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기획 : ‘귀농 열풍’ 그 현장을 찾아서-25> 강원도 양양의 최종대 씨



귀농바람이 한창이다. 귀농 붐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비롯됐다. 1970~1980년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차출’돼 탈농을 이끌었던 이들 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회귀해 ‘인생 2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도시생활에 회의를 느낀 30~40대까지 귀농에 가세, 농촌에서 제 2의 인생을 꿈꾸는 귀농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귀농인들은 주로 소일거리를 통한 활력 회복, 전원생활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건강 추구 등을 이유로 농촌행을 결심하고 있다. 물론 생계수단으로 귀농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위클리서울>은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들어간 이들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 이후의 생활 등을 들어봄으로써 귀농과 귀촌의 현실을 짚어보고 있다. 이번 호에는 오랜 서울생활을 접고 강원도 양양의 고향으로 돌아간 최종대(49) 씨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본다.







다짐이 이제야 현실로

최종대 씨는 10년 전부터 고향인 양양으로 귀촌하겠노라, 다짐했었다. 말 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간 불편을 감수하며 본적도 옮기지 않았더랬다. 그러다 지난해에서야 드디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서울에 살며 본적을 옮기지 않아 불편한 적이 많았어요.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 등을 제출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요즘은 주민센터에 가서 편하게 뗄 수 있지만, 90년대까진 호적등본이 필요하면 고향에 내려가거나 친척에게 부탁해 등기로 받아야 했죠. 아내는 이해를 못하겠다며 본적을 옮기자고 했죠.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버티다가 드디어 귀향에 성공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아이들 교육 문제 등으로 아내와 많은 고민을 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마음 편히 귀촌을 결정할 수 있었다.

“정작 내려가자고 마음먹으면 아이들 교육문제가 걸리더라고요. 아내는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애들 큰 다음 독립부터 시키자고 해서 이렇게 오래 걸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들 대학에 들어갔고, 각자 알아서 잘 살아요. 그런데 좀 더 일찍 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서울에서 사귄 몇몇 친한 친구들은 저만 결단 못 내리고 있을 때 다들 결단을 내렸죠.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이미 고향이나 다른 지역으로 귀농해서 지금은 다들 자리 를 잡았거든요. 그 친구들 소식 들어보면 부럽습니다. 저는 너무 늦게 내려와 이 고생을 하니까….”

청년 시절 서울로 가 자리를 잡은 뒤 근 3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최 씨. 농사일도 재밌고 흙냄새도 여전히 정겹다며 만족스럽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도시를 떠나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다시 살고 싶었어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조용히 사는 농부들의 인품에도 반했고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어렸을 적 친구들이 많이 없다는 겁니다. 어렸을 적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산업화시대에 뿔뿔이 흩어졌죠. 옛 고향의 모습보단 조금 퇴색됐지만 아직 몇몇 친구들이 있어 좋습니다.”



고향 땅에 뿌리내리기로 결심하고 지난해 고향을 찾았을 때도 동창생들이 반겨줬다고 한다.

“자기들이 지었다며 토마토, 옥수수 등 이것저것 챙겨주더라고요. 첫해는 농사를 제대로 못 지었지만, 주변 친구들로 인해 풍족한 해를 보냈어요. 이래서 농사를 짓고자 하더라도 고향으로 오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올 가을엔 내년 농사를 위해 밭을 정리하다가 우연찮게 풀숲에 숨어있는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 채 굴러온 것이다.

“어쩐 일인지 올해는 제대로 된 호박 하나를 수확하지 못했어요. 늙은 호박은 저장성이 뛰어나고 부기를 빠지게 하는 효능이 있죠. 그 옛날 가난한 집 산모가 미역 대신 먹던 구황식품이며 약용으로 쓰이던 게 이 호박입니다. 요즘은 이른바 웰빙 식품으로 각광 받으면서 고급호텔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기 식품이죠. 이렇게 어린 시절 끼니로 먹던 호박죽이 이제는 고급음식이라는 실감나지 않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집집마다 담장위나 초가지붕에 올렸던 호박에 대한 정감은 여전히 각별해요. 시골 사람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일 겁니다.”

맛도 맛이지만 호박이 담장 위에 있던 옛 모습이 그리워 작은 채소밭 가장 자리에 호박을 하나 심었다고 한다.

“호박은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줄기차게 먹거리를 내줘요. 아마 내년부터는 호박이 우리 가족과 동네 이웃들을 먹여 살릴 겁니다(웃음).”

뭐니뭐니 해도 호박의 진면목은 늙은 호박에 있다는 게 최 씨의 얘기. 크고 잘생긴 늙은 호박이 널려있는 호박밭과 담장을 상상해 보다. 그러나 크고 잘생긴 늙은 호박을 얻기란 쉽지 않다.

“우선 종자가 좋아야 해요. 밑거름도 풍부해야 합니다. 좋은 씨라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지만 거름이 모자라면 호박은 늙다가도 썩어요. 늙어도 영양이 필요하고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지극한 보살핌이 있어야 해요. 크고 잘 생긴 그 싹수만 보고 애호박을 따지 않아야 합니다. 잘 생긴 놈일수록 따고 싶은 유혹이 따르지만 애써 참아야 하죠(웃음).”




된장, 풋고추, 쌀밥만 있으면…

최 씨는 우연한 기회에 인큐베이터 귀농교육을 받고 1500평 규모의 농토와 한옥주택, 양계장, 비닐하우스 그리고 여러 과일나무가 있는 전형적인 농가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귀농 초기 헤매지 않고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귀농과 동시에 농지에 고추며 가지, 토마토 등 갖가지 채소를 심었다.

“올해 봄부터 가을까지는 철따라 푸성귀를 뜯어다 먹었죠. 이것저것 따먹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날마다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고 남는 채소는 도시로 내다팔아요.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는 무공해 먹거리라서 팔리는 건 시간문젭니다. 팔다가 남은 것들은 주변 이웃들과 나눠 먹죠.”

남달리 특별한 목적이 있어 귀촌한 것은 아니다. 된장과 고추장으로 끼니 해결할 수 있는 삶이면 그저 만족스럽다. 

“큰 욕심이 없어요. 아내와 함께 하루 끼니 안 굶고 살면 그만이죠. 된장에 풋고추에 쌀밥만 있으면 됩니다. 올 한해는 채소와 잡곡 심어놓고 자라나는 모습 보며 흐뭇해했습니다. 가끔씩 근처 산도 오르며 건강 챙기고요.”

서울에선 대형학원의 영어강사였던 최 씨. 그동안 자녀 교육비 등으로 인해 큰 돈을 모으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돈 욕심이 있었다면 귀촌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봐요. 아이들 다 키웠고, 각자 전셋집 마련해줬으니 말이죠. 물론 아내는 돈 좀 더 모아서 귀촌하자고 했죠. 하지만 그렇게 돈 모아서 내려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시골에서 돈 쓸 일도 없는데 말이죠. 되도록 여기서 자라는 것들에 의존해 끼니를 떼우려 해요. 돈 쓸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죠.”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불안하다.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는 가끔 우리 정말 이렇게 살다가 굶어죽는 것 아니냐고 물어요(웃음). 하긴 지난 2년간 수익을 거의 내지 못했거든요. 물론 손해를 본 건 아닌데, 아내 입장에선 만족스럽지 못했던 거죠. 몇 년 간 고생하고, 작물이 땅에 완전히 적응하게 되면 수익도 오르겠죠. 그때까진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동네에 널린 게 많아서 굶어죽을 일은 없습니다.” 

계절 따라 산에서 나는 나물과 버섯 등으로 별미를 즐기고 있다. 이젠 소 몇 마리 길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렸을 적부터 소를 좋아했어요. 암소와 황소 몇 마리 정도 기르고 싶습니다. 내년엔 농장을 한 번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농가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시골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 자그마한 서당이라도 열어 보려고 합니다. 서당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찾아오는 가끔씩 친구들 반기는 그런 생활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시골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게 아니냐고들 하는데, 가능한 계획이라고 봐요. 농사 일만 제대로 자리 잡으면 그 외 주변 환경은 제 의지로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