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17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입이 말썽의 근원이다. 모든 화의 원인 말이다. 가장 좋은 대화법은 침묵하고 들어주기. 하지만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 모임에서는 그렇지 않다. 침묵한 채 생글생글 웃고만 있으면 무시당하기 십상. 모두들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려 수다 경쟁에 뛰어들다보니 말이 길어지고 필요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유언비어가 넘실대지만 진실을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그렇게 만들어진 괴소문은 아줌마들의 입을 통해 부풀어지고 커져서 지역사회를 돌고 돈다.

불쌍한 피해자. 하지만 동정할 겨를이 없다. 다음번 소문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가해자 집단에 속해 있어야 한다. 다음번 학부모 모임에 빠지는 순간, 내 아이와 내가 타깃이 될 지도 모르기에…. 학부모 모임.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쓴 약이다.

지난 주말 나는 고대하던 학부모 모임에 첫 데뷔를 했다. 딸의 유치원 오리엔테이션 날, 같은 어린이집 출신 엄마들끼리 모여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운동화를 신을까, 부츠를 신을까? 화장을 하고 나갈까? 장신구도 해야 하나? 나는 소개팅을 앞둔 처녀 마냥 긴장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엄마들은 서로 간의 교류가 어느 정도 있었던 상태에서 내가 신입생으로 처음 데뷔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날을 위해 한두 달 전부터 많은 공을 들였다. 먼저 핸드폰 SNS를 통해 엄마들과 인터넷 상에서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다른 엄마들이 좋은 데 놀러가거나 외식 나가서 먹은 음식 사진들을 올릴 때마다 “어머나~ 멋져요~”라며 호들갑 떨며 댓글을 달았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아이들의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어머~ 누구는 얼굴도 예쁘고, 키도 커서 옷발이 잘 사네요~”라며 마음에 없는 거짓 칭찬을 해댔다.

다른 엄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SNS를 넘나들며 칭찬으로만 도배된 댓글을 달았다.

원래 나는 엄마들의 모임에서 열외 대상이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 때문이었다. 2~3년 전부터 어린이집을 오가며 얼굴을 봐 온 엄마들. 하지만 엄마들 중 나에게 연락처를 물어오거나 밥을 한 번 먹자고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어린이집 행사 때 만나면 우리 아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의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이 상황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딸의 담임선생님은 요즘 대세 배우로 떠오른 20대의 김우빈에게 푹 빠져 있었다. 연예부 기자인 남편이 김우빈을 인터뷰하기로 한 날, 나는 남편에게 부탁해 선생님 이름으로 사인을 한 장 받아오라고 시켰다.

너무나 감격한 선생님은 자신의 SNS에 김우빈 사인을 올리며 우리 남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사인을 본 어린이집 학부모들. 드디어 알았다. 우리 남편이, 우리 딸의 아빠가 기자라는 사실을.

쥐꼬리만 한 박봉에 업무량만 많은 직업이 기자라는 사실을 알 턱없는 아줌마들은 “누구네 아빠가 기자래?” 그러면서 열광했다. 친하게 지내자는 연락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를 자기들의 SNS에 초대하고, 그러다가 점심식사를 하기로까지 연결이 된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들과 SNS로 연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세 배우인 이민호와 인터뷰 약속이 잡힌 남편. 나는 SNS에 공지를 올렸다. “우리 남편이 이민호 인터뷰를 해요. 사인 필요하신 분은 미리 말해주세요.”
엄마들은 열광했고, 너도나도 신청을 했다. 덕분에 우리 남편은 취재원인 이민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아줌마들의 이름이 적힌 사인 6장을 받아왔다.

그 일로 나와 내 딸의 주가가 상한가를 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 엄마들은 빨리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부담스러운 자리였기에, 나는 모임에 앞서 이 옷을 입어봤다 저 옷을 입어봤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한껏 멋을 내고 나간 자리. 약속 장소는 피자 가게였다. 엄마들은 이곳에서 피자와 스파게티와 맥주를 마셨다. 다행히 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다. 내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동갑내기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내 여동생 또래쯤 되는 엄마들이었다.

대화 내용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아이들 교육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른 엄마들의 뒷담화도 봇물을 이뤘다. 주로 자기 아이와 불편한 친구관계에 있는 아이의 엄마가 안주거리가 됐다. 아이의 성격이나 행동을 욕하면서, 아이를 그렇게 키운 엄마를 같이 욕하는 것이다.

아이한테 스마트폰을 사준 한 엄마는 ‘개념 없고 생각도 없는 여자’가 됐다. 중국 사람인 한 엄마는 ‘자식을 망나니로 키우는 여자’가 됐다. 아이한테 간장에 비빈 밥을 준 한 엄마는 ‘집에서 낮잠만 자는 게으른 여자’가 됐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뜨끔했다. 우리 딸이 밥을 안 먹을 때마다 나도 간장에 참기름만 넣고 비벼줬었기에.

그러나 이 날의 주인공은 혼자서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었다. 예린이(가명) 엄마는 싱글맘이었다. 평소 예린이가 반 친구들과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곤 해서 나도 담임선생님과 우리 딸 문제로 상담을 하던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예린이 엄마가 싱글맘이라는 건 지켜줘야 할 비밀 같은 것. 나는 다른 엄마들에게 그 사실을 발설할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날 모인 엄마들은 달랐다.

가장 기가 세고 말이 많은 한 엄마가 느닷없이 폭탄을 터트렸다. “근데 예린이 엄마가 미혼모인 건 다들 알고 있죠?”. 싱글맘이라 해도 놀랄만한 일인데, 느닷없이 미혼모란다. 더러는 알고 있었고, 더러는 몰랐던 사실. 처음 그 사실을 안 엄마들은 흥분하며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말이 많은 엄마가 얘기를 이어나갔다. 예린이 엄마가 미혼모인데 행실이 아주 안 좋다며, 심지어 남자친구와 모텔에 갈 때도 예린이를 데리고 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예린이는 여섯 살임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삶에 지친 중학생 같다고 했다.
헉. 그게 사실일까? 아니 사실이라 한들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을까?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아이가 자기 입으로 그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세세히 다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예린이 엄마가 담임선생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무엇이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어머 어머”하며 펄쩍 뛰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예린이가 어린이집에서 한 남자아이랑 뽀뽀도 아닌 혀가 오가는 키스를 해서 선생님에게 제재를 당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물론 나중에 내가 선생님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본 결과 예린이는 남자아이와 키스를 한 적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 모인 엄마들은 앞 뒤 생각지도 않고 그저 예린이 엄마를 질겅질겅 씹어 먹기 바빴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서서 욕을 하지는 않더라도, 놀라고 화나는 척을 하며 엄마들의 반응에 동조했다. 거기서 혼자 고고한 척 했다간 이 다음 타자가 내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간 뒤 모임이 끝났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왔다. 한숨도 나고 웃음도 나고 기분이 그랬다.

물론 그 날 모인 엄마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깊이 알아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하고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다만 서먹한 아줌마들끼리 모여 친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쉬운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의 뒷담화를 하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용되어질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학부모 모임에 참가한 소감을 고교 친구들에게 말하고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누구도 뚜렷한 해답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적당하게 동참하라고만 했다. 모임에 안 나가게 되면 그 피해는 우리 아이에게 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너무 모임에 얽매이면 그 또한 피곤해질 것이라 했다.

이런 현상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잠실에 사는 한 친구는 엄마들의 말이 너무 많아서 빨리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했다. 반면 용산에 사는 한 친구는 용케 마음 맞는 엄마들과 잘 사귀게 되어서 가족전체 모임도 하는 등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제 막 학부모 모임에 첫 발을 뗐다. 첫 모임에서 느낀 건 아줌마들의 무서움. 그렇다고 이제 와 발을 빼고 나홀로 행보를 할 수는 없다. 다음 모임은 2월 초순 경에 갖기로 했다. 그때는 또 누가 도마에 오르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갈까. 일단은 지켜봐야겠다. 관찰자의 자세로.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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