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17회-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3편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호엔잘츠부르크 성 아래에 위치한 카피텔 광장

 

유럽의 여러 관광 명소에는 소매치기가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여행객이 몰리는 몇몇 명소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눈 뜨고 코 베인다’고 여겨질 만큼 관광객을 상대로 한 빈번한 소매치기 사건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필자의 친구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어느 광장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이 20만원을 소매치기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지갑을 털린 것이다. 너무도 어안이 벙벙했던 그는 한동안 선채로 그저 돌이 되었다나.

“말도 마. 광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어느 틈에 지갑이 털렸는지 모르겠어. 세상에나, 돈을 잃은 것도 아까웠지만 소매치를 당했다는 사실에 어찌나 무서웠는지 몰라. 아는 한국인이라고는 민박집 밖에 없어서 대처 방법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는데 너무나 냉랭하게 알 바가 아니라고 하더라. 그런 일이 너무 빈번해서 그런가? 아무튼 알아서 조심할 수밖에 없겠더라고.”

숙소에서 밤이 늦도록 이어진 처자들과의 수다 중에, 한 사람이 이런 말도 이어갔다. “집시들이 동양인에게는 구걸을 안 하더라”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표를 사려고 줄을 서고 있었는데 집시들이 앞에서부터 뒤로 구걸을 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저와 함께 동양인이 몇 명 서 있었는데 집시들이 우리 앞에서 멈칫 하더니 그냥 휑하니 가버리더라고요. 참나, 무시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던데요. 거참, 다시 생각해도 자존심 상하네!”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인 미라벨 정원

 


‘드르륵.’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대생이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왔다. 새로운 투숙객이었다. 어느덧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이렇게 늦은 때에 어두컴컴한 길을 뚫고 숙소를 찾아왔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그의 표정 또한 영 좋지가 않았다.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다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자, 그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지금 독일에서 오는 길이에요. 밤늦게 기차역에 혼자 있었는데 정말 무서워서 죽을 뻔 했어요.”

그가 울음 섞인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오나치’라고 그러나요? 기차역에 세 남자가 있었는데 주변 머리카락은 밀고 가운데만 쭈뼛 세운 모양의 머리에 가죽점퍼를 입은 모습이 네오나치 같았어요. 기차역 플랫폼에서 한참이나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먼발치에 있던 그들이 제 벤치 쪽으로 다가오더군요. 그러더니 한 명은 제 옆에 앉고 다른 두 명은 주변을 에워싸더니 저를 보며 낄낄 거리는 거예요. 5분쯤 지났을까. 그때부터는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욕설 같은 것을 했어요. 심지어 제 머리카락을 만지고 흔들기까지 했지요.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잘못 저항했다가는 더 큰 변을 당할 것 같고….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그렇게 한참을 벌벌 떨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한 한국 언니가 달려와서는 큰 소리로 화를 내며 그들을 쫓아냈지요. 그 언니 덕분에 살았어요. 모르는 언니 옆에서 한참이나 울다 왔어요. 그 분 아니었으면 어찌되었을까 싶어 지금도 소름이 돋아요.”

 


#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바라본 잘츠부르크의 모습

 

그는 좀처럼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다. 거실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한 20여분 흘렀을까. 그가 드디어 울음을 거두고 안도의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다시금 유럽여행 중에 겪었던 여러 가지 소회들로 이어졌다.

“볼 것 많고 즐길 것이 많아 참 좋다”는 이야기도, “아기자기하고 예쁜 중세의 풍경들도 날마다 보니 감흥이 떨어지더라”는 생각도 있었다. ‘감흥’에 대한 이야기 끝에는 “맞아”, “그렇지”라는 맞장구가 이어지기도 했다.

“뿌리가 비슷하다보니 이 나라에서 저 나라를 가도 비슷한 풍경일 때가 많아요. 유럽은 성당, 박물관, 광장 밖에 볼 게 없는 듯해요.”

“무엇보다 밖에 나와 보니 내 나라가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어요. 화장실 같은 다중이용시설을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다는 점도 좋고 지하철이나 버스 등 교통시설이 엄청나게 편리하다는 것도 알겠더군요. 각종 편의시설도 도처에 널려있고. 참 지하철에서도 와이파이가 터지잖아요. 유럽에서는 안 되는 곳이 너무 많고 되더라도 느려서 답답해 죽겠어요.”

이야기 끝에 사람들은 또 한 번 손뼉을 마주치며 입을 모아 “맞아”라고 합창을 했다. 수다는 거실 소등 시간인 오후 11시를 30분이나 더 넘기고서야 막을 내렸다. 주인의 제지가 없었더라면 밤새 이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노란색 집이 작곡가 모차르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실 숙소에 들어왔을 때, 여기저기 붙어있는 여러 장의 경고문구 때문에 다소 언짢았던 터였다. 마치 규율이 엄격한 합숙소나 기숙사에 들어선 것처럼 벽면마다 ‘주의’, ‘경고’, ‘하지 말 것’ 등의 문구들이 나부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내심 기분이 상했었는데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분 전환과 분위기 반전. 즐거운 소통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이날 나누었던 대화가 어제 했던 수다처럼 생생했다. 또 즐거운 수다 덕분에 그때의 숙소가 나쁘게 기억되지만은 않았다. 내가 처한 환경이 최악이라고 생각되었다가도 마음을 달리 먹고 생각을 고쳐먹기에 따라서 어느 순간에는 최고가 될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떠올리는 계기였다. 관점의 전환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올 수도 있다.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각자의 침대에 누워 하루를 조용히 마감하는 중이었다. 필자도 수첩을 꺼내 놓고 일일 경비사용 내역과 일기를 끼적였다.

 


# 잘츠부르크 구시가 풍경

 

직장에 사표를 내고 6개월 예정으로 유럽 전역을 돌고 있는 건너편 침대의 처자는 장기여행에 걸맞게 가져온 짐도 참으로 다양했다. 계절별 옷은 물론이고 헤어드라이기, 전등, 등산용 소품 등 다양했다. 그 다채로운 짐에 깜짝 놀랐는데 정작 그는 필자의 전기 주전자를 보고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걸 뭘 여기까지….ㅋㅋ”

물 값을 아껴보겠다며 전기 주전자와 보리차 티백을 싸들고 온 필자를 보며 별일이라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뭐 어찌되었든, 전기 주전자는 보리차를 끓여 먹는 것 외에도 여행 내내 실로 여러 곳에 알차게 쓰였더랬다. 참으로 기특한 녀석이다.ㅎㅎ

건너편의 그는 여전히 여러 짐들을 정리하느라 꽤나 분주해 보였다. ‘내일,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할슈타트로 갈 참이나 분주한 주변일랑 신경 쓰지 말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