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요즘 농촌에서는…




# 탈곡기를 설치하는 강대동 미지예씨부부


메주콩을 사러 갔다가 메주콩은 못 사고 양파모종만 얻어왔다. 한두 포기도 아니고 무려 구백여 포기에 달하는, 공으로 얻어온 그 많은 양파모종을 마당의 한쪽에 심고 있노라니 뭐랄까, 이게 참 기분이 전라도 말로 해서 ‘지랄’ 같다.

금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작년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품목이 꽤 된다. 마늘 농가에서 일찌감치 생산비에도 못 미친다고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고추 가격이 폭락했고, 생강이 또 그렇게 풍년이 들어서 애물단지가 돼 버렸는가 싶더니 배추와 무가 밭에서 그냥 갈아엎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 콩도 들어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이십여 일쯤 전이었다. 마을회관 앞에서 서리태 타작을 하고 있는 마을 사람을 발견했다. 서리태는 밥할 때 한줌씩 넣으면 그 씹히는 식감이 좋기도 하고, 또 몸에도 좋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해마다 얼마씩 사서 먹는 참이었다. 그에게 서리태를 좀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식의 답을 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의 아내가 집으로 달려왔다.

“서리태 산다고 했담서요. 얼매나 살라고 그라요?”
“아 뭐, 많이 살 것은 아니고요. 근데 올해는 키로당 얼마씩이나 가요?”
“아따 참말로, 겁나게 떨어졌어라우.”

한숨을 푹 내쉬면서 겁나게 떨어졌다고, 일단 그렇게 말해놓고 갑자기 생글생글 웃어버리는 그녀의 표정은 뭐랄까, 어리둥절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고, 어렴풋한 내 기억에 따르면 작년에 서리태는 킬로그램 당 일만 원을 훌쩍 넘어 일만 오천 원 가까이 했었다. 그러면 금년에는 겁나게 떨어졌으니까 일만 원쯤 하려나? 내심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뜻밖의 말이 나왔다.



# 베어놓은 콩대를 탈곡기로 옮기는 중


“칠천원 간다고 안 허요.”
“칠천? 와아따 진짜로 겁나게 떨어졌네 잉?”

말은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생각은 3킬로 정도 구입할 예정이었지만, 가격이 그렇게밖에 안 한다면 5킬로그램을 산다 해도 지불하는 돈은 3킬로 금액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판단이 즉각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서리태 5킬로그램을 3킬로그램 정도의 가격밖에 안 되는 삼만오천 원에 구입해놓고 싸게 샀다고 즐거워하며 여기저기 자랑을 했었던가 어쨌던가. 하여튼 그 서리태 나도 좀 사 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그녀를 찾아갔다.

“아따 그것이, 쩌그 머시냐 그, 잡곡상에 갔더니마는, 그렁게 그것이.”

서리태 10킬로그램을 더 사려고 한다는 말에 그녀는 그렇게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에두르다가 이윽고 본론이 나왔다. 얘기인즉 자기가 손해를 봤다는 것이었다. 잡곡상에 갔더니 킬로그램당 칠천오백 원씩 계산해 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칠천 원에는 안 판다고, 칠천오백 원씩 쳐주면 판다는, 그런 얘기를 그녀는 그렇게도 어렵게 하고 있었다.

하긴 그녀에게는 그런 얘기가 어렵기도 할 터이었다. 자신이 공들여 지은 농사의 결과물을 돈으로 환산해야만 하는 데서 오는 서글픔 같은 것이 왜 없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그녀의 문제의식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문제랄 것도 없었다. 1킬로그램에 칠천오백 원씩 계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난 번 칠천 원씩 계산했던 것도 오백 원씩 더해서 드리겠다고 하니 그녀는 무슨 이런 횡재가 다 있느냐는 듯이, 자다가 느닷없는 떡이라도 얻은 듯이 싱글벙글, 어쩔 줄 몰라 하다가는 기어이 서리태 1킬로그램을 덤으로 주겠다고, 내 입장에서만 보자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는 그런 선언을 해버리고 있었다.

“어허 이것 참.”



# 일에 몰입하는 강대동씨


서리태 1킬로그램을 덤으로 얻은 기분은 뭐랄까, 가슴에서 아련한 어떤 향수 같은 것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 같은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랬다. 그렇게 해서 서리태 10킬로그램을 사달라고 한 사람에게 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메주콩도 필요하다고, 메주콩 가격을 알아봐 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다시 그녀를 찾아갔다.

“메주콩은 진짜로 싸디싼디, 싸디싼게, 알았소 잉. 알았응게.”

그날따라 그녀는 무척 바빠 보였다. 바쁜 그녀는 메주콩이 아주 싸다고, 싸니까 알았다고, 그렇게 나로서는 도무지 요령부득이한 말 한 자락을 깔아놓고는 스쿠터를 타고 횡 떠나 버렸다. 떠나는 그녀의 뒤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알았다는 것은 곧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메주콩을 구해주겠다는 얘기려니 생각하고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흘, 나흘,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다시 찾아가기도 뭐하고 해서 직접 잡곡상에 가서 메주콩 가격을 물어보고, 내친 김에 서리태 가격도 알아보았다.

잡곡상에서 서리태는 8천원에 팔고 있었다. 칠천오백 원에 사들여서 오백 원의 마진을 보고 판매한다는 얘기였다. 메주콩은 놀랍게도 1킬로그램에 삼천 원. 세상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으면서도 어쨌든 메주콩이 엄청 싸다고, 삼천 원밖에 안 한다고, 메주콩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이십 킬로그램을 사서 보내달라신다.

메주콩 이십 킬로그램은, 내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한 양이었다. 그렇다면 잡곡상에서 구입할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십 년 이상 콩 농사를 지어온 사람에게서 직접 구하면 서로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쪽으로 전화를 해 보았다.

강대동. 미지예씨의 남편, 콩 농사와 밀 농사를 전문으로 해온 그는 당연하게도 콩은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그의 콩은 내가 필요로 하는 콩이 아니었다. 그의 콩은 풀 잡는 농약을 안 쓰고, 사람을 사서 손으로 풀을 뽑거나 뽑지 못한 것은 그대로 둔 채 콩 농사를 짓는 까닭에 영농비가 곱절로 들고, 그래서 가격도 곱절로 받아야만 하는 이를테면 귀한 콩이었다. 1킬로그램에 삼천 원 가격만 생각하고 달려간 나로서는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 탈곡되어 자루로 들어가는 콩


그는 말했다. 1킬로그램에 육칠천 원씩은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못 받을 바에는 돈 안 받고 그냥 주고 만다는, 그런 말을 그는 결기 어린 목소리로 하고 있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콩 가격이 폭락한 데서 오는 아득한 절망감이 느껴지고 있었고, 이십 년 이상 콩 농사를 지어온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말대로 그 귀한 콩을 그냥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내 돈 삼천 원씩을 얹어서 ‘제값’에 사야 하는가. 소심한 나로서는 그런 고민이나 혼자 속으로 만지작거리며, 그가 사주는 짜장면을 먹고, 소주를 마시고,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심사인 채로 그가 극구 가져가라고 하는 양파모종만 차에 싣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부터 콩 타작을 하는데 혹시 안 바쁘면 일손을 좀 보태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12월도 다 가는데 여태 콩 타작도 안 하고 있었단 말인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심사인 채로 콩밭에 도착해본즉, 한심도 그런 한심한 지경이 없었다.

키가 큰 명아주며, 독활이며, 나팔꽃 같은 각종 식물들이 말라죽은 사이사이로 베어놓은 콩대가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들쥐들이 신명나게 콩잔치를 벌인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었고, 꿩이며 고라니 같은 동물들이 또한 날마다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흔적이 보란 듯 남아 있었으며, 눈이 내렸다가 녹은 까닭에 일부는 콩알이 퉁퉁 불어서 금방 콩나물이라도 돼버릴 것 같았다.

콩은 베어서 다 마르면 낟가리를 쌓는 게 콩 농사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강대동씨의 금년 콩밭은 도대체 낟가리를 구경할 수 없었다. 금년에는 12월에 많은 눈이 안 내려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작년처럼 폭설이라도 쏟아졌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눈에 푹 파묻힌 콩은 그 안에서 퉁퉁 불어터지고, 그러다가 날씨라도 따뜻해지면 싹을 내거나 썩고 말았을 터이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 귀한 콩을 이렇게 방치해 두었는가, 하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냥 알아볼 수 있는 일이었다. 고생해서 타작을 해봐야 영농비도 안 빠지고, 영농비는커녕 토지 임대료나 겨우 나올까 말까 한 상황이고 보니 콩밭에 나가는 것 자체가 지겹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하여튼 정서가 안정되지를 않는 까닭에 하루 이틀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동안 어느새 11월도 끝나고 12월도 막바지로 치닫는 상황에 직면해버린 것이었다.



# 산에서 나뭇단을 옮기는 것처럼 잡초 우거지 콩밭


토지 임대료, 그놈의 임대료 부담만 없어도 마음이 그렇게까지 무겁게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 요즘 농촌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농사꾼 강대동씨의 피땀을 요구하는 땅도 구십구 퍼센트 이상이 임대한 것들이었다.

토지 임대료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어떻게 타산을 맞춰볼 정도의 수준을 유지해왔지만, 인삼밭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매년 상승곡선을 그어왔다. 연작으로 인한 소출감소를 피하느라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는 인삼 재배업자들이 증가하면서 토지 임대료를 매년 새롭게 올려놓고 있었고, 그 바람에 고향을 지키며 어렵게 농사를 지어온 소작농들은 가슴에 멍이 들다 못해 타들어가고 있었다.

임대료가 포함된 영농비는 매년 상승하는 반면 농작물 가격은 이게 상승은 고사하고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화학비료 안 쓰고 농약을 멀리하는 유기농 농사를 지으면 나아질까 기대했지만 그것도 반짝 특수일 뿐이었다. 도대체 희망이라는 낱말 그 간단한 두 글자를 끼워 넣을 틈이 없는 상황인 셈이었다. 그렇다고 절망할까? 절망해서 자살이라도 꿈꿔야 하는가?

“농자 천하지대본이라, 아따 참말로 진짜로 말이요, 내가 순진했던 시절에 그 말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렸었단 말이오.”

그래서 일찌감치 도시생활 접고 ‘농투사니’ 생활을 시작했다는 강대동씨. 그는 따지고 보면 귀농 1세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원조라고 보는 게 옳은 사람이었다. 농민운동에도 깊이 관여하는 등 그야말로 청춘을 다 바친 농촌 생활을 통해서 그가 얻은 유일한 것이 있다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반드시 살아가야 한다는, 살아내야 한다는 강한 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희망이라든가 미래 같은 고급스런 단어는 일단 뒤로 밀어둔다 치더라도, 최소한 절망에 자신을 넘겨버리지 않고 매일매일, 그날그날, 하루하루를 방관자의 입장이 아닌 주관자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시간마저 잊은 채 살아가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그의 삶의 방식은 그 자체가 거대한 어떤 희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긴 진정한 희망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사하는 몰입의 정신, 강대동씨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그 모습은 때로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자체가 희망의 실체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 토지임대료를 껑충 올려놓은 임산밭


어쨌든 강대동씨의 금년 콩 농사는 망했다. 농사를 잘못 지어서 망한 게 아니라 가격이 폭락해서 망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해는 내일도 뜬다는 식의 막연한 위로의 말조차도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짐작컨대 그는 가용할 돈조차도 궁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당장 궁하다 해서 콩을 싸구려로 팔아먹지는 않겠다는, 자신이 들인 노력의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할 바에는 돈 한푼 안 받고 콩을 그냥 줘버리겠다고 말하는 그의 결기 어린 목소리 앞에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이 그냥 가슴 한쪽에 구멍만 뚫리고 있었다.

그렇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인 채로 그날 한나절 동안 그의 콩 타작을 도왔다. 해가 꼴깍 넘어가서 사방이 캄캄해질 때까지, 손이 시릴 정도로 쌀쌀한 날씨임에도 등에서 땀이 나는 콩 타작 일을 돕고 돌아오는 길은 달빛이 너무도 휘황해서 바람이 부는 장면까지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서릿발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양파 모종을 시작했다.

양파 모종, 그것이 나를 새삼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금년에는 양파모종을 좀 사다가 마당에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생각만 하다가 가을을 보내고 말았다. 그렇게 양파는 잊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강대동씨가 나를 보자마자 양파모종 필요하지 않느냐고, 필요하다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판만 달라고 했는데 두 판을 가져가라고 한다. 말은 두 판이었지만, 정작 그것을 차에 실을 때는 두 판이 늘어서 네 판이 되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치 않다고, 극구 사양을 했지만 그는 극구 네 판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마도 내년 양파를 수확할 즈음에는 양파 부자가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문득, 불현듯,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양파를 깔 때는 눈물이 나온다지만, 아직 양파가 되기도 전의 양파모종에서도 눈물을 부르는 무엇이 있다는 게 나는 지금, 다만 신기할 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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