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18회-오스트리아 할슈타트 1편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할슈타트 역으로 향하는 기찻길 풍경



밝고 경쾌한 ‘도레미 송’으로 기억되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마음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명화다. 주인공 마리아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뛰어놀던 푸르른 자연은 여전히 한 폭의 유화처럼 또렷하다. 배경이 되었던 성당과 대저택의 모습은 어렴풋하지만 그래도 아예 지워지지는 않는다.

영화의 줄거리보다 더욱 가슴 깊이 각인된 이런 무대들은 오스트리아 빈과 잘츠부르크 사이에 위치한 잘츠카머구트가 배경이다. 잘츠카머구트는 알프스산맥과 수십 개의 호수를 안고 있는 아름다운 장소다. 이 중에 특히 아름답기로 손가락 꼽히는 호수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할슈타트다.

할슈타트에 가기 위해 잘츠부르크 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트낭푸하임 역으로 향했다. 아트낭푸하임 역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야 목적지인 할슈타트 역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여정인데도 그만 기차를 내리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했다.

‘시간상으론 대충 이 때쯤 내려야할 것 같은데…. 아직 멀었나?’ 긴가민가하고 있던 찰나, 방송에서 “할슈타트”라는 외마디가 흘러나왔다. 단어는 두 번 반복되었다. 순식간이었다. “(띠리리링) 다음 내리실 역은 서울역, 서울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새마을호나 무궁화호처럼 문장으로 완성된 긴 안내 말을 기대했던 필자는 군더더기 없는 굵고 짧은 외마디에 ‘설마’하는 의심을 품었다. ‘성의 없이 단어 하나 내뱉었을 뿐인데, 설마 여기가 내려야할 곳일까?! 에이, 그럴 리가!!!’(굵은 외마디 방송이 나오기 몇 분전 혹은 몇 초전에 친절한 안내 멘트가 나왔는데 필자가 놓쳤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의심을 품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내리는 사람도 몇 명 없었다. ‘현지인에게도 유명한 관광지인데다가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명소인데 내리는 사람이 저렇게 없을 리가 없지! 여긴 아닌 모양이다.’

방송에 놀라 의자에서 등을 떼고 종긋 귀를 세웠던 필자는 다시금 의자에 몸을 바짝 붙였다. 기차가 경적을 멈춘 지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바퀴 구르는 소리가 산속의 정적을 깨웠다. 영 찝찝한 마음에 기차 바깥을 내다봤다. 맙소사! 아까는 보이지도 않던 아주 작은 간판에 ‘할슈타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간이역 수준의 작은 기차역에 열차가 멈추어 있을 때는 눈에 띄지도 않던 간판이 이제야 정확히 시야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약간이라도 의심이 들었을 때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어야 했었을 것을….




# 기차역 앞에서 5분 가량 배를 타면 할슈타트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 호수를 포근히 감싸 안은 듯 산으로 둘러싸인 할슈타트. 할슈타트는 소금광산으로 유명하다.



낙담하고 있는 사이, 기차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다음 역을 향해 질주했다.

다음 역에서 내려 할슈타트로 가는 기차 시간을 물었는데, 그걸 기다렸다가는 오늘 관광은 포기해야할 판이었다. 자연경관도 관람하고 맑은 공기를 들이키며 운동이나 하자는 생각에 걷기로 결심했다. ‘조금만 걸으면 되겠지.’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10분, 20분, 40분을 걸어도 할슈타트 역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코로 들이키는 맑은 공기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냥 좋았던 처음과는 달리, 이쯤 되니 달리 감흥도 없었다. 다리가 풀리고 꼬여 몇 번씩 벤치에 주저앉을 뿐. 의심을 하고도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 굼뜬 발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더욱 괴로운 것은 잠시라도 앉아 있으려고 하면 벌 대여섯 마리가 필자를 에워싼다는 것이었다. 벌에 쏘이는 낭패를 당하는 것은 아닐지 두렵기까지 했다. 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잰걸음으로 벌의 무리를 헤치며 걸은 지 어느 덧 50여 분. ‘여기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조그만 역이 멀찍이 눈에 띄었다. 간판을 붙들고 눈물의 재회라도 할 판이었다.

어렵게 다시 온 할슈타트 역의 아래쪽으로 내려가 호수를 가로지를 페리 티켓을 구입했다. 왕복 4.40유로였다.

배를 타고 가로지르는 할슈타트의 풍경은 수려했다. 호수를 포근히 감싸 안은 듯 사방을 둘러싼 산과 물 위에 옅게 피어오른 물안개가 몽환적인 그림을 만들었다. 산과 호수의 경계에 들어선 집들은 동화 속에서 금방 툭 튀어나온 것처럼 어여뻤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이 예쁜 물감으로 그린 수채화 같았다. 어린 시절 스케치북 위에 집과 호수, 나무가 있는 풍경을 꽤 자주 그렸었는데 또렷하게 생각나진 않지만 아마도 붓질을 시작할 즈음엔 머릿속으로 이런 느낌을 떠올렸던 것 같다.

배를 타는 내내 외딴 산 속에 갇힌 것 같은 고요함이 느껴졌는데 이제까지 북적북적하기만 했던 동네와는 몹시 다른 느낌이어서 마냥 흡족했다. 한편으로는 이 풍경이 낯설지가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의 유명 관광지마다 우후죽순 들어선 유럽식 펜션 마을이 오버랩 되었다. 산이나 강을 끼고 들어선 펜션에 갈 적마다 규모나 감동의 파고만 지금과 달랐을 뿐 대체로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처음 이런 펜션을 접했을 땐 외관에 놀랐으나 가는 곳마다 비슷하다고 여겨진 뒤부터는 ‘왜 한국식은 없을까. 어째서 죄다 유럽식만 좇을까’ 싶은 생각에 참으로 아쉬웠는데 말이다. 








# 산과 호수의 경계에 들어선 집들이 한편의 동화와 같다. 마을은 1997년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배를 타고 당도한 마을은 조용함 속에 활기가 넘쳤다. 동네 자체는 고즈넉했으나 수많은 관광객의 분주한 움직임 탓인지 흥겨운 분위기였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언제 온 거지? 할슈타트 역에서는 내리는 사람이 안 보이더니만.’ 고개를 갸웃하며 광장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광장 주변에는 삼각형 지붕 모양의 파스텔 톤 옷을 입은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집들마다 창문에 예쁜 꽃을 장식해 아기자기한 멋을 더했다.

광장 뒤에 펼쳐진 골목을 따라 거닐었다. 경사를 깎아 세운 마을은 어느 곳을 가나 차분한 운치가 흘렀다. 수많은 관광객들로 복닥거리는 와중에도 골목 깊숙이 베인 느림의 미학이 오롯이 전달되었다. 분위기에 도취돼 느릿한 거북이걸음을 걸었고 이 보다 더 느린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뿜으며 1초를 1분처럼 느리게 흘려보냈다. 눈앞에 펼쳐진 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동화 속 어느 마을쯤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묘한 착각이 일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보니 갖가지 기념품 가게가 눈에 띄었다. 골목 하나를 가득 메울 정도로 기념품 상점이 꽉 찬 곳이었다. 소금광산에서 나온 소금결정체와 소금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반짝 반짝 빛을 뿜으며 관광객을 맞이했다.

할슈타트는 소금광산으로 유명하다. 광산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다흐슈타인 산에 오르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광산에 들어가면 역사와 함께 소금 채굴 기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마을과 광산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 해골 전시관도 유명하다.

할슈타트 마을은 1997년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할슈타트 2편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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