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21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나누고 사는 삶이 무엇인지 이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눈다? 글쎄.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것?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나눔의 방식이었다.

이웃과의 교류? 그것도 마찬가지. 그 귀찮은 걸 왜 해. 서로가 서로에게 참견 안 해주는 게 오히려 미덕 아닌가?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해야지.

강남의 좋은 동네 좋은 아파트에서 30년을 사는 동안 이웃이라곤 없었다. 바로 앞집 사는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종종 마주쳤기 때문에 인사를 했지만 그 뿐이었다. 말을 건넨 적은 없다. 그건 그 쪽도 마찬가지. 이웃에게 전할 모든 말은 경비 아저씨를 통해서 이뤄졌다.

이웃하고는 단절돼있고 기부만을 나눔의 방식으로 알던 30대 여성. 그게 결혼 전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40대를 눈앞에 둔 지금 나는 참 많이도 변했다.

10년 전의 내가 봤다면 경멸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지금의 나는 이 삶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삶의 모습이 10년 전의 삶보다 더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 북쪽의 한 서민 동네다. 결혼을 앞두고 예비 시부모님 댁에 인사를 하러 처음 이 곳을 찾았을 때 “서울에도 이렇게 시골 같은 동네가 있구나”라며 깜짝 놀랐다.





신혼집을 구했다는 예비 남편의 말. 시댁에서 3분 거리에 있는 빌라 3층이란다. 아파트도 아니고 시댁에서 가깝지만 상관없었다. 전세 기간 2년만 살고난 뒤에는 시내에 있는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갈 것이라 생각했다.

미숙아 쌍둥이가 태어나고, 아이들 병원비만 1200만원이 나왔다. 이후에도 계속 되는 각종 검사로 돈이 술술 빠져나갔다. 시내에 있는 아파트는커녕 매달 먹고 살기도 빠듯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시댁 바로 앞 빌라가 신축공사를 해서 분양하고 있는데 거기로 이사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3년 간 우리 부부가 모은 적금 액수는 4천 만 원. 나머지 돈은 어머니가 내주신단다. 신혼집보다 더 좁아지고, 시댁 바로 앞집이지만 전세살이를 벗어나 자가 주택자가 될 좋은 기회였다. 두 말 않고 “네 갈게요” 했다.

시댁과 가까이 살면서 폭탄이 터졌다. 이전의 3분 거리는 천국이었다. 시댁도 3층, 우리집도 3층. 창문을 통해 서로의 집안이 보였고, 시댁의 전화벨 소리가 우리 집 거실에서 들렸으며, 우리 부부의 싸움 내용을 시부모님이 고스란히 들었다. 
시어머니가 미워졌고, 우리 집도 싫어졌다. 이곳에서 40년을 산 시어머니. 이곳에서 10년 넘게 부녀회장을 지낸 시어머니.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 많은 동네 사람들이 나를 알았다. 내가 지나가면 자기들끼리 “김회장 막내 며느리”라고 쑥덕였다. 

이 동네를 미워했다. 이 동네를 싫어했다. 여기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사는 곳이라 생각했다. 나는 길을 잘못 든 이방인이었다. 친정에 며칠씩 가 있다 다시 집에 올 때면 숨이 콱 막혔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시댁과 우리 집이 보이는 순간, 이 동네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이 동네의 모든 것을 미워했고,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다. 슈퍼를 가도, 약국과 병원을 가도, 책방과 동사무소를 가도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같은 빌라에 사는 사람들끼리 여러 번의 친목모임이 있었지만 애들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렇게 가난한 동네, 어차피 난 어울리지 않았어.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이 동네의 모든 것에 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흘렀다. 어찌됐든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커간다. 아이들이 커가자 여유가 생긴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달라진다. 고부 갈등이 해소되자 동네를 돌아다니면 숨이 막힐 것만 같던 기분도 사라진다. 

마음이 평안해지자 시야도 넓어진다. 이전에는 나 자신만 바라봤는데, 이제는 내 아이의 친구들도 보게 되고 아랫집 동생, 윗집 언니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깨닫게 됐다. 내가 어느덧 이 동네의 일원으로 완전히 동화 돼 살고 있다는 것을. 방황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마치 공기 중에 노을이 스며들 듯 완전한 한 명의 동네 주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놀러온 친정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서 슈퍼에 가던 어느 날이었다.

집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만난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 인사를 하고 딸에 대해 몇 마디 수다를 떨고 헤어졌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기도 전에 아이를 데리러 온 딸 친구의 엄마를 만났다. 역시 인사를 하고 몇 마디 수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인사 말.

이제 막 골목을 빠져나왔을 뿐인데 또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라고. 골목 끝에 있는 까치분식집 아줌마에게. “아이들은 잘 있죠?”라는 말에 “네 그럼요”라고 대답한다.

건널목을 건너려 하는데 나에게 눈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아가씨. 애들 다니는 소아과의 간호사다.





신호등이 바뀌고 건널목을 건너는데 정차 중이던 오토바이에 탄 아저씨가 “안녕하세요”라며 아는 척을 한다. 책 대여점 아저씨다. 매일 오토바이로 집과 일터를 오간다. “베가본드 신간 나왔어요”라는 말에 “좀 이따 들릴게요”라고 말하며 갈 길을 간다.

이번에는 저 멀리 할줌마(할머니와 아줌마 사이) 한 부대가 보인다. 이 동네 할줌마는 십중 팔구 시어머니 친구들이다. 머리를 매만지며 계속 걸어 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안녕하세요”라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한꺼번에 “어머나~”하며 반기는 어머니 친구들. 아이들 안부, 남편 안부를 정신없이 묻고는 근처 있던 요구르트 아줌마에게 요구르트를 왕창 사서 손에 쥐어 주신다. 아이들 먹이라고. “고맙습니다” 한 뒤 제 갈 길.

아직 끝이 아니다. 집에서 슈퍼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 나는 이후로도 교대하러 가던 편의점 아줌마, 딸 친구의 할머니, 퇴근하던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 등과 더 인사를 나눈 뒤 슈퍼에 도착했다.

집에 오는 길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집에 도착해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래층 사는 언니와 조우. 10여 분 간 수다를 떨고야 헤어진다.

그 때 알았다. 나는 더 이상 이방인도 혼자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토록 싫어하던 이 동네의, 지역사회의 일부로 이미 이들과 어우러져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그랬다. 내 마음이 바뀌고 시야가 바뀌자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웃과 함께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남편 욕, 시어머니 욕을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 교육 얘기를 하며 고민을 했다. 집에서 갓 만든 음식이 수시로 배달돼 왔고, 요리를 잘 못하는 나는 받은 접시에 사과나 우유, 새송이 버섯 등을 담아 다시 돌려보냈다.

내 생일을 어떻게 알고는 윗집 언니가 호두케이크를 선물로 줬다. 나는 선물로 받은 프랑크소세지 3팩을 가지고 윗집 초인종을 눌렀다.

저녁에 고등어조림을 하는데 간장이 떨어졌다. 6스푼을 넣어야 하는데 탈탈 털어도 두 스푼밖에 안 나온다. 이전 같으면 남편이 사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이제는 고등어가 든 냄비를 통째로 들고 아랫집 초인종을 누른다. “간장 4스푼만 뿌려줘~”.

딸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도 한결 편안해졌다. 전에는 학부형을 대하는 불편함이 계속 있었는데 이제는 그들 역시 동네의 아줌마일 뿐이라는 걸 안다.

내가 편해지자 그들도 내가 편해졌나 보다. 요리를 잘 못해먹고 산다는 걸 알고 나더니 시레기 된장국, 코다리 조림 등을 해서 집 앞까지 갖다 준다. 빵도 구워서 보내주고, 귤도 먹으라고 보내온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친정 엄마는 깜짝 놀란다. 아직도 친정엄마는 이웃과 단절된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동네 주민과 음식을 나누고 수다를 떠는 이런 삶을 신기해한다.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래. 분명 처음에는 불편했다. 남이 내 사생활을, 우리 가정사를 아는 게 싫었다. 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내 사생활, 평범한 가정사. 터놓고 나니 숨길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웃들과 함께 무언가를 주고받는 삶을 살면서 나는 마음이 더 편해졌다. 좀 더 행복해지고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언젠가 시내의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가겠다는 꿈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도 그리 나쁘진 않다. 중산층보단 좀 더 가난하고 아파트보단 좀 더 작은 빌라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 강남의 잘 사는 사람들처럼 혼자서도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나누고 사는 사람들. 나는 이곳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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