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숭인동 길 레스토랑 그곳엔 ‘사람’이 있다







다섯 번째 이야기-얼굴들

우리가 길 레스토랑을 다닌지 얼마나 됐죠?? 언젠가 익산떡에게 물은 적이 있다. 11월 달 부터니까, 4개월 남짓 됐구먼…. 에이 무슨 1년은 더 된 것 같은데…. 익산떡 조목조목 따져서 얘기한다. 그러고 보니 익산떡의 계산이 정확하다. 익산떡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길레스토랑은 작년에 10월까진 문을 닫고 있었다. 익산떡이 아팠기 때문이다. 화자가 이 동네에 들어온게 4월. 그러니까 최소 6개월 간은 다른 집에서 막걸리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한 셈이다. 물론 근처에 다른 길레스토랑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길레스토랑에도 가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회사 바로 앞 주차장 한 켠에 포장을 치고 있는 익산떡을 발견했고, 한 번 들러본 게 4개월이나 이어지게 된 셈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화자도, 익산떡도, 동행인도 모르는 일이다.

그 4개월이 1년이 넘는 긴 세월로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니다. 그만큼 자주 찾았던 때문이다. 그리고 그 4개월간 화자는 길레스토랑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 물론 대부분이 인근에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하는 사람들인데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길레스토랑 단골들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몇시건 길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순간 마주치는 많은 안면들. 일일이 인사를 건네기도 벅찰 정도다. 그 사람들 역시 화자처럼 거의 매일, 아니면 최소한 일주일에 2-3번씩은 길레스토랑 신세를 진다. 그리고 그중엔 단순히 술 때문에 길레스토랑을 찾는 건 아닌 이들도 꽤 있다. 그럼 뭐냐고?? 그냥 오는 것이다. 길거리 청소를 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는 틈 날 때마다 찾는다. 추운 날씨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곳엔 활 활 타오르는 기름 난로가 있고, 설사 난로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훈훈하게 해주는 따뜻한 인심이 있다. 인근에 사는 할머니도 찾는다. 족히 75세는 넘어 보인다. 단골 중 한 분이다. 얘기 듣기로 그 할머니는 인근에 있는 한 건물에서 청소를 한다. 역시 술을 드시진 않는다. 하던 일이 끝나면 습관처럼 길레스토랑에 들4� 것이다. 할머니는 익산떡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가끔 한번씩 방문해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 익산떡의 손주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때론 익산떡이 내오는 안주를 반찬 삼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참, 지난 11월 말엔 300통이 넘는 배추 김장을 익산떡과 함께 1박2일에 걸쳐 해치우기도 했다. 대단한 할머니다. 그 분 앞에서 맛깔 넘치는 원조 전라도 김장 김치를 먹을 때면 그래서 왠지 송구스런 생각이 든다. 그럼 술 마시러 오는 사람들은?? 많다. 다양하다.

김 굽는 임 부장

아니…포장마차에서 웬 밥?? 하루에 말통 한 개씩은 너끈히 잡아먹고도 남는 시뻘건 기름 난로 위에 올려진 김이 최후의 몸부림을 쳐댄다. 향긋한 바닷내음이 포장마차의 틈을 비집고 골목길의 고단한 삶 속으로 퍼져나간다.

"아…빨리 주랑게!!" "아따, 알았당게, 쪼까만 기둘려!!" 40대 중반은 돼 보이는 남자가 소리를 지르자 익산떡 맞받아친다.
도대체 뭘 달라는 거야? 이럴 땐 귀와 눈과 코와 기타 오감을 쭈뼛하게 세운 채 사태를 주시하는 수밖에. 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눈이 부실듯한 자태로 커다란 우동 그릇에 넘칠 듯 퍼질러진 채 익산떡의 투박한 손을 통해 공수된다. 다음은 우동 그릇 네 다섯배는 되고도 남을 크기의 냄비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포장마차 안에 진동하던 또 한가지 냄새의 주인공이 바로 이 놈이었구만. 탁자 위에 올려놓은 냄비의 뚜껑이 열린다. 정체 모를 내용물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몽환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화자의 입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지진을 일으킨다. 저게 뭐지?? 정체는 금방 드러난다. 김치 냄새가, 청국장 냄새가 정체를 알게 해준다. 김치 청국장 지짐이라고 해야 하나…아니면 청국장 김치지짐이라고 해야 하나. 어렸을 때 고향에서나 먹어 봤음직한 바로 그…. 그게 다가 아니다. 아주 중요한 한가지가 그 안에 투박하게 더불어 있다. 바로 돼지 등뼈.

그리고 익산떡의 후한 인심이 한가지 더 곁들여진다. 바로 1박2일 동안 밤을 새워 담은 김장 김치다. 돼지 등뼈가 들어간 청국장 김치 지짐, 돼지 등뼈가 들어간 김치 청국장 지짐에 시뻘겋게 타오르는 기름 난로 위에 잔인하게도 구워진 김, 그리고 김장 김치…그게 전부다. 아…한가지를 빼먹었다. 바로 소주.

자기보다 밥을 먹었어도 최소 3650그릇(하루에 두끼씩, 5년을 잡은 것임)은 더 먹고도 남았을 연상의 여인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는 그 남자는 임 부장이다. 이름은 모른다. 그냥 그렇게 부른다. 임 부장은 숭인동 길레스토랑의 `왕단골`이다. 매일 온다. 익산떡이 포장마차를 열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단다. 이전, 익산떡은 청계천변의 그 `유명한` 삼일아파트에 살면서 숭인동에서 식당을 운영했었다.(아참, 삼일아파트와 관련된 익산떡의 무용담도 있다. 조만간 들려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익산떡의 손맛에 반해 식당을 자주 찾았던 것이고, 익산떡이 이곳에 포장마차를 열자 다시 단골이 된 것이었다.

임 부장은 출판사에 다닌다고 했다. 항상 같이 포장마차에 들르는 사람도 출판사 일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이 투명한 냉장고 안에서 `나 좀 잡숴 주쇼`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는 병어회나 다른 안주를 먹는 법은 거의 없다. 아니 안주 자체를 시키지도 않는다. 두 사람이 들어오면 익산떡은 "아따, 왜 이제사 와?" 걸진 목소리와 함께 김장 김치를 내어오고, 화력 좋은 가스 불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커다란 냄비를 가져온다. 그 사이 임 부장은 포장마차 한 켠에서 소주를 두 병 꺼내고, 시뻘건 난로 위에 어디서 났는지 모를 김을 굽는다. 그리고 현장을 응시하는 수많은 시선들은 아랑곳없이 하얀 쌀밥과, 색깔 좋은 김과, 시뻘건 김장 김치와, 돼지 등뼈가 들어간 청국장 김치 지짐을 걸지게도 먹는다. 화자의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안주들이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런 느낌은 포장마차 안의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억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 번째 조우였던가. 그 임 부장 일행과의…. 낯이 익은지라 인사를 건넸고 건네 받았고, 돼지 등뼈가 들어가지 않은(그날은 그랬던 것 같다.) 청국장 김치 지짐 냄새에 침을 삼키고, 임 부장 손끝에서 잔인하게 구워지는 색깔 좋은 김에 시선을 보내고…. 그런데 그 김이 화자의 탁자 위에도 놓여진 것이다. "이거 귀한 겁니다. 드셔 보슈" 투박한 임 부장의 말소리와 함께…. 이게 웬 떡?? 게다가 익산떡의 투박한 손 위에 사뿐한 자세로 안겨져 날아오는 또하나의 은총. 우동 그릇에 담긴 청국장 김치 지짐이 화자의 눈앞에도 펼쳐진 것이다. "한번 먹어봐." `요`가 붙을 듯 붙지 않는 익산떡의 짧은 한마디. 투박하게 생긴 임 부장 참 사람 좋다. 투박하기만 한 익산떡의 손은 왜 그리도 곱기만 한지….

청국장 김치 지짐 맛? 말해 무얼 하리. 입에 담는 것으로 그 맛을 깎아 내리는 건 아닌지 우려될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포기째 들어간 김장김치에 익산떡의 시댁이 있는 정읍의 촌에서 직접 가져온 청국장의 오묘한 조화. 거기다 익산떡의 타고난 손맛까지 더해져…아이고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화자 동행에게 "맞아! 바로 이 맛이야" 하면, 동행은 화자에게 "우리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 하고 주고받는 꼴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감탄스런 그 맛!!
매일 여기 와서 이런 맛난 김치지짐에 하얀 쌀밥 먹을 수 있는 임 부장과 그 일행이 새삼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 김이 뭔 김인지 아쇼??"
난데 없는 임 부장의 질문.
"뭔 김인데요??"
"이게 이래봬도 저 남쪽에서 올라온 진짜 귀한 거요."

아하 그랬군. 지방 출장을 다니는 임 부장이 남도 어느 어촌인가에 갔다가 직접 사왔다는 얘기도 덧붙여진다.
그래서 포장마차 리어카 깊숙이 숨겨두고, 다락에서 꿀단지 빼내듯, 신주 모시듯, 한 장씩 조심스럽게 빼내서 구웠던 게로군.

김 맛을 아는 놈이건, 모르는 놈이건 이쯤되면 김 맛은 절정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일. 눈치를 챘는지 익산떡 하얀 쌀밥도 한 공기 퍼날라온다. "김치지짐도 그렇고 김도 그렇고 짠게 한번 싸먹어봐…"라는 얘기와 함께.
시켜놓은 메인안주는 천덕꾸러기가 된다. 남도에서 올라온 귀하디 귀한 김과 하얀 쌀밥과 김치청국장 지짐과 막걸리…. 배가 불러온다. 긴장이 풀어진다. 삶이 나른해진다. 막바로 집에 들어가면 몇날 며칠이고 잠에 곯아 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집에 갔느냐고??

현실을 보라. 몇날 며칠이고 잠에 곯아 떨어질 수 있을까. 삶이 그렇게 녹록하기만 할까. 내일 아침도 이렇듯 긴장이 풀어진 채 뜨는 해를 맞을 수 있을까. 이 복잡한 도시에서, 이 복잡한 삶에서, 이 복잡한 세상에서….
"익산떡!! 막걸리 한 병 추가!!"라는 외침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배가 부른데 어떻게 막걸리를 또 마시느냐고?? 허허…막걸리의 그 깊은 속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 가서 빼면 된다. 생맥주처럼…. 물론 생맥주는 빼고 나면 바로 배가 가라앉고 허기가 지지만, 막걸리는 그렇지 않다. 배는 가라앉되 허기는 지지 않는 깊고도 진정한 술세계의 예술.

익산떡 싱긋이 웃으며 슈퍼마켓으로 달려간다. 그 사이 화자와 동행은 부리나케 배를 비운다. 이쯤되면 3통+2통은 너끈하다. 익산떡 미리 알고 대처한다. 손에 들려 있는 두 병의 막걸리.
임 부장이 인사를 건넨다. "먼저 갑니다. 많이들 먹고 가쇼." 탁자를 보니 소주 두 병이 비워져 있다. "예, 조심히 가세요. 또 뵙겠습니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사는 거 아니겠나.


다음에 계속
정서룡 기자
sljung99@na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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