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갈매기의 본성과 개의 본성





돌고래를 연상케 하지만 돌고래와는 다른 상괭이 한 마리가 방파제 바로 밑에서 죽어 있었다. 어디선가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은 숨이 끊어져서 물 위를 둥둥 떠돌다가 방파제에 걸려 더 이상은 떠돌지도 못하게 됐을 터이었다. 작은 개 두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죽은 상괭이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몸통으로 올라타 보기도 했지만 이빨을 박아볼 엄두는 못낸 채 도로 올라왔다. 다음 날은 갈매기 한 마리가 죽은 상괭이 주변을 통통 뛰는 방식으로 맴돌았다.
무심히 그냥 봐도 외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녀석이었다. 물이 빠진 뒤의 방파제 바로 밑에서 홀로 외롭게 서성이는 갈매기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을 가져볼 만했다. 그곳은 갯지렁이 같은 생물이 살아가는 데가 아니었다. 바람에 쓸려 모여든 과자봉지나 몇 개 뒹구는 모래밭이었다. 갈매기를 유인할 만한 소재는 단 하나 죽은 채 떠밀려 와 있는 상괭이라 해도 무리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개도 물어뜯기를 포기한 고래를 갈매기 한 마리가 식량으로 삼겠다고 나섰을 개연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뭐지? 뭐야 저거?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한즉 갈매기는 푸드득 날아 올라버렸다. 하지만 멀리 날아가지는 않았다. 내가 뒤로 물러서면 갈매기는 다시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채로 가만히 있거나 두세 번 통통 뛰다가 도로 가만히 서 있거나 할 뿐 도무지 크게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깨끔질로 통통 뛰는 방식의 저 역동적인 움직임은 또 뭐란 말인가. 그 이유를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아 이런, 다리가 하나뿐이네?”

크게 움직일 때는 양쪽 날개를 사용하고, 조금만 움직일 때는 외다리로 마치 장난꾸러기 사내아이가 깨끔질을 하듯이 통통 뛰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에 마음이 크게 움직인 나는 저기에 다리 하나를 잃어버린 갈매기가 있다고,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래요? 그것이 뭐, 하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이나 잠깐 보이고 말 뿐이었다.





이상하다. 왜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지? 갈매기가 외다리로 통통 뛰고 있는 것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뜻인 걸까? 아니면, 아니면 사람 세상에서는 오직 사람에 관한 이야기만 중요하다는 것일까? 나는 시무룩해져서 이런저런 온갖 생각의 집을 짓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갈매기를 사냥하겠다고 갯벌을 좌로 우로 그야말로 종횡무진 내달리는 개 두 마리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마치 서커스 구경이라도 하듯이 열정적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녀석들은 누군가의 애완견이었다. 검정과 흰 것 두 마리의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컹컹 짖어대며 갈매기를 표적으로 뛰어든 개 두 마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갈매기 한 마리쯤은 그냥 달려가서 덥석 물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사냥감이었을 터이다. 게다가 무리를 지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떨어져 나와 외다리로 통통 뛰기나 할 뿐인 갈매기였다. 비록 날개는 있다 해도 슬픔에 푹 빠져 있는 외로움의 덩어리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어쩌면 갈매기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리를 떨어져 나와 천적이랄 수 있는 개들이 잘 보이는 방파제 바로 밑으로까지 와서 “자신 있거든 나를 좀 어떻게 해 보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갈매기는 말이에요. 진짜 영물이에요, 영물.”

바다 일을 오래 해 온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갈매기는 허공에 높이 떠서 날다가도 지렁이 한 마리나 빵 한 조각을 던져주면 내리꽂히는 화살처럼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단다. 그런데 강한 독성을 내장하고 있어서 사람도 죽을 수 있는 복어 새끼를 던져주면 멀리서도 벌써 알아차리고 반응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바지락 채취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갈매기들이 유난히 시끄럽게 굴면 그것을 신호로 물이 들어올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다.





“사람더러 이제 그만 뭍으로 나가라고 그렇게 떠들어대는 거여.”

갈매기가 사람의 목숨을 걱정해서 물이 들어올 때가 됐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또한 재미있다. 갈매기는 온전히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먹이를 취하기도 하지만, 만약에 그런 식으로만 살아 왔다면 갈매기의 개체수가 오늘날처럼 번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란다. 그물에 걸린 작은 물고리라든가 사람의 발에 밟혀서 깨진 바지락 등등 사람의 조력으로 먹이를 손쉽게 취하다 보니 종족이 행복해졌고, 그래서 사람의 안녕을 염려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이런 이야기들이야 물론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서로가 좋자고 하는 것이겠지만, 황새나 저어새 혹은 두루미 등 목이 긴 새들과는 달리 갈매기는 확실히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목이 긴 새들은 물속에 죽은 듯이 미동조차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철없이 날뛰는 어린 물고기를 낚아채지만 갈매기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다. 어부가 그물을 걷어 올리는 시간이 되면 그쪽으로 날아가고, 바지락을 캐러 나서면 또 그쪽으로 달려가서 배를 채운다. 배를 채운 뒤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그 모양이 흡사 알을 낳는 중인 것 같기도 하고, 알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렇게도 한가롭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다.

트랙터가 달려오면 갈매기들은 일제히 날개를 털고 일어선다. 그 중에 어떤 녀석은 트랙터 바퀴가 금방 자신의 몸을 깔아뭉갤 지경으로까지 다가왔는데도 일어설 줄을 모르고 있다가 트랙터 운전기사가 이거 안 되겠다 싶어 핸들을 확 꺾는 순간 날개를 펴서 푸드득 날아오르기도 한다. 또 어떤 녀석은 아예 날개를 펴보지도 않고 옆으로 슬쩍 재빠르게 종종종 몇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도 한다. 갈매기의 그런 대담한 행동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 하나는, 인간의 성격과 행동패턴을 나름대로 연구하지 않고서야 저토록 대담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갈매기의 그런 내공을 알 까닭이 없는 개들은 어쨌든 갈매기 사냥에 나섰다. 검둥이와 흰둥이로 구성된 이 사냥꾼들은 일단 거침이 없었다. 자발없이 왈왈 짖어대며 내달리는 모양이 전라도 말로 ‘초랭이방정’ 같다 싶기는 해도 뭔가 금방 성과를 낼 것 같은 기세였다. 두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갈매기를 덥석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가서 주인 앞에 내려놓고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어대며 칭찬을 구할 것만 같은 그 모습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내달리는 개 두 마리와 갈매기를 쳐다보면서 일단 피식, 하는 투의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리가 하나뿐이라 해도 갈매기는 갈매기였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 게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갈매기가 사람들의 예상을 깨트렸다. 두 마리 중에 앞서 달리는 검정개가 이삼 미터쯤 앞으로 달려왔을 때 갈매기는 날개를 폈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그런데 멀리 가지 않고 겨우 칠팔 미터쯤에서 다시 내려앉았다.

다시 내려앉은 외다리 갈매기를 본 개들은 더욱 흥분해서 날뛰었다. 갈매기는 다시 날아올랐다. 이번에도 멀리 가지는 않고 십여 미터 이내에서 내려앉았다. 앉은 채 외다리 깨끔발로 통통 두어 번 뛰다가는 멈췄다. 짖어대며 달려오는 개들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었다. 딱히 어디랄 것도 없는 먼 데를 보며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또 내려앉았다.

쫓아가는 개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도대체 귀신이 곡할 노릇일 터이었다. 입 한 번 크게 쩍 벌렸다가 닫으면 잡혀 있을 것 같은 갈매기가 왜 이렇게도 안 잡히는가 말이다. 일정 부분 오기도 작동하기 시작했을 터이었다. 이 조그마한 녀석이 감히 개를 놀리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네 녀석을 잡아서 물어뜯어 놓고야 말리라.





외다리 갈매기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로 귀찮기만 한 일이었을 터이다. 안 그래도 다리 하나를 잃어버린 뒤의 우울증으로 심난해 죽겠는데 뭐 이런 낮도깨비 같은 녀석들이 나타나서 귀찮게 구는 거야, 이거, 응? 그렇다고 응대를 안 할 수도 없다. 안 하면 그대로 물어뜯기고 말 테니까.

그리하여 건강한 개 두 마리와 외다리 갈매기 한 마리의 쫓고 쫓기는 게임 아닌 게임이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었다. 그렇다고 영원토록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을 까닭이야 없는 일이었다. 같은 일이 십여 차례쯤 되풀이되는 동안 외다리 갈매기는 어느새 물이 있는 쪽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고 있던 다른 수많은 갈매기들과 섞여졌다.
 
원래의 표적을 놓쳐버린 개들은 순간 당황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수많은 갈매기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전투력이 샘솟았는지도 모르겠다.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백 마리 아니 천 마리나 있었네, 하는 그런 어떤 횡재의 기분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돌아서는 등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개 두 마리는 이제 바야흐로 미친 것 같기도 했다.

갯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휴식을 취하던 갈매기 무리는 미친 듯이 내달려 오는 개들의 출현에 일제히 날아올랐다가 다시 일제히 내려앉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역시 멀리까지 날아가는 법은 없었다. 그것들 참 맹랑한 녀석들일세, 하고 조롱이라도 하듯이 십여 미터 안팎의 거리에서 날아올랐다가 내려앉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금방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안 잡히는 안타까움에 초조감 그리고 안달복달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동안 개들은 지쳤고, 그리고 흙투성이가 되어갔다.



# 검둥이


마침내 흰둥이가 슬슬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일제히 날아올랐다가 내려앉기를 되풀이하는 갈매기 무리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흰둥이의 꼬리는 흙투성이가 된 채 힘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검둥이는 여전히 패기가 만만했다. 꼬리는 위로 바싹 치켜 올랐고, 두 귀는 쫑긋했다.

흰둥이가 의기소침해서 헐떡거리는 소리나 내고 있는 동안에도 검둥이는 앉아 있는 갈매기 한 마리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었다. 전력질주의 결과는 너무도 허망한 것이어서, 사람 같으면 어느새 날아올라 버린 갈매기를 향해 저주의 욕바가지라도 퍼부었을 테지만, 검둥이는 저주를 퍼붓는 대신 다른 갈매기를 표적으로 방향을 바꿔 새롭게 전력질주를 하는 것이었다.

흰둥이는 검둥이에게 그만 돌아가자는 말 한 마디 없이 혼자서 슬그머니 돌아섰다. 달리지는 않았다. 일종의 종종걸음으로 흰둥이는 검둥이와 점점 멀어져 갔다.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꼬리를 늘어뜨리고 헐떡거리며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흰둥이는 두 말이 필요 없이 측은하기 짝이 없었지만, 검둥이는 개의 자존심과 명예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라도 느낀 것처럼 돌아갈 줄 모르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 또 되풀이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녀석이었다. 단단한 땅도 아니고 물렁물렁한 갯벌을, 그것도 여기저기 도처에 물이 찌걱찌걱 고여 있는 흙탕물 위를 어쩌면 그렇게도 지치는 기색도 없이 한결같은 용맹성으로 내달릴 수도 있는 것인지. 그 일관성 있는 투지 하나만은 높이 사줄 만했다.





다음 날 물이 빠졌을 때 방파제 밑으로 외다리 갈매기가 또 찾아오나 어쩌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펴보았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검둥이에게 잡힌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동료 갈매기들 속으로 합류해 들어간 것 같았다. 혹시 모르겠다. 외다리 갈매기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어버린 뒤에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소외시켜 왔던 것인지도. 만약에 그렇다면 갈매기를 사냥하겠다고 나선 개 두 마리가 외다리 갈매기의 문제를 해결해 준 셈이 된다.

그건 그렇고, 검둥이는 그날 이후 거의 매일 갯벌로 출근을 한다. 무엇을 목적으로 갯벌 출근을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잡히지도 않는, 잡을 수도 없는 갈매기를 쫓고 또 쫓다가 헐떡거리며 돌아오는 게 검둥이가 하는 일의 전부인데, 혹시 모르겠다. 금방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안 잡히는 갈매기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을 검둥이가 지금 품고 있는 것인지도,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 것인지도 혹시 모르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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