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기억에 새기고 싶은 사람들



마당에 무꽃이 피어난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나 됐다. 그런데도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것처럼 싱싱하게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 세상에 피는 꽃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의연하게 자기 자신을 주장하며 피어 있는 꽃을 찾기로 하자면 아마도 무꽃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무와 비슷한 계열의 유채는 열흘 정도 먼저 피었다가 그새 져서 씨앗이 익어가는 중이다. 배추꽃 또한 피었다가 져서 씨방을 만들어냈고, 알싸하게 콧속을 확 뚫어주는 갓김치로 유명한 갓들도 역시 꽃을 피어냈다가 지고 있지만 무꽃은 아직도 의연하기만 하다. 물론 처음 피었던 꽃이 한 달씩이나 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 피었던 것은 씨방을 이미 만들어냈거나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위로, 위로, 무는 꽃대를 계속 키워가면서 단계적으로 꽃을 피어내는 한편 씨방을 만들어내고 씨앗을 익혀간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날씨가 무더워지면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부패되어 땅으로 돌아가겠지만, 밤이면 서늘한 요즘의 날씨로만 보자면 무는 영원히, 그야말로 영원토록 꽃을 피어내고 또 피어낼 것만 같다.

내게 있어 무꽃은 뭐랄까, 죽음과 삶의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래, 그것은 그 색깔부터 생김새까지 모든 것이 애리애리하기만 해서 한참 보고 있으면 그냥 눈물이 찔끔, 솟아난다. 그래서 보고, 또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그것은 조그맣고 또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아이들의 재잘재잘 재잘대는 소리로 변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무꽃



육 년 전, 집안의 당숙모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때 장지에서 본 무꽃의 깊은 인상이 아마 나로 하여금 마당에 굳이 무를 심어놓고 꽃 피는 계절을 기다리게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구차를 타고 온 관을 내려 하관을 했을 때, 벌써 전에 시집가서 아이들의 엄마가 된 누이들의 울음소리가 서러워서 잠시 외면을 했을 때, 그때 짱짱한 햇살 속으로 뽀얗게 하얗게 흔들리는 무꽃이 내 눈을 가득 채웠다.

돌아가신 당숙모의 봉분을 만들기로 한 좌우사방이 모두 밭이었다. 그 많은 밭이 모두 무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장철에 출하를 목적으로 밭에 잔뜩 심었던 무를 하나도 팔지 못해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혹시 판로가 열릴까 해서 땅을 파고 임시로 묻어 두었던 무가 끝내 소비자를 찾지 못한 까닭으로 그렇게 봄이 왔다고, 계절이 바뀌었다고 새로운 싹이 나서 꽃까지 피어 우리의 마음을 아득하게 하고 있었다.

그날의 그 아득함을 통해서 내가 무슨 위로를 받았는지, 무슨 위안을 받았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는 못한다. 잊을 수 없어서, 잊지 못해서 자꾸 생각해보며 눈을 갸름하게 뜨고 하늘을 보다가 땅을 보다가, 그러다가 기어이 쪼그리고 앉아 손을 턱에 괴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버릇이 그때부터 내게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나는 급기야 해마다 겨울이면 무를 땅에 묻어놓고 봄에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해마다 애리애리하게 흔들리며 재잘대는 무꽃을 보고, 또 보며 내가 이루어낸 생각의 깊이랄까 부피 같은 것을 이 자리에서 굳이 끄집어내 보일 필요는 없겠지만, 금년의 무꽃은 특히 각별하게 생과 죽음의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말 정도는 해도 뭐 괜찮을 것 같다.

말 못할 것 같아서 쓴다. 엄마 사랑해.









오늘 아침에도 찻잔을 손에 들고 서성이며 무꽃을 보고 있던 참인데 불현듯 그 한 문장이 생각났다. 동시에 목구멍에서 울컥 하는 것이 솟아오르고, 눈에서는 뜨거운 것이 찔끔 고개를 내밀며 눈앞이 침침해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면 아주 평범한, 너무나도 평범한 그 문장 하나를 나는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읽고 또 읽고 있었다 해도 같은 말이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없이 이 문장 하나만을 달랑 떼어놓고 본다면 거의 아무런 감정도 감회도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제주도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 아이들 중에 한 명이, 바다 위를 스키 선수처럼 가볍게 그리고 시원스럽게 달려야 할 배가 기우뚱, 기우뚱거리다가 달팍 엎어지고 있을 때, 그때 그 아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비상한 운명을 직감했으리라. 동시에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고, 숫기가 없는 까닭에 다른 아이들은 다하는 “엄마 사랑해”하는 그런 말을 한 번도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쳤고, 그리하여 그 아이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을 때 그 말을 꼭 엄마에게 전하고 싶었으리라.

엄마 사랑해. 지금이 아니면, 지금 당장이 아니면 이 말을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당장 하는 거야, 엄마 사랑해. 이것이 내 진심이라는 것을, 엄마가 알아줬으면 좋겠어. 알아줄 거지?

침몰하는 배 안에서 엄마 무서워도 아니고 엄마 사랑해라고 하는, 전화기에 그런 문자를 쓰고 있는, 써야만 하는,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의 표정을, 그 마음을, 그 사랑의 깊이를 내가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나는 굳이 그렇게 해석을 해보는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엄마를 불러볼 수도 없다는 것을 아이가 그때 이미 알아버렸던 것이라고.









그리고 또 하나, 유가족들이 복원한 아이들의 핸드폰에는 사진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는 세월호 침몰 중이라는 내용의 뉴스 화면을 캡처해 놓은 것도 있단다. 그 시간이 아홉 시 오십구 분. 선장 이하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탈출을 감행해버린 지도 벌써 한참인 시각이다.

자기 자신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얘기를 가까이에 있는 승무원들에게서가 아니라 멀리, 아주 멀리에 있는 뉴스 제작자들이 방출한 전파를 통해 알아야만 했던 그 아이는 자신의 죽음을, 저 앞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자신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열일곱, 그동안 참 많이도 애써 왔는데, 살아가고자, 살아보고자, 교육부에서 원하는 공부를 잘해야 잘산다고 해서 그런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자기 자신이 임의로 하고 싶은 것은 거의 못하거나 혹은 포기하고, 그렇게 어른들이 짜놓은 틀 안에서 숨 막히게 애써 왔는데, 그런데 한순간 죽어야 한다고, 이제 그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인공위성을 통해서 그 아이에게 전해졌을 때, 그때 그 아이의 가슴속을 파고든 시커먼 것의 정체를 내가 감히 알 수 있을까? 헤아려 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는 듯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 된다. 중증치매 진단을 받기 전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고, 할머니가 그러셨고, 이웃의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또한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죽는 줄도 모르게 죽는 것이 이제 남은 유일한 소원이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다.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살아온 날보다는 살아가야 할 날이 훨씬 많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죽기 전의 아이들이 핸드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보자면 하도 기가 막혀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도 하지만, 그 대화를 곰곰이 삭혀가면서 듣다 보면 문득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이거 우리 정말 죽는 거 아냐?”

이런 말을 하면서도 깔깔대고 웃는 아이들은 누구인가. 물론, 혼자 있었다면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이 있었어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세 명 이상 있으니까, 그래서 공포는 역설적으로 롤로코스트에 올라선 기분이라는 등의 인생에서 가장 역동적인 순간들에 대한 비유로 승화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도무지 아이들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상황이 다섯 살 여자아이에 이르면 그나마 할 수 있었던 말도 더 이상은 해볼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일곱 살 오빠와 엄마 아빠 그렇게 네 식구가 제주도로 이사를 가던 중에 참변을 당한,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게 혼자서만 구출된 이 어린 다섯 살 소녀에게 있어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재난은 그저 이사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아이는 이렇게 울부짖는다.

“왜 나만 두고 이사간 거야, 잉.”

엄마가 이미 주검으로 돌아와 있는데도 아빠랑 오빠랑 같이 그렇게 셋이서만 이사를 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아이, 그래서 슬픈 아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그저 슬프기만 한 아이가 있는 세상.

이 엄청나게 기막힌 참사의 와중에도 아름다운 사람은 역시 아름다웠다. 추한 사람들은 계속 추한 꼴을 보여주었다. 하긴 기본이 그렇게 돼버린 사람들이 뭘 얼마나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랴. 추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문화체육관광부 관리들의 추함은 두고두고 새겨볼 만하다.

문체부 산하에 남도 국악원이라는 곳이 있단다. 진도의 바닷가 팽목항 인근에 위치한 이 국악원은 수백 명을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온돌방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국악원 측에서는 기관장 회의에서 국악원을 유족들에게 제공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냈고, 그 의견을 최고 상급 기관인 문체부에 올렸다.







그러나 문체부 관리들은 침묵했고, 어느 날 돌연 방송국 기자와 경찰들이 몰려와서 온돌방을 차지해 버렸다. 국악원에서 참사 현장이 아스라이 보이는 팽목항까지는 오 분 거리, 유족들이 실제 머물고 있는 체육관에서는 이십 분 거리. 명색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관장한다는 문체부의 인식이 이 정도인 나라 우리나라 대한민국,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이것을 발로 뛰어서 밝혀낸 사람도 있다. 그것이 기자의 소임이요 존재 근거라고, 교과서에서는 열심히 주장하지만 그런 기자는 흔치 않다. 흔치 않기에 엠비시 해직기자 출신 이상호의 존재감은 우뚝할 수밖에 없다.

알파잠수공사의 이종인 대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참된 기쁨의 성격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말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서의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살려냈을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그럴 것이다.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내 가족과도 상관이 없는, 일가친척들과도 아무 인연이 없는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큰 도움을 주고 난 뒤의 기쁨은 그것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비상시의 우선순위를 돈이 아니라 인간의 목숨에 두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런 사업가는 희귀하다. 그래서 우리의 대통령께서는 국가개조를 언급하시는 것일까?

국가개조. 일제치하 당시 이광수의 국민개조론을 연상케 하는 그 말이 대통령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전율했다. 거짓말을 너무도 당당하게 떳떳하게 심지어는 자랑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국가개조를 열 번 하면 뭐할 것이며, 국민의식을 바꾸자고 한들 씨알이나 먹힐까.

도대체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소위 상층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꿔볼 생각은 안 한다. 무조건 네가, 너희들을 바꿔야 나라가 제대로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하긴 대통령이 그런 생각의 포로가 되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 기용하고 있으니 어련하랴 싶기는 하다.

대통령께서 강조하는 국가개조를 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내 이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이익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감옥행 특급 열차를 태우게 될 것이다.

이에 관한 객관적인 지표를 찾기로 하자면 얼마든지 있다. 굳이 찾아나설 필요조차도 사실은 없다. 대통령께서 그동안 해 오신 말씀을 추적하고, 그 말씀대로 이행된 것이 얼마나 되는가를 수학조차도 필요 없이 산술적으로 계산만 해도 금방 나온다. 진실로, 진실로, 진실로 이런 두 얼굴의 파시스트에 가까운 대통령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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