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10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여자의 인생이 180도 달라진다. 결혼 이후 삶의 변화 폭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크다. 남자는 총각일 때나 유부남일 때나 집에서 하숙생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여자는 결혼과 출산이라는 관문을 거치며 직장도 진로도 바뀌는 일이 허다하다.

주변에서도 마찬가지. 처녀 때 잘 나가던 여우가 남편을 잘못 만나 온갖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하고 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처녀 땐 폭탄에 불과했던 친구가 결혼 이후 사모님 소리 들어가며 해외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경우도 있다.

딸을 가진 친구들은 벌써부터 미래의 사위를 걱정한다. 어린 딸에게 한글과 숫자, 영어와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남자 보는 눈’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있다.

불행하게도 나는 ‘남자 보는 눈’이 없었다. 교사인 엄마로부터 학업과 관련된 교육은 철저히 받았지만 남자와 연애 문제에 대해선 “착한 사람 만나야 한다”는 한마디 외에는 들은 것도, 배운 것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항상 나쁜 남자를 만나 어렵고 힘든 사랑만 해왔다.

이전에도 말했듯 내 첫사랑은 잘생긴 개망나니였다. 3년 넘게 사귀는 동안 온갖 위험하고 부도덕하고 조마조마한 짓은 다 해본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강렬했고 절박했기에 첫사랑의 여운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대 중반 무렵 두 번째 사랑이 찾아왔다. 큰 키에 마른 몸. 세련된 힙합 패션에 영화와 음악과 사진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두 살 어린 대학생이었다.

그 아이를 만난 건 한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였다. 20대 중반. 나는 살면서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의 이혼 위기. 1년 동안의 부부싸움. 이혼. 그리고 아빠 없는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나머지 가족들의 몸부림.

온실 속 화초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온실 벽에 쫙쫙쫙 금이 가던 순간이었고, 준비 없이 들판에 잡초로 내던져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공황장애까지 왔던 시절이었다. 

죽으려고 했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이어진 1년 동안 나는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방안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려고 했다. 책상 위에 올라가 바로 한 발만 내딛으면 되는 그 순간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가 미친 듯이 방문을 두드렸고 나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엉엉 소리 내서 대성통곡을 하며 신들린 사람처럼 인터넷 검색을 했다. 검색어는 자살, 죽음 등이었다.

한 자살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회원가입을 하고 게시판 글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이 카페. 분명 자살 카페인데 같이 죽자는 사람도 없고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자살할 만큼 힘든 사람들이 모여 인생을 살아나가기 위해 만든 카페 같았다. 그렇게 게시판의 여러 글들을 읽는 동안 눈물은 멈춰 있었고, 그 다음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내려친 듯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creep’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사람이 쓴 게시물. 무슨 특별한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시처럼 들리는 하나의 글귀 뿐.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 어떻게 추락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착륙이지.”

그 한 문장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슴이 쿵. 머리가 저릿하면서 온 몸에 전기가 흘렀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마지막이라고. 절망의 끝이라고 생각해서 죽으려고 했는데 아직 마지막이 아니란다. 지금도 나는 추락하고 있는 중일뿐이고 그렇기에 괜찮단다. 중요한 건 추락이 아니라 착륙이니까.

그 말이 나를 살렸다. 그날부터 나는 부모님의 싸움이 이어지거나 힘든 상황이 닥칠 때마다 ‘아직까지 괜찮아’를 주문처럼 읊어댔다.

나를 살린 사람의 아이디는 ‘creep’. 우울한 노래의 선두주자인 그룹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대표곡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아이디 같았다. 그 사람의 글들을 모두 검색했다. 그런 식이었다. 그 사람의 글은. 모두 뜬금없었고, 시니컬했고, 세상을 내려놓은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사람에게 흠뻑 빠지게 되었다.




마침 며칠 뒤에 정모가 있다는 공지. 나는 ‘creep’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런 주저 없이 정모에 참석했다. 자살카페라 그런가? 분위기도 남달랐다. 고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모두 동등한 관계. 반말을 했다. 서로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서로의 아이디로만 불렸고, 자기가 편한 대로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서로 술을 따라주는 게 우리네 술자리 문화라면, 그 곳엔 그런 게 없었다. 누구나 자기가 마시고 싶을 때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따라 마셨고, 모임에 나와서도 말이 하기 싫은 사람은 한 마디도 안 했다. 그러다 갑자기 노래가 하고 싶으면 노래를 했고, 고개를 까딱이며 춤을 춰도 됐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 묘한 분위기 속에 등장한 ‘creep’. 헉.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 왜냐고? 글만 읽고도 이미 내 마음을 빼앗아간 사람이 얼굴까지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명문대 학생. 음악과 영화에 광적으로 미쳐있고 사진을 취미로 했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 세련된 패션 감각. 과묵함에서 풍기는 카리스마.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는 다 갖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카페에서 마치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멋있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자기가 그 날 아침에 싼 ‘똥’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멋있다’ ‘역시 creep이다’는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내용이라곤 “오늘 아침에 팔뚝만한 굵기의 똥을 쌌다. 끊어지지도 않고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너무나 매끈하고 깔끔하게 딱 떨어진 곡선. 휴지에 묻어나오는 것도 없을 정도였다.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도 모두가 열광했다. 그 선두에 내가 있었다. 나도 그 당시 “오오오~ creep 멋진 걸? 그런 큰 똥 한 번 실제로 봤으면 좋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로부터 1년 넘는 시간동안 나는 그 사람을 짝사랑했고 어느 날 고백을 했다. 그리고 모처럼 찾아온 행복감.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카페 내 여러 여자들과 동시 다발적으로 문어발 연애를 하고 있었고, 사생활에 대해 말을 안 하는 카페 분위기 덕분에 그 사실을 숨기고 지내올 수 있었다.

어느 날 카페 여자 회원들끼리 채팅을 하다 알게 된 이 사실. 그 날 채팅에 참가했던 여자들 중 4명이 ‘creep’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우리는 한 날 한 시에 이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하지만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는 평소에 “나는 한 사람에게 얽매이는 게 싫다. 가장 이상적인 이성 관계는 프리섹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뭣도 모르고 그런 말들이 멋있어 보였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는 단지 ‘자유분방한 영혼’이라는 말을 방패삼아 이리저리 껄떡대고 다니는 무책임한 남자에 불과했다.

첫사랑이던 상대가 바람을 피워 앞으로도 ‘남자의 배신’ 만큼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바로 몇 년 전이었는데, 두 번째 사랑은 바람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일부다처제. 나는 남자를 골라도 어째서 이런 남자만 고를까.

나는 카페를 탈퇴했고 때마침 이혼했던 부모님도 재결합하면서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남자 보는 눈이 없던 나는 나쁜 남자한테는 잘 꽂히는 반면 좋은 남자는 시시해했다. 중간중간 착하고 성실한 좋은 남자도 많이 만났고 일부한테는 구애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못 생겨서.

그렇다. 나는 남자의 외모를 중시하는 아주 ‘나쁜 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내가 만난 나쁜 남자들은 거의 다 잘생겼고, 착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못난이였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남자를 보는 나쁜 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잘했다. 잘생긴 데다 착한 사람하고 결혼한 것이다. 물론 착하기만 해서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남자 고르는 눈이 형편없던 나는 개망나니 바람둥이와 결혼을 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내 딸도 운이 좋을 거라는 장담은 못한다. 그러니 꼭 길러야 한다. 좋은 남자를 가려내는 눈썰미를.

아마 내 경험들이 딸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남자의 외모에 홀라당 속아 정주고 마음 주고 상처 입었던 나의 젊은 날. 내 딸을 위한 교육 재료로 쓰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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