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26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바야흐로 `불륜`의 시대가 도래했다. 불륜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어왔지만 요즘처럼 불륜이 `공식화` 된 적이 있었나 싶다.

불륜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막장의 재미가 있고, 피해자의 복수와 불륜남녀의 몰락이 짜릿한 통쾌감을 준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는 사뭇 다르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이라 해도 공감대가 있고 애틋하다.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불륜을 권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라도 조성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불륜이라는 게 드라마 속에서나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안심하고 있다면 깨몽! 집에서 애만 키우는 무지랭이 아줌마라도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아야 한다. 불륜은 바로 우리 옆에 현실로서 존재한다.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시라. 보고자 하는 만큼 보일 것이다.




# 일러스트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요즘 아줌마들 사이에선 `밴드` 얘기가 한창이다. 남편을 `밴드` 모임에 보내느냐 마느냐로 고민고민.

`밴드`란 스마트폰에 있는 모임 어플이다. 10년도 훌쩍 넘은 그 시절 모든 동창생들을 찾게 해주었던 인터넷의 `아이러브스쿨`과 마찬가지로 요즘은 `밴드`에서 친구들을 찾는다.

초, 중, 고교 동창들이 모이는 공간을 넘어 예전 직장 동료까지 찾을 수 있도록 한 층 업그레이드 된 게 `밴드`의 장점. 잘만 활용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를 찾고, 고마웠던 옛 직장의 선후배 동기들을 만나고…. 문제는 사람이다. 언제나 그렇듯.

친한 선배언니가 요즘 죽을 상을 하고 있다. 남편 때문이다. 몇 달 전 남편이 초등학교 `밴드` 모임에 나간 것까지는 좋았다. 30년 전 친구들을 만나 밤새 술을 마시며 추억의 꽃을 피웠다.

문제는 그 이후다. 초등학교 6학 때 좋아했던 여자아이. 농염한 섹시미를 발산하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나타났다. 어린 시절 풋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게 아쉬워서였을까? 선배 언니의 남편은 넘지 넘어야 할 선을 넘어 버렸다.

선배언니의 말에 따르면 불륜의 첫 번째 증상은 도를 넘은 스마트폰 중독이라 한다. 하루종일 ‘밴드’ 어플을 열어놓고 대화 삼매경. 새벽까지 낄낄대며 아줌마 아저씨들의 대화가 이어진다고 한다.

두 번째 증상은 외모 가꾸기. 동네 미용실에서 팔천원씩 주고 자르던 머리. 어느 날 명동을 나가 삼만원을 주고 자르고 왔단다. 연예인처럼 앞머리를 사선으로 늘어트린 컷. 흰머리 듬성듬성 머리도 밝은 고동색으로 곱게 염색. 이후로는 틈나는대로 셀카 삼매경. 이 각도에서 찰칵. 저 각도에서 찰칵. `밴드`에 올리기 위해서다.

세 번째 증상은 잦은 외출과 모임. 일주일에 한 두번이던 회식이 일주일에 세 네번으로 늘었다고 한다. 주말이면 하루종일 잠만 자던 인간이 새벽 6시부터 일어나 목욕재개하고 짐을 꾸려 1박2일 여행. 처음에는 동창들끼리 MT를 가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더니 나중에는 회사 야유회, 부장님과의 낚시 여행 등 핑계가 다양해졌단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남편이 똥싸러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선배언니는 딸과 함께 남편의 스마트폰 잠금 비밀번호를 알아내 모든 것을 보고 말았다.

남편을 죽이는 건 다음 문제다. 선배언니의 모든 악의는 불륜녀에게 향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남편 휴대전화 속 불륜의 증거자료를 모두 사진 찍어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했다. 가장 통쾌하고 가장 처절하게 터트릴 때를 기다리며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분노의 화신. 선배언니의 성격을 아는지라... 불륜녀에게 3초간 묵념. 넌 이젠 인생 끝난거야. 쯧쯧쯧.

우리 남편도 초등학교 ‘밴드’ 모임에 나간다. 앞서 경험이 있는 선배언니는 절대로 보내선 안 된다고 결사반대.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위에 친구들이 많아야 행복지수가 높다는 연구결과를 보고 난 터라 가서 잘 놀다 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첫 모임을 다녀오고 난 후 남편은 너무나 즐거워했다. 옛날 얘기는 해도해도 질리지 않는 법. 코 찔찔 시절의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보니 일상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다고 했다. 그런 남편을 보자 나도 기뻤다. 이후로도 두 번 더.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는 흔쾌히 놀다오라고 했다.

물론 남편은 ‘밴드’ 모임을 나가 바람을 피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모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남녀 동창들과의 관계에도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집에서 3분 거리에 남편의 여자 동창 한 명이 살고 있다. 아직도 탱글탱글 20대 몸매를 유지하는 싱글. 초등학교 때 울 신랑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저녁, 집에서 밥을 먹고 있던 남편에게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퇴근하는 길인데 잠깐 볼 수 있냐고. 회사에서 화과자를 선물로 받았는데 자기는 안 좋아하니 우리 아이들에게 주고 싶단다.

먹을 것을 주겠다는 말에 혹한 나는 “갔다와. 가서 받아와”라고 소리쳤다. 남편은 밥을 먹고 옷을 입더니 자기 방에 가서 한참을 뒤적뒤적한다. 그러더니 일본 출장 때 사왔던 예쁜 수첩을 꺼내 들고 온다. “그냥 받아만 오면 미안하잖아”라고 하며.

그 수첩은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하지만 남편이 자기가 쓰겠다며 결코 내주지 않았던, 바로 그 수첩이었다.

남편은 10분 만에 과자만 받고 오겠다더니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나는 토라졌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여자 동창생이 괘씸해졌다. 의구심도 들었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부모 형제랑 같이 살면서 선물 받은 고급과자를 왜 우리 남편에게 주는 걸까? 자기 가족들에게 주면 잘 먹을 텐데….

눈치가 없는 남편은 느즈막하게 집에 와서는 맛있다고 쩝쩝거리며 과자를 먹는다. 한 술 더 떠 자랑도 한다. 이번에 과자 준 애랑, 지난 모임에 나왔던 누구랑 누구가 초등학교 때 자기를 좋아했단다. 자기는 그런 거 모르고 있었는데 걔네들이 모임 때 뒤늦은 고백을 해서 알았단다.

그리고선 모임에 나온 누구랑 누구가 세 번째 모임 때 서로 껴안고 키스를 했다는 등 누구가 누구에게 치근덕거리다 망신을 당했다는 등 주절주절 수다를 떤다. 쩝쩝거리며. 으이구 화상아. 마누라 앞에서 그 과자가 목으로 넘어가니?

주변이 `밴드` 열풍에 휩싸여 있으니 나도 궁금해졌다. 초, 중, 고 모임에 가입을 했다. 초등학교 친구들이야 꾸준히 만나왔기에 별 감흥이 없고, 고등학교도 여고를 졸업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중학교 `밴드`에 가입하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먼저 가입돼 있던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가슴이 쿵쿵. 심장이 벌렁벌렁. 내가 중학교 때 좋아했던 남자애가 두 명이나 먼저 가입해 있었다.

한 명은 중학교 2학년 때 좋아했던 옆 반 아이. ‘뉴키즈온더블럭’의 도니 월버그를 닮았다는 이유로 나는 그 아이에게 푹 빠졌다. 옆 반 체육시간마다 나는 창가 자리로 바꿔 앉고 선생님 몰래 운동장만 힐끔거렸다.

1년 간 짝사랑만 하다가 3학년이 되기 전 친구를 통해 그 아이에게 카드를 보냈다. 좋아한다는 등의 고백은 안했고, 그냥 즐거운 3학년 생활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답장은 못 받았다.

또 한 명은 중학교 3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같은 반 친구. 우리는 마치 동성인 것처럼 친하게 지냈지만 나는 그 아이가 남자로서 좋았다. 20살에 중3 반창회가 열려서 그 아이를 만났고 한순간이나마 묘한 분위기도 조성됐지만 당시 그 아이가 재수중이어서 그 이상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25살 모임 때 다시 만난 그 아이. 더 멋져진 모습에 홀딱 반했지만 그 아이는 애인이 있었고 나는 그 때 인생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었기에 그걸로 끝.

하지만 31살에 결혼을 하면서 나는 그 아이가 중3 때 내게 준 크리스마스카드를 가지고 왔다. 마음 한 구석에 남겨두고 싶은 예쁜 추억이랄까. 그런 마음에서. 지금 그 카드는 남편 책상 맨 밑에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물론 남편은 모른다.

그런데 ‘밴드’ 안에 그 아이가 있는 거다. 과거이자 추억이자 애틋함인 그 아이가. 그 아이의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이해가 갔다. 선배언니 남편도, 우리 남편도. 다들 이런 마음으로 모임에 나갔겠구나.

나도 모임에 나가기로 했다. 나가서 그 아이를 만나 딱 한번 얼굴을 마주보고 “나 사실 그 때 너 좋아했잖아”라고 뒤늦은 고백을 하기로 했다. 꼭 그럴 것이다. 딱 한번. 그거면 된다. 그러고 나면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 선결조건이 있다. 살을 20킬로 넘게 빼야 한다. 중년의 뒤늦은 고백도 날씬하고 매력있는 모습으로 해야 아름답게 포장이 된다. 뚱뚱하고 삶에 찌든 아줌마의 모습으로 좋아했었다며 헤헤거리면 분위기가 깨진다. 그래서 22킬로쯤 빼고 난 후에 ‘밴드’ 모임에 나가기로 했다.

남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안심을 한다. “너는 평생 모임에 나갈 일 없겠구나~” 하며.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불륜 증오자인 나마저도 흔들렸다. 멋진 로맨스를 바란 건 아니지만 분명 설레고 쿵쾅거리는 마음이 생겼다. 동창이라는 이름으로 유부남 유부녀가 만나 술을 마시고 추억을 나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분위기인 것이다. 요즘의 세태가.

그러니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해야 한다. 우정은 우정만으로, 추억은 추억만으로 남을 수 있게. 나 자신도 단속하고, 배우자도 단속하고, 주위 친구들도 단속시켜야 한다. 우리는 김희애 유아인이 아니고, 지진희 한혜진이 아니다. 드라마처럼 달콤한 불륜이란 현실에 없다. 선배언니와 남편처럼 복수와 증오와 막장과 파멸만이 기다리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이다.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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