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 농민 동원 새 만석보 쌓아…
조병갑, 농민 동원 새 만석보 쌓아…
  • 이주리 기자
  • 승인 2014.10.09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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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했던 것을 독자님들의 적극적인 재 연재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게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 만석보



먼저 보(洑)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보(洑)란 댐이나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기가 쉽지 않던 19세기 이전,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방법으로 농민들은 흐르는 하천을 가로질러 나무와 돌로 막았는데 이를 ‘보’라고 하였답니다.

보를 막는 방법으로는 우선 유속과 유량이 적당한 지점을 골라 나무말뚝을 박고 물이 고이는 쪽에 긴 통나무를 가로질러 돌을 쌓은 후 그 위에 흙을 덮어 물이 흐르게 하면서 수심을 높이는게 전통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보는 현재 찾아볼 수 없고 시멘트 구조물로 개축된 것이 일반적입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관에서 주민들을 동원, 대규모로 축조한 보도 있었습니다. 보를 쌓을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그 높이입니다. 너무 낮으면 저수량이 적어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너무 높을 경우에는 홍수 때 범람하게 되어 상류 쪽의 논들이 침수되기 때문입니다.

1892년 당시 원래 정읍천에는 하천이 동진강 본류와 맞닿는 지점에 농민들이 막아 놓은 보가 있었습니다. 이 보는 이후 아무리 가물어도 이곳에서 물을 끌어다 쓰면 흉년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해서 ‘만석보’, 또는 마을 이름을 따서 ‘예동보’나 ‘광산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농민들을 수탈할까 하고 머리를 짜내던 당시 고부(古阜)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남의 산에서 산주(山主)의 허락도 없이 수백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쓰면서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운 보를 쌓았습니다.

이렇게 쌓은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은 데다가 보를 쌓은 첫 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 당 두 말, 좋지 않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 당 한 말의 수세를 받아 고부관아의 창고가 넘치자 예동, 두전, 백산에 700여 석을 쌓아 놓았답니다.

그 무렵 삼남(三南)지방에는 가뭄이 계속되어 생활이 힘들어지자 보세를 감해 달라고 관가로 갔던 농민들이 보세 감면은 커녕 매만 맞고 나왔으며 이후로 새 만석보(萬石洑)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이로 인해 1894년 1월에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만석보로 달려와 보(洑)를 헐어버렸고, 이것이 갑오농민전쟁의 발단이 되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얼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현장인 만석보에는 1973년에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가 말없이 서 있습니다.

만석보유지비 건립에 관한 에피소드 한가지 말씀드리지요. 건립될 당시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3공화국 시절이었답니다. 관에서 하는 일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공무원들이 매우 경직되고 윗사람 눈치보기에 급급했던 때였지요. 마침 중앙에서 국토 도로변 정비사업 지시가 내려와 만석보유지비 건립계획이 수립되었는데 관에서 담당 공무원들이 나와 그 정확한 위치를 당시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임원이신 최현식 선생께 고증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사 당일 날 가보니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이 아닌 국도 변에 가깝게 자리하여 작업을 하고 있어 만석보가 실제 위치하고 있었던 장소에 세워야 그 의미가 살지 않겠냐고 설득하여 본래의 자리로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에서는 윗 분들이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야 한다며 인부들을 닥달하여 다시 도로 쪽에 가깝게 옮겨 놓아 실갱이를 벌인 뒤 최현식 선생과 공무원들이 서로 몇 걸음씩 양보하자 하여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랍니다.

그 뒤로 1987년 어느 틈 엔지 모르게 ‘만석보 정화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때 널리 유행했던 단어 중 하나가 ‘정화’이지요. 사회정화니, 00정화위원회니 하면서 정작 ‘정화’의 대상자들이 ‘정화’를 외치는 꼴이 되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만석보 정화기념비’ 비문 끝에는 전라북도 도지사 김00라는 이름까지 새겨 놓아 현대판 선정비를 세워 놓은 짝이 되어 뜻(?)있는 많은 분들이 ‘정화’라는 글자와 도지사 이름에 돌로 마구 짓이겨놓아 흉물이 되었답니다. 하긴 엄밀히 따지자면 당시 농민군의 적이 되었던 전라감사 격인 전북도지사가 비를 세운 격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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