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20회-슬로베니아 류블랴나 1편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류블랴나 강 용의 다리. 용은 류블랴나의 상징이다.


기차가 경적을 울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주춤하더니 이윽고 슬로베니아 국경에 접어들었다.

슬로베니아는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발칸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가운데 하나였다가 유고연방 해체 이후 내전을 거치며 독립을 이루었다. 유고연방 시절부터 경제규모면에서 앞서 있었다. 면적은 한국의 5분의 1 정도.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기차가 잘츠부르크를 떠난 지 4시간 30분가량 지나 드디어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휴~.’ ‘류블랴나’라고 적힌 기차역의 커다란 글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이 새나왔다. 잘츠부르크를 떠날 때 객차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저 글자가 아닌 새로운 글자 앞에서 냉가슴을 앓을 것이 불 보듯 뻔 하니 말이다.

그러나 진짜 고행은 이제부터였다.

잘츠부르크 숙소에서 만났던 한 청년은 필자와 반대의 경로로 이제 막 류블랴나에서 잘츠부르크에 왔다고 알렸었다. 그러면서 필자가 머물 류블랴나의 호스텔 위치를 설명했다.

“거기 정확히 알아요. 기차역에서 나오면 직각삼각형으로 생긴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삼각김밥처럼 생긴 건물인데, 숙소가 그 근처에 있으니까 일단 그 건물만 찾아가세요.”



# 류블랴나 성에서 내려다본 시내 모습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모처럼 헤매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에 들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기차역을 빠져 나오니 그의 말마따나 가장 먼저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이얏! 저거구나! 으하하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건물을 쫓았다.

그러나 이게 웬걸. 한참을 걷고 또 걸었으나 희한하게도 건물에는 닿지를 않았다.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점점 멀어지는 신기루가 이러할까. ‘이쯤 되면 건물 앞에 도착할 법도 한데….’

한 현지인에게 건물을 가리키며 길을 물으니 “생각보다 꽤 먼 곳”이라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렇게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한 참을 걸으니 이상하게도 건물은 더 먼발치에 위치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왔던 길을 다시 가란다. 뾰족한 수가 없어 몇 걸음을 되돌아가 새로운 사람에게 다시 길을 물었다. 그는 “오른쪽에서 왼쪽을 돌아 또 다시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버젓이 서 있는 저 건물이 진정 실사가 아닌 신기루인가?’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 정신을 차리니 어느 새 아까 왔던 그 자리였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어느 여행지든 지도하나 펴면 대체로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았었는데 이날은 무엇이 씌었는지 진정 길 맹꽁이가 따로 없었다. 

땡볕에 바퀴달린 가방을 끌며 다닌 지 근 1시간. ‘참나, 기차역에서 호스텔이 5분 거리라고 했는데, 삼각 김밥 같은 저 건물 따위 생각 말고 내가 직접 찾아가 보자.’




# 류블랴나 성으로 가는 길목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변 이름을 따라 쭉 걷다보니 호스텔이 위치한 거리가 나타났다. 숙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주소를 보여주며 얼마를 더 걸으니 저 멀리 호스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브라보!! 만만세!!’
호스텔 직원에게 열쇠를 받으며 하소연 하듯 물었다.

“대체 이 근처에 직각삼각형 건물이 어디에 있어요? 직각삼각형 근처에 이 숙소가 있다고 해서 기차역에서 나와 그것만 보고 다녔는데 아무리 걸어도 건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숙소 오는 길이 어찌나 복잡하던지 1시간 넘게 헤맸어요.”

“네? 우리 숙소는 기차역에서 엄청 가까운데요. 오른쪽으로 걷다가 왼쪽으로 돌아 또 왼쪽으로 걸으면 바로 나타나잖아요. 직각삼각형 건물 쪽으로는 아예 갈 필요가 없다고요.”

가슴 속에서 억울한 불덩이가 솟구쳐 올랐다. 화가 나고 분통이 터졌다. ‘나 참, 그 청년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을 했나?’

‘돕자고 한 건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되면서도 괜스레 그가 원망스러웠다. 더 따지고 보면 1시간이나 헤매면서도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청년의 말을 의심 없이 믿고 건물만 쫓았던 것은 오로지 필자의 선택이었다.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오류부터 짚어 나가는 것이 순서인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1시간이나 뺑뺑이를 돌았으니, 누군가를 탓할 재간이 못되었다.




# 류블랴나 시내



방에 들어와 지친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 내 자신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다. 한식 만찬. 아껴두었던 ‘햇반’에 참치와 김을 얹어 늦은 점심식사를 할 생각을 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여기서 맹꽁이 짓에 대미를 장식하고야 말았다. 이날은 그야말로 ‘맹꽁이의 날’인 셈이었다.

밥을 뜨겁게 데우기 위해 햇반을 비닐봉지에 담아 전기 주전자에 퐁당 빠뜨렸다. 그렇게 한 번 데운 뒤 조금 더 따뜻한 밥을 먹자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스위치를 당겼다.

그 후 10초, 20초…. ‘펑.’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물이 막 끓어오르려던 찰나, 주전자가 커다란 굉음을 터뜨리며 터져버리고 말았다. 주전자의 완벽한 이단 분리였다. 안에 넣은 봉지에 주전자 입구가 막혀 압력을 이기지 못해 폭발 했던 것이다. 일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머리가 ‘주뼛’ 하고 섰다. 방학 중에만 호스텔로 개조하는 이 학교 기숙사를, 필자가 홀랑 태워 먹을까봐 등짝에선 식은땀이 주르르. 정말이지 식겁하고 또 식겁했다.

‘한국인 여행객 무식한 조리법으로 학교 폭발.’ ‘학생들, 방학 끝나고 학교 오니 기숙사 증발해 황당’ 등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할 뻔 한 순간이었다. 허나 다행히, 몹시 다행히도 불은 나지 않았다. 밑이 빠진 주전자에서 조용히 물이 새나오는 것으로 사고는 일단락되었다. 정말이지 모든 신에게 감사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이었다.




# 호스텔 내부. 방학 기간 기숙사는 호스텔로 변신한다.


# 대형 사고의 주범외 될 뻔한 전기 주전자



기숙사 바닥은 이미 한강이었다. ‘한강이면 어떠랴, 아니 태평양이 된들 어떠하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기숙사의 다용도실에서 걸레 몇 개를 찾아와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방안 구석구석을 정갈하게 닦았다.

방을 정리한 뒤에는 분리된 주전자의 하단 부분을 매끄럽게 이어 붙였다. 전기선에도 이상이 없었다. 재탄생한 주전자는 이후로도 매우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 물론 햇반을 봉지 째 넣고 데우는 바보 같은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안전점검을 마친 뒤 류블랴나 성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류블랴나 성까지는 케이블카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갈 수 있는데 도보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숙소 직원의 말에 따라 도시 구경삼아 걷기로 했다.

아침부터 이어진 수많은 실수를 타산지석 삼고자 두 걸음 떼기가 무섭게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름 지름길이라고 알려준 길은 꽤나 으슥했다. ‘이 길이 진정 맞나?’ 의심을 지울 수 없을 만큼 소슬한 분위기. 동네 불량청소년이 하나 가득 모여 있을 것 같고, 덩치 큰 동물들이 예고 없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뒷산이었다. ‘아, 또 어쩌자고 이런 길로 빠졌을까 ㅜ.ㅜ’

<류블랴나 2편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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