복할 테고, 아내가 행복하면 가정이 더욱 화목해질 것이다.

이왕 얘기를 시작 김에 대한민국 아줌마 대표로 남편들에게 바라는 한 가지를 더 말해야겠다. 어렵지 않다. 아주 작고 사소한 거다. ‘아줌마’로 살고 있는 당신의 아내를 ‘여자’로 봐달라는 거다. 
얼마 전 새로운 일정들을 기록할 수첩이 필요했다. 문구점에 가서 수첩을 고르는 내게 남편은 성을 냈다. 집에 안 쓰는 수첩이 많은데 왜 새것을 사느냐고 했다.
여자들은 보통 다이어리 정리를 할 때 스티커를 붙이고 색색의 펜으로 예쁘게 치장하지 않느냐. 나도 새로운 마음으로 예쁜 수첩에 새로운 일정들을 적어나가고 싶다. 집에 있는 수첩들은 투박하고 당신 회사 로고가 찍혀있지 않느냐. 그런 수첩은 새로운 출발과 어울리지 않는다. 내 마음의 문제다.

물론 남편은 이런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회사의 여자 동료가 예쁜 수첩에 예쁜 색깔 펜으로 메모하는 것을 봤다면 ‘역시 여자구나~’하며 슬쩍 웃었을지도 모르지만, 마누라한테 왜 예쁜 수첩이 필요한지에 대해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공통적으로 쓰는 말이 몇 가지 있다. 예쁘게 화장한 뒤 어떠냐고 묻는 아내에게 “호박이 줄긋는다고 수박 되냐” 하는가 하면, 모처럼 팔짱끼거나 애정표현 하는 아내에게 “어허~ 가족끼리 왜 이래~”라고 한다.
농담인 걸 뻔히 알지만. 그 때마다 아내들의 여자로서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 입는다. 살면서 그런 일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아내들도 자신이 여자라는 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냥 가족으로서의 삶.
그 때가 되면 남편들은 한탄한다. 내 아내가 처녀시절에는 말랑말랑한 천상 여자였는데 언젠가부터 세지더니 지금은 완전 괴물이 됐다고….

이런 말이 있다. 여자가 늙어서 필요한 것 다섯 가지는 ?돈 ?딸 ?건강 ?친구 ?찜질방이고, 남자가 늙어서 필요한 것 다섯 가지는 ?부인 ?아내 ?집사람 ?와이프 ?애들 엄마라고 한다.
여자들은 공감하고 남자들은 뜨끔해지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아줌마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아내들은 밖에서 힘들게 돈 벌어오는 남편을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포기하고 아내, 애 엄마, 아줌마로서의 삶을 택했다. 남편들은 그 사랑에 답해줄 필요가 있다.
친구들한테 자랑할 큰 다이아반지, 명품 샤넬 백, 강남의 40평대 아파트로 답을 해줘도 좋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된다면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해줘라. 아내의 노동을 가슴으로 인정해주고, 아내를 여자로 바라봐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아줌마가 된 아내들의 가슴은 스르르 녹아내릴 테니….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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