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또 있을까. 사람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야 두말이 필요 없이 크지만,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게다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할 때는 함부로 웃는다거나 인상을 찡그리면 안 된다는 인류사적 약속이 전제되기 때문에 은근한 긴장과 스릴마저 있기 마련이다.

갯벌에 체험학습을 나오는 사람들은 갯벌체험만 하는 게 아니었다. 새빠지게 일하고 있는 우리들을, 또는 일하고 돌아오는 우리들을 그 사람들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하며 사진을 찍곤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차츰 우리들의 구경거리가 되어갔다.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구경거리가 되어준다고 하는 이 흥미진진한 관계는 사실 관계랄 것조차도 없이 그저 한 번 스쳐 지나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오늘 처음 온 그 사람들은 어제도 오고 그제도 왔던 그 사람들 같아서 보면 그냥 친근감이 느껴졌다.

물론 갯벌 체험을 나온 사람들은 우리가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본 그 사람들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신기해만 보여서 한참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는 작업 도중에 잠깐 허리를 폈을 때나 혹은 트랙터를 타고 달리면서 틈틈이 조금씩만 그 사람들을 구경하지만, 그 사람들은 놀면서 우리를 구경하는 것이니 그 깊이와 폭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문득 지어보이는 상대의 미소나 표정을 즉각 해석하고 그에 반응하는 친밀감 있는 몸짓언어는 너도 인간, 나도 인간이라는 그 어떤 동지애적 연대감이 바닥에 깔려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닐 터이다. 



# 건장한 사람은 가끔 태워주기도


처음부터 그런 화기애애하게 친밀한 관계였던 것은 아니었다. 갯사람들에게 구경꾼들의 존재는 한동안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말끔한 차림에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때로는 동정심마저 깃든 안색으로 연인들끼리 다정하게 손을 잡고 우리를 구경하지만, 우리는 온 몸이 흙으로 칠갑을 한 채로 땀 냄새마저 폴폴 풍기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열등감 때문에 특히 아주머니들은 구경꾼들과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바지락 양식장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갯사람들은 일반 어부와는 달리 그 복장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점이 있었다. 눈만 빼놓고 온 몸을 비옷과 두건과 모자와 고무장갑 그리고 장화로 감추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중무장한 차림새는 뭐랄까, 질병이 창궐하던 시대가 배경인 영화라도 찍으려고 분장을 한 것 같은 모습이어서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단 보고 나면 또 보고, 또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을 터이었다.

“오매, 저 사람들이 우덜을 무슨 원숭이맹키로 쳐다보네 잉? 얼래, 사진도 찍네. 이것이 뭔 일이당가.”

아주머니들은 일하는 도중에 문득 그 사람들을 발견하고 수군거리고는 했다. 차마 대놓고 왜 쳐다보느냐고, 왜 사진을 찍느냐고 따지지는 못했다. 고개를 푹 수그리거나 외면한 채로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궁시렁거리는’ 것일 뿐이었다. 한가하게 노는 사람과 새빠지게 일하는 사람의 차이를 의식하는 데서 오는 분별심이랄까, 아니 어쩌면 계급의식인지도 모르는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아주머니들을 그렇게 안으로 숨어들게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주장하거나 큰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사회학적 연구결과를 갯벌의 아주머니들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셈이다.



# 구경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장


내가 갯벌을 처음 발견하고 뛰어들었을 때의 사정이 그와 같았다. 야 이것 봐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스쳐 지나기만 했던 갯벌에 뭔가가 있구나. 한 오륙 년 정도 들여다보고 나면 내가 갯벌을 내 몸의 한 부분처럼 알게 되고, 그러면 근사한 소설 한 편을 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갯벌 출근을 시작했을 때 아주머니들은 나 보기를 ‘호환마마’처럼 여기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고자 애를 쓰는 눈치들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갯벌 일을 나왔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갯벌 일에나 충실하면 될 것을, 이것저것 자꾸 질문을 해대고 뭔가를 유심히 살피는가 하면 심지어 카메라까지 들이대고 있으니 저게 대체 무슨 괴물인가 싶었을 터이었다. 어쨌든 그렇게도 외국인처럼 서먹하고 어색하기만 했던 아주머니들과 나의 관계는 햇수가 이 년을 넘어 삼 년째로 접어든 이즈음 돌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다. 무엇보다 아주머니들이 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졌다. 아니 대담해져 있었다.

내가 작업복 주머니에 소형 카메라를 넣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셔터를 눌러대기 전까지만 해도 갯벌의 아주머니들은 그냥 구경거리일 뿐이었고, 일방적으로 사진을 찍히는 피사체일 뿐이었다. 그래서 몹시 기분 나빠 하고, 기분이 나쁘면서도 기분 나쁘다는 말은 한 마디도 못한 채 옆 사람들과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밥 먹고 할 일도 징상스럽게 없나벼”하는 등의 수군거림으로 자신의 불만을 겨우 해소할 뿐이었다.

그랬던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면서 관계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아니 어쩌면 보면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그 어떤 동기부여를 내가 해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들과 함께 일하는 내가 관광객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한 이후로 아주머니들은 나를 보면 이것도 찍어라, 저것도 찍어라, 피사체를 지정해주는 등 아예 프로듀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아따 아저씨, 으째서 저 사람은 안 찍으요?”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사람을 왜 안 찍느냐는 것인데, 이럴 때 나는 빵빵 터지는 웃음을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진을 찍지는 못한다. 찍기는 찍지만 그림을 얻을 수는 없다. 평균 속도 삼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트랙터 위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게 말로는 쉬워도 실제로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갯벌이 울퉁불퉁한 까닭에 트랙터는 잠시도 고르게 달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의 몸은 제아무리 가만히 있고자 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 까딱 잘못하면 굴러 떨어지거나 쇠붙이에 부딪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트랙터의 어딘가를 잡고 있어야 한다. 다른 한쪽 손으로 카메라를 잡고 조작까지 해야 하는데 줌인과 줌아웃 그리고 셔터를 손가락 하나로 처리한다. 그러다 보니 피사체를 잡았다 싶은 순간 트랙터는 이미 십여 미터쯤 굴러가 있고, 재빨리 어떻게 셔터를 눌렀다 해도 흔들림이 너무 심해서 원하는 그림을 얻기는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다. 

아무튼 요즘의 나는 아주머니들에게 아주 좋은 구경꺼리가 되어 있고, 그리고 유명인사가 되어 있기도 하다. 바지락 양식업 면허를 가진 사람이 대략 삼백여 명이라니까 작업하는 팀도 그만큼 된다고 봐야 할 텐데 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아직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고, 언제 한 번 같은 작업장에서 일을 함께 했다 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거의 기억을 못하지만 그쪽에서는 반드시 나를 알아본다. 손가락질이나 고갯짓 혹은 턱짓을 하면서 “아 저 빨간 모자 쓴 남자?”라거나 “해리에서 온다는 아저씨가 저 남자여?” 등등 수군대는 소리가 심심찮게 내 귓속을 방문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갯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어가는 동안 갯사람들, 특히 아주머니 자신들은 아마 새로운 재미의 소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뭐랄까. 구경꾼들을 봐도 외면하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 용기가 생겨 있었다. 아주머니 자신들의 복장은 물론이고 얼굴에까지 흙탕물이 잔뜩 엉켜 붙어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배짱이 생겨 있었다. 요컨대 아주머니들은 이제 아주머니 자신들을 구경하는 구경꾼들을 구경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농담이 거침없이 나온다.

“어따야, 오늘은 딸내미들이 겁나게 와 부렀구나, 어저께는 아들 녀석들이 잔뜩 몰려 왔더만, 오늘은 딸내미들이 오고, 히힛, 하여튼 사람은 어떻게든 짝을 맞추게 돼 있다니께.”

뿐만이 아니다. 아주머니들은 구경꾼들을 구경하는 차원을 넘어서 바지락을 한 움큼씩 던져주기도 한다. 갯벌 체험장이 개설된 곳은 방파제로부터 겨우 3킬로 남짓한 거리에 있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는 바지락 같은 어패류가 자생하지 못한다. 때문에 어촌계에서 주기적으로 바지락을 사다가 뿌려줘야만 하는데 체험학습을 나온 사람들이 호미로 그것을 캐내기에는 그 양이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조개를 잡는다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안쓰러워서, 짠해서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트랙터를 세워놓고 조개를 나눠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서도 못 본 척하기에는 마음이 또 쓰려서 즉각적으로 한 움큼 집어서 던져주는데 던져주면서도 웃거나 재미있어 하지는 못하고 걱정부터 나온다.

“우리가 거지냐고 욕이나 사발로 안 들을랑가 모르겠네.”



# 태워주세요~


뭔가를 주면서 던져준다는 것은 확실히 찜찜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주머니들은 자기 것을 주면서도 안타깝지만, 고맙게도 받는 쪽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던져준 조개를 보고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어른들 또한 순식간에 아이의 기분으로 돌아가서 겅중거리며 달려오는데 그 모습을 보는 아주머니들의 표정은 가히 황홀경의 그것이라 할 만하다. 행복이란 단어는 너무도 싱거울 정도의 그런 표정 말이다.

우리의 아주머니들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또한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트랙터가 갯벌에 들어온 채로 고장이 났거나 수렁에 푹 빠져버렸을 경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체험자들이 타고 들어왔다가 타고 나가는 것이 트랙터인데 이 트랙터는 일반 작업용 트랙터와는 달리 사람을 많이 태울 수 있게 개조를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체형이 엄청나게 길어진 것이다. 때문에 일단 수렁에 빠졌다 하면 그야말로 옴싹달싹을 못하게 된다.

수렁에 빠진 관광용 트랙터는 일반 작업용 트랙터 두세 대가 동시에 붙어서 꺼내거나 아니면 멀리서 대형 굴삭기를 동원해야만 하는데 어떤 경우에나 그 시간은 정해져 있을 수가 없다. 한 시간여 만에 뚝딱 꺼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한나절이 걸리기도 한다. 때문에 체험자들은 들어올 때와는 달리 걸어서 나가야만 한다. 바닥이 탄탄한 흙길도 아니고 질퍽거리는 갯벌을 3킬로미터 이상이나 걸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뭐랄까, 갯벌을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갯사람들에게야 당연히 일도 아니지만 도시에서 온 체험자들에게는 형벌도 그런 형벌이 없다. 때문에 이 사람들은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트랙터만 보면 그냥 손을 흔들어대며 태워달라고 목을 놓아 외친다.





하지만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트랙터는 이미 만차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날 캐낸 바지락을 짐칸에 가득 싣고 그 위에 이런저런 도구를 싣고 다시 그 위에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다서여섯 명이 앉아서 위태롭게 흔들리며 달려가는 것이다. 멀리서 보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제법 낭만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태워달라고 손을 흔들며 목 놓아 외치는 것이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위험에 익숙해 있는 작업자들도 가끔 달리는 트랙터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생전 처음인 체험자들을, 게다가 아이들을 태운다는 것은 생각해볼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주머니들은 안타까운 것이다.

“아이고, 저 사람들이 언제 저런 고생을 해봤겠어.”

그렇다고 늘 그렇게 안타까운 장면만 연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체험용 트랙터는 항상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데 어느 하루 달랑 두 명만 타고 있는 장면이 아주머니들의 눈에 띄었다. 멀리서 봐도 어지간히 연로한 남녀가 앉아 있는데 부부인지 서로가 모르는 사람인지 그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모습이 그렇게도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우덜도 언제 저런 날이 있을랑가?”

“아 저런 날을 위해서 이런 고생을 하는 게 아니간디?”

“하기사 그려 잉? 저런 날이, 저런 때가 우리한테도 곧 있겠제.”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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