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했던 것을 독자님들의 적극적인 재 연재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게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 일본군에 끌려가는 전봉준 장군




‘동학’의 출현과 그 사상 
 
조선 후기 외세의 침략위협과 부패한 봉건관료들의 수탈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은 정신적으로나마 위안을 얻거나,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됩니다. 당시 농민들은 기존 민간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미륵신앙이나 도참신앙, 외래종교인 천주교, 그리고 새로운 신흥 종교이자 사상인 동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요.

동학은 동학(東學)이라는 말처럼 동양의 학문이라는 의미랍니다.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불렀는데 이 서학이 서민들과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자 여기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하여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동학의 창시자는 최제우(崔濟愚)란 분입니다. 호가 수운인 최제우는 경주출신의 몰락양반이었죠.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는 아버지마저 잃게되자 20세에 길을 떠나 전국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비참한 민중의 생활을 보았다. 30대에 접어든 그는 귀향한 뒤 처가인 울산으로 이사했으나 다시 구도의 길을 떠나 36세 때 경주 용담에서 수도에 정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라 안팎의 어지러움과 흐트러진 세상사가 모두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얻어 유교, 불교, 도교와 전래되어 온 민간신앙 등을 융합한 사상인 동학을 창시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동학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셨으니 사람이 곧 한울님(시천주=侍天主)’ 이라는 동학의 핵심사상은 신분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던 하층민들에게는 복음과 같은 것이어서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이렇듯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어가자 정부와 양반 유생들은 동학사상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게 만드는 불온한 것이라 여겨 동학을 믿는 것을 금하고 그 창시자이신 최제우를 체포하여 올바르지 못한 도(동학)로 백성들을 현혹케 했다는 이른바 ‘좌도혹민’(左道惑民)이라는 죄목으로 1864년 3월 대구감영에서 처형시키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가 41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 뒤 2대 교주가 되신 분이 해월 최시형입니다. 그는 1861년(철종 12년) 동학에 입교하여 최제우의 가르침을 받고 1863년 제2대 교주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하자 동학 재건에 힘썼으나, 1871년 이필제(李弼濟)의 민란과 관련하여 당국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이후 평생을 계속 피신하며 숨어 다녀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포교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또 포교를 위해 최제우가 저술한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를 펴냈습니다.

최시형은 스승의 시천주 사상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人卽天이니 事人如天하라)”고 가르치면서 특히 어린아이들과 여성들 그리고 노비들도 모두 ‘하늘님’으로 대접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 자신이 먼저 실천하는 자세를 보였지요. 그의 이 같은 가르침은 1905년에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이 바뀐 뒤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號는 義菴, 1861~1922)에 의해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정리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정부의 감시와 탄압이 느슨해지고 교세가 크게 늘어나게 되자 최시형은 충청도 보은군(報恩郡)으로 본거지를 옮겨 보은 장내리(帳內里)를 동학 중심지로 삼아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동학을 전파시키게 됩니다. 그후 1892년부터 3차에 걸쳐 억울한 죄명으로 죽은 동학의 시조 최제우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894년(고종 31년) 남접의 전봉준 등이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무력행동을 반대하여 만류하였으나,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청산대회를 소집하여 남접에 적극 호응 무력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자 피신생활을 하던 중 1898년 교도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전국적인 봉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에 걸친 도피생활을 통해 동학사상을 전파하고 동학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최시형의 숨은 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태어나신 생가는 그의 나이 20세 때에 일어난 큰 화재 때문에 모두 소실되었다가 1971년에 귀부와 이수를 갖춘 5미터 높이의 유허비를 세웠으며 그 주변에는 나무와 잔디로 조경을 하여 유허지(遺墟址)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유허비에는 “天道敎祖 大神師 水雲 崔濟愚 遺墟地”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지)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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