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15)



# 고창의 모양성을 처음 보던 날


작년 이맘때쯤, 그녀가 처음 나를 보러 왔을 때 과메기를 가져왔다. 서울에서 전라도 고창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그녀의 핸드백 속에 과메기가 들어 있었다. 경상도 포항에 계시는 그녀의 부모님께서 사랑하는 딸내미 먹으라고 보내주신 것이었다. 부모님이 보내주신 과메기를 그녀는 아마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서 냉장고에 보관해두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뭔가 반짝이는 예감이 있어서 아껴두었던 것일까? 어쨌든 그녀는 부모님이 딸내미 먹으라고 보내주신 그것을 다 먹지 않고 두었다가 나를 만나러 오면서 챙겼다.

과메기만 달랑 챙긴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엄마표 초고추장이라고 하는, 굉장한 프라이드를 자랑하는 초고추장도 그녀는 챙겼다. 딸내미 먹으라고 보내주신 과메기를 그 딸내미는 거의 먹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저보다 나이가 스무 개나 많은 얼추 아버지뻘이나 되는 사내를 만나러 가면서 가방에 챙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감격을 했다기보다는 이른바 멘붕 상태가 돼서 한동안 허둥거려야 했다.

승용차를 몰고 오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과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번갈아 타야 하는 그런 복잡한 여행길에 비린내 풍기는 과메기에 시큼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초고추장까지 가방에 넣어온다? 가방도 어느 정도 밀폐가 가능한 가죽이나 비닐 소재가 아닌 이른바 친환경 제품인 헝겊으로 만든 것이었다. 만약에 누가 나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죽었다가 부활한다 해도 못한다고 손사래를 칠 것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나는 과메기의 맛을 알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 이전까지의 나는 태어나서 과메기를 딱 한 번 먹어보았었다. 과메기가 생산되는 강원도나 경상도에서 먹은 것이 아니었다. 도시 생활 정리하고 농촌으로 왔을 때, 이웃의 ‘아짐씨’가 술안주 좋은 것 있다고 불렀다. 강원도에 사는 친구가 과메기를 선물로 보내왔다는 거였다. 내 눈에 시커멓기 짝이 없는 그것은 그리 썩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겨자를 풀어놓은 간장에 찍어먹는 그놈의 맛은 비린내만 훅 풍긴다는 느낌일 뿐 도무지 무슨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 이 작은 헝겁가방에 과메기와 초고추장을


그때 그 한 차례의 경험이 아마 나로 하여금 과메기 하면 입안에 비린내부터 훅 풍기는 선입견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녀가 나를 본다고 내려오면서 하필 과메기를 가방에 넣어왔다. 처음에는 그런 말조차도 없었다. 무엇인가 맛있는 술안주를 준비해왔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서 부재료 두세 가지를 더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터미널에서 만나 집으로 오는 길에 그녀가 시장에 들러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무슨 인사치레용 술병이나 사려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무슨 쪽파를 찾고, 물미역을 찾고 있었다. ‘이 여자가 대체 뭔 짓을 하려고 이러나?’하는 심사인 채로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고만 있었다. 친분이 그리 깊지도 않은 처지이고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기도 했다.

“많이는 필요 없고, 조금만 있으면 되는데.”

그녀는 물미역을 사면서도 그런 말을 했고, 쪽파를 사면서도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물미역은 킬로그램 단위로 팔고 있었고, 쪽파는 묶음 단위로 팔고 있어서, 그녀는 이를테면 상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양질의 손님은 아닌 셈이었다. 양질이나마나 그녀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양은 쪽파 한줌이요, 물미역도 한줌이면 된다는 등 고객의 권리를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물미역의 생산지를 묻고도 있었다. 전라도 고창에서 판매하는 물미역은 당연히 서해안이나 남해 쪽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아이 참, 물미역은 수심이 깊은 동해안 것을 써야 하는데.”
“아니 대체 뭘 할 건데-에?”
“아, 그런 게 있어요.”
“그야 뭐 그렇겠지. 그런 게 있겠지.”
“히히.”



# 갓 풀어낸 과메기


그때 그녀가 꼭 그렇게 웃었다고 기억되지는 않지만, 하여튼 살짝 개구쟁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아무튼 그렇게 저렇게 살짝 어수선한 기분인 채로 우리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녀의 가방이 열렸다. 미농지 같은 것으로 꽁꽁 싸맨 과메기가 나왔고, 붉은 초고추장 병이 나왔고, 김도 한 톳은 못 되고 한 스무 장 가까이가 나왔다. 세상에, 김까지 가져오다니.

그것들을 식탁에 늘어놓은 채로 그녀는 물미역을 물에 씻어서 5센티 길이로 잘랐다. 그 동안에 나는 쪽파를 다듬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쪽파를 그녀는 물에 씻어서 역시 5센티 길이로 잘라 접시에 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과메기를 먹는 법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과메기는 물미역과 쪽파와 김 그렇게 세 가지 부재료가 있어야 한다는 것. 쪽파는 아무 데서 나온 것이나 다 좋지만, 물미역은 가능한 한 동해안 것이어야 하고, 김은 반드시 돌김이어야 한다는 것, 돌김을 구할 수 없다면 파래김도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돌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초고추장, 초고추장은 아무 것이나 사용해서는 절대로 안 되고 반드시 엄마표여야 한다는 것.

그녀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뭐가 뭔지 감을 잡기가 어려워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홍탁 삼합이라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과메기 오합이란 도무지 낯설어서 얼른 다가오는 무엇이 없었다. 게다가 엄마표 초고추장이라니.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무엇을 몰라도 적당히 몰라야 질문도 쏙쏙 잘 나오는 법인데 그날의 나는 아는 것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응, 응, 소리나 내며,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려 가면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의 상황이 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었다. 썩 그리 친한 것도 아니었고, 얼굴도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나이 차가 많아서 딸랑구니 아방이니 하는 호칭으로 이메일이나 몇 번 교환하다가 시나브로 그것조차도 끊어져 버린 사람이 십삼 년여 만에 느닷없이 연락이 왔다. 보고 싶다고, 나를 보고 싶다고, 이런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 몇이나 있을까마는, 어쨌든 나는 깊은 생각도 없이 그냥 오라고 했다. 내가 서울로 너를 보러 갈 입장은 아니고, 네가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고창으로 오라고 했더니 정말로 와버렸다. 그것도 한 달이나 열흘, 아니 일주일 정도의 여유도 없이, 최초의 전화통화가 이루어진 지 사흘, 그래, 사흘이었다. 단 사흘 만에 그녀가 내 집으로 와버렸다.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혼자가 되어버린 남자에게, 남자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그녀가 들어와 있어 버린 것이었다.



# 엄마와 언니가 보내주신 온갖 먹을거리들


해는 이미 졌고, 밤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은 명약관화이고, 과거에 딸랑구니 아방이니 하는 호칭을 썼다고는 하지만 저는 여자요 나는 남자, 이게 뭐냐. 도대체 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한단 말이냐, 등등 그런 막연하고도 두려운 어떤 그림자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과메기 오합이니 엄마표 초고추장이니 하는 문제가 온전한 문제로 작동한다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송함이 마땅하겠지만, 나는 그런 대단함의 경지는커녕 언저리에도 못 미치는 장삼이사 가운데 하나인 남자. 어쩔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진지하고도 태연한 관심으로 과메기 오합을 논할 것인가 말이다.

“자, 보세요. 이것을 이렇게 들고, 이것을 이렇게 얹어서….”

그녀는 사등분으로 잘라놓은 돌김 한 장을 들고 그 위에 쪽파 두세 쪽을 얹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었다. 그 위에 다시 물미역을 얹었고, 물미역 위에 역시 5센티 길이 정도로 자른 과메기를 얹고, 과메기 위에 초고추장을 아낌없이 듬뿍 쳤다. 그리고는 돌김을 말아 덮어서 마치 초밥처럼 만든 다음 내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것을 내가 손으로 받아서 먹었는지, 입으로 직접 받아먹었는지는 지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여튼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먹고 난 뒤에 내 입에서 절로 나온 한 마디만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아하? 이것 참 별미네?”

그것이었다. 별미. 비린내가 입안을 가득 채울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없이 입안을 뭔가 향기로운 것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씹고 있을 때의 그 감각, 식감이 참으로 이채로웠다. 매콤한 쪽파와 부드러운 물미역과 바삭바삭한 돌김의 섞임 내지는 조화 위해 더해지는 초고추장의 새콤달콤 알싸한 맛에 또 한 번 더해지는 과메기의 물렁하면서도 제법 단단한 그 식감을 굳이 문자로 표현하자면 가히 황홀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미식가는 아니었다. 어디의 무엇이 기막힌 맛을 낸다는 소문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취미도 없었고, 시장에서 식재료를 구입할 때도 상하지만 않았다면 그냥 이거 주세요, 할 뿐 요모조모 뒤집어보고 엎어보고 따져보는 감식안도 없었다. 굳이 부언을 하자면 음식과 종교에 관한 한 나는 공자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편이었다. 사람이 귀신을 지나치게 믿으면 몽매에 빠지고, 지나치게 무시해버리면 경망해진다고 했던가. 이 말과 짝을 이루는 공자의 음식 이야기에 따르면 군자는 밥을 먹되 맛을 따지지 않는단다. 요컨대 사람이 음식을 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불가피함이어야지 각종 살생이 전제되는 미식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는 불교와 도교에서 주창하는 생철학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공자의 방식을 흉내 낸다거나 그 사상을 따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밥맛을 따지기보다는 굶지 않는 것을 당면목표로 삼고 살아온 탓인지 어째서인지 나는 미식에 대해 아는 것도 전혀 없었고 흥미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뭔가가 맛있으면 아하 맛있네, 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 맛을 찾아서 백리 길도 마다않고 찾아간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내 삶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지 않았다면 과메기도 아마 그날 그 한 차례의 포식을 끝으로 시나브로 잊히고 말았을 터이었다.



# 이것이 과메기의 정석이라는데...


그런데 그녀는 내 옆에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차례 과메기의 계절이 왔다. 그녀가 서울에 있을 때는 포항에서 보낸 과메기가 서울로 갔지만, 그녀가 전라도 고창에 와 있는 오늘날의 포항산 과메기는 전라도 고창으로 왔다. 김수복씨댁 누구라고 적힌, 온갖 먹을거리가 차곡차곡 쟁여진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가 배달되었다. 과메기와 물미역을 필두로 물오징어와 건오징어에 알탕 재료에 초고추장에 심지어 김치까지, 혹시라도 터질까 물이 샐까 알뜰하고도 살뜰하게 꼭꼭 싸맨 그것들을 나는 보는 것만으로 숨이 차고 가슴이 먹먹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지 엄두를 낼 수도 없건만, 그녀는 아주 익숙하게 척척 잘도 풀어 헤쳐서 정리해내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그런 일에 아주 익숙해 있었다. 서울생활 내내 거의 모든 반찬거리를 그녀는 그렇게 택배로 받아왔다. 심지어는 사골을 고아서 비닐봉지에 일인분씩 담아 수십 개를 얼려 보내면 냉동실에 넣어두고 밥 먹을 때마다 불에 데워 먹어온 사람인 것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그날도 과메기를 맛있게 먹는 방식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과메기는 함부로 아무렇게나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석을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정석은 누가 정립했는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초석을 닦았고, 언니들이 기둥을 세웠으며, 그녀 자신은 어디를 가건 열심히 그 정석을 설파한다. 그리하여 과메기를 먹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쪽파와 물미역 그리고 김을 준비해야 한다. 김은 돌김이 최선이고 돌김이 없다면 차선으로 파래김이라도 괜찮긴 하지만 미역은 반드시 동해안 것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초고추장. 

“초고추장은 우리 엄마 꺼가 아니면 안 되거든요. 다른 건 못 먹어.”

그녀는 그런 얘기를 마치 보편적인 진리처럼 말하고 있었다. 참 대단하다. 사람의 입맛은 엄마의 품에 있을 때 결정된다는 누군가의 말이 그렇게도 실감나게 와 닿을 수 없었다. 나는 차마 그런 생각을 입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혼자서만 내심 시큰둥해 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뭐가 어떻게 돼버린 것인가.

내 안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주장하는 예의 엄마표 초고추장에 나도 어느새 길이 들여져 버린 것인지, 다른 초고추장은 도대체 맛이 없어 못 먹겠다 싶은 것이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그럴까? 다른 사람도 예의 엄마표 초고추장 맛을 보고 나면 다른 초고추장은 맛이 없어 못 먹겠다는 마음이 될까? 나는 이제 그것이 궁금하다. 언제 누구를 상대로 실험을 해볼까 하는 설레는 마음조차도 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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