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문지연의 나 홀로 동유럽 유람기> 22회-슬로베니아 포스토이나



빛바랜 공산정권의 흔적이 감도는 회색빛 도시. 과거 동유럽을 떠올리면 스치는 이미지였다. 동유럽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샘솟았던 이유도 신문지면에서 발견한 회색빛 전운 때문이었다. 전쟁의 긴장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에 살면서 어떤 동질감이 자극된 연유였을 것이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뒤에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이와 같은 우울한 이면들이 뿌리박혀 있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전했고 여행 지역으로 덜 조명 받고 있다는 호기심과 개척 정신 또한 여행지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유럽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펼쳐진 도전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그릇이 되었다.
독일을 시작으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에 이르기까지 9개국을 홀로 거닐었던 시간들을 꺼내어 본다.



# 슬로베니아 민족 시인 프란체 프레셰른 동상



류블랴나 중심 프레셰른 광장은 축제의 열기로 가득했다. 열기를 북돋는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여러 가지 악기 실력을 뽐내는 이들이었다. 관객들은 그들을 빙 두르고 서서 열띤 박수 소리로 박자를 맞추며 어깨춤을 덩실거렸다. 휘파람을 불며 연주 실력에 화답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열기는 해가 기울수록 점점 더 짙어갔다.

광장 한 편에는 민족 시인으로 불리는 슬로베니아의 위인 프란체 프레셰른의 동상이 이방인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에게 그는 정신적 지주라고 한다.
광장에는 그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도 스며있다. 프레셰른은 부잣집 여인 유리아를 사랑했는데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해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시에 그녀를 향한 마음을 녹여 내렸다. 프레셰른 동상의 눈이 향하는 쪽을 따라가면 한쪽 벽면에 그토록 사랑하던 유리아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광장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 박물관 등이 늘어서 있다. 바로크와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고풍스런 멋을 뿜는다.
저녁노을이 어스름해지니 강변을 따라 들어선 레스토랑과 카페의 불빛이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박한 화려함 속에서 강줄기는 더욱 고즈넉한 느낌을 발산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숙소로 향해야할 때였다.




# 프레 셰르노브 광장


숙소 바닥에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전기 주전자 폭파 사고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다. 바닥의 물 자국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흔적을 깨끗하게 정리한 뒤 불편한 침대에 몸을 말아 넣으며 눈을 감고 류블랴나에서 보낸 길고 탈 많았던 하루를 조용히 정리했다. 힘들고 고되게 시작한 하루였지만 도시의 차분하면서 운치가 흐르는 분위기로 어느 정도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슬로베니아의 유명한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인 포스토이나 동굴에 가기 위에 기차역으로 향했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류블랴나에서 50km가량 떨어진 곳으로 류블랴나 기차역에서 1시간3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동굴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 덕분에 인구 1만 여 명의 이 작은 도시는 늘 시끌벅적하단다.
포스토이나는 피브카 강의 유수에 의해 생성된 석회동굴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카르스트 동굴로 20여km가 넘는다. 이 중 5km가량만 관광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관람은 가이드 투어로, 동굴 내에 설치된 열차를 오르내리며 진행한다. 동굴은 희귀 양서류인 올름(동굴도롱뇽붙이)가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기차역에 도착하니 모처럼 날씨가 화창했다. 유럽에 온 뒤로 대체로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이었는데 오랜만에 햇살이 비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동굴 가는 방향으로 쭉 늘어선 커다란 나무와 그 위에 피어오른 촘촘한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가늘게 번졌다. 길가에서 맛있게 생긴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들었더니 더욱더 신이 났다. 아이스크림 한 입, 햇살 한 모금을 번갈아가며 입 안 가득 머금으니 저도 모르게 발걸음은 ‘룰루랄라’.
길목 곳곳에는 무궁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국화인데도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유럽에서는 곧잘 보곤 했다. 이후의 여행지에서도 자주 무궁화를 접할 수 있었다. 내 나라에선 보기 힘들었던 국화를 남의 나라에서 숱하게 만나는 실상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영 씁쓸한 기분이었다. 한국 땅에서 지금처럼 무궁화를 보기 힘들었다간 먼 훗날 어린이들이 무궁화를 상상속의 꽃으로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라도 쉽게 무궁화를 볼 수 있었으면!


# 동굴 가는 길목에 핀 무궁화


# 포스토이나 동굴 입구


# 포스토이나 동굴 안내책자



동굴 입구에 도착해 22유로 하는 표를 끊으니 안내원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물었다. “코리안”이라고 하자 그가 한국어로 된 안내책자를 건넸다. ‘유럽 유명 관광지마다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구나.’
동굴을 아무 때나 입장할 수가 없다기에 입장 시간을 기다리며 주변 산책에 나섰다. 그 주변은 유명세만큼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이 가운데 동양인은 필자 하나 뿐. 왠지 모르게 군중 속의 외톨이가 된 묘한 기분이랄까. 하기야 홀로 동굴 구경 온 사람도 필자 하나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동굴을 누빌 열차에 올랐다. 예상대로 열차에 오른 수백 명의 관광객 중 동양인은 나 하나!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 척, 관심 없는 척, 안 보는 척 하면서 힐끔힐끔 필자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로 들어서니 찬기가 목구멍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관광객들 저마다 입김을 뿜어댈 지경. 동굴 여행을 계획 중인 이가 있다면 여분의 옷 한 벌쯤은 꼭 챙겨 가시길.
기차가 동굴 입구에 들어서자 가이드가 각 나라 말로 그룹을 만들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영어는 이쪽으로!”, “스페인어 이쪽으로 오세요.”, “독일어는 이쪽입니다.”, “이탈리안 모이세요.”
‘아,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오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딱히 소속 그룹을 찾지 못하던 필자는 그나마 덜 어색한 영어 팀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 1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포스토이나 동굴 콘서트홀. 수차례 공연이 열렸으나 필자가 여행하던 당시에는 동굴 보호를 위해 콘서트를 열지 않는다고 했다.


# 포스토이나 동굴 내부

드디어 동굴 탐색 시간. 기차가 한기를 뚫고 느린 움직임을 시작했다. 동굴 안은 천장과 땅에서 솟아오른 종유석과 석순이 얽혀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댔다.
동굴의 생성물은 쉽게 자라지 않는다. 수십 년에 걸쳐 몇 센티미터가 자랄 뿐. 억겁의 시간, 자연이 만든 걸작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동굴은 내부를 구역별로 나눠 다양한 생성물을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뷰티풀 캐이브’ 구역에서는 다양한 색깔과 종류를 한 종유석과 석순이 시선을 끌었다. 종유석은 참으로 다양한 모양을 나타냈는데 이 중 스파게티, 천장에 촘촘히 박힌 가느다란 피뢰침 모양의 종유석 등이 인상적이었다.

동굴의 가장 큰 인기스타는 ‘인간 물고기’. 하얀색 피부가 인간과 닮았다고 해 ‘인간 물고기’란 이름이 붙었다. 도롱뇽 닮은 이 물고기는 앞을 보지 못한다. 어둠 속에 완전히 적응한 채 살다보니 눈이 퇴화한 것이다. 외부의 아가미를 통해서 숨을 쉬는데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1년은 산다. 인간물고기의 수명은 100년이다.
유리관 속에 든 물고기를 본 뒤 도착한 곳은 널따란 공간이 펼쳐진 장소였다. 1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홀이다. 유명 음악인의 공연이 수차례 열렸었는데 현재는 동굴 보호를 위해 콘서트를 열지 않는다고 한다.
콘서트홀과 기념품 가게를 끝으로 1시간 30분가량 이어진 동굴 투어가 끝이 났다. 대자연이 이룩한 신비로움에 연신 탄복하며 지하 세계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 순간 나를 스치는 것은 한기도, 어둠도 아닌 동굴이 쌓아 올린 억겁의 세월이었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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