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 저 순하디순한 퉁방울눈을 어찌할까...


깊은 산골 마을을 지나던 중에 위풍이 당당한 소 한 마리를 보았다. 이혼한 누이가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 충청북도 옥천을 갔다가 어디 한가한 데 가서 밥이나 먹자고 나선 길이었다. 마을 이름은 있어도 사람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드문드문 한 채씩 지붕이 뜯겨나간 집은 남아 있어도 사람 냄새를 찾기 어려운 마을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홀연 고적한 선율의 거문고 소리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계곡은 깊고 길은 끝나 있어서 여름 한철 피서객을 제외하면 지나가는 사람이 길을 잘못 찾아들어 방황할 이유조차 없다고 하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우리는 도착해 있었다.

아, 지금도 이런 오지가 있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어느 세월에 뜯어서 말렸던 것인지 알 수조차 없게 먼지가 켜켜로 내려앉은 우거지가 야릇하게 서글픈 향수를 끌어내는 폐허의 마을에서 거대한 소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어찌 차마 해볼 수나 있었으랴. 소가 나를 보고 소리를 냈던가, 아니면 내가 그 어떤 기시감으로 고개를 돌렸던가, 이상하게도 소와 내가 눈을 마주치기까지의 과정은 지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퉁방울눈, 그것이었다. 그 어떤 적대감도 경계심도 없는, 순하디순한, 손을 내밀면 그냥 손 안으로 들어와 줄 것만 같은 퉁방울눈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아마 죽은 줄 알았던 누군가를 다시 만났을 때의 그것과도 같은 놀라운 기쁨에 빠져들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다. 한참 동안을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그 눈을 보고만 있었다. 소도 역시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보며 무아지경이라고나 할까, 그런 어떤 경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뒤에, 소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마치 내 등을 좀 긁어주세요, 하는 것 같았다.   

지극히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그 눈은, 고기를 목적으로 사육하는 소들에게서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볼 수 없는 투명하게 상서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생각하면 서글프고, 그리고 불온한 얘기 같지만 외부 공기와 철저히 차단된 좁은 공간에 한 마리씩 독방처럼 갇혀진 채 일렬로 늘어서서 사료나 열심히 먹어야 할 운명에 빠져 있는 집단 사육장의 소들은 소 같지가 않다. 움직이면 살집이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요즘의 소들은 그 눈빛이 육식동물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살기마저 감돌았다. 사람이 소를 소가 아닌 쇠고기만으로 파악하면서 그 품성마저 바꿔놓고 있는 셈이었다. 

소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좀 더 어린 시절에는 아이들과 엄마들에게 인기 만점이던 뻥튀기 장사가 꿈이었지만, 소를 발견한 뒤에는 자연스럽게 ‘내 소’를 기르는 게 꿈이 되었다. 평화라는 단어의 뜻조차 제대로 모르던 그 시기에 소는 그냥 보기만 해도 평화가 느껴지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의 꿈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아버지가 가난해서 돼지나 겨우 한 마리 거름 생산용으로 돼지우리 안에 넣어두고 있었을 뿐 소는 엄두조차 내볼 수 없었다.



# 여기에 소가 살고 있을 줄이야~


그 시기에 소는 어느 집에서나 그 집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집에 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집의 생활규모가 드러나던 그 시기에 배메기라는 제도가 있었다. 부잣집에서 어린 암소 한 마리를 데려다가 키워서 그 암소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는 내가 갖고 다 자란 암소는 주인에게 돌려주는 제도였다. 내 나이 열 살이 채 안 되었던 시절에 나는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엄마를 졸랐다.

“나도 소 키우고 싶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학교 갔다 오면 구덕을 지고 나가서 꼴을 베어오고 싶어.”

아마 대충 그와 같은 이유를 대며 엄마를 졸랐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구덕을 어깨에 메고 몰려다니며 꼴 베는 아이들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가 없었다. 꼴을 베는 것뿐만 아니라 날씨가 맑은 날이면 소를 데리고 들판으로 나와서 풀을 뜯기는데 보고 또 봐도 그림 같기만 한 그 모습 또한 그렇게도 부러웠다. 그래서 남의 집 소를 데려다가 키우는 배메기로라도 소를 한 마리 갖고 싶었던 것이지만, 그것조차도 내게는 과분한 꿈이었다.

“남의 소를 데려다가 만약에 그 소가 새끼도 안 낳고 뭔가 일이 잘못 되어 죽어버린다면, 그러면 어떻게 할래? 아마 집을 팔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살지?”

대충 정리하자면 그와 같은 뜻이 되는, 엄마의 그 말씀 한 마디에 나는 대번 기가 죽어버렸다. 듣고 보니 그랬다. 내 소도 아닌 남의 소를 기르다가 뭔가 잘못 돼서 죽어버린다면 그것 정말로 큰일이었다. 그래서 즉각 포기하고 시무룩해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던 것인지, 엄마는 친척 중에 임천아짐이라는 분에게 부탁해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데려오셨다. 새끼 염소가 암컷이니까, 그 녀석을 키워서 그 녀석이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 등이라도 긁어달라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는 소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그 속담이 그렇게도 실감나게 와 닿을 수 없는 새끼 염소 한 마리에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 했지만, 그러나 이 녀석은 덩치만 키웠을 뿐 새끼를 낳지는 못했다. 녀석이 원래 불임이었는지, 다른 뭐가 잘못 됐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새끼를 낳아서 나를 기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 뒤로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던가. 무슨 생각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갔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꽉 짜여진 시간표 속에서 시계바늘처럼 움직여야 하는 도시생활을 더는 못하겠다고 두 손 두 발을 다 들기까지 나는 염소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가 꿈이었던 시절도 당연히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에, 그 어디엔가 그것이 아마 기록되어 있었던가 보았다. 너의 원래 꿈은 소를 기르는 것이었단다, 하고 말이다.

귀향이랄까 귀촌이랄까, 아니면 낙향이라고? 아무튼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와서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남의 집을 한 채 빌려서 고치는 일이었고, 그 다음 한 일이 소를 사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의식적으로 되살아나서 소를 사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시골로 내려왔던 때가 마침 소 값이 폭락하던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가에서 소를 한두 마리씩 부업으로 기르던 시절이었다. 부업으로 하는데도 소 값이 폭락한다는 소문의 위력은 컸다. 소를 키우던 거의 모든 농가에서 소를 헐값에 내놓았다. 두세 달 전까지만 해도 다 자란 암소 한 마리 가격이 사백만 원을 웃돌았다는데 내가 내려갔을 때는 이백만 원대로 떨어져 있었다.



# 조용히 그러나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소


팔려고 내놓은 수많은 소들 중에 한 마리를 내가 데려다가 키우기로 했다. 새끼를 밴 암소였는데 가격은 달랑 이백팔십만 원이었다. 폭락하기 전에는 오백만 원을 준다 해도 안 팔았던 녀석이라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순식간에 현금 수백만 원을 벌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경제원칙과는 크게 어긋나는 경제적 관점으로 소를 보고 있었다. 소를 길러서 돈을 벌자는 게 아니라 내 영혼을 살찌우겠다는 뭐 그런 관점 말이다.

실제로도 나는 소와 나의 관계를 그렇게 정립시켜 나갔다. 적어도 소를 팔아치우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약 십칠 개월 정도는 그렇게 했다. 매일 두 번씩 물을 갈아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빗질을 해주고, 엉덩이에 소똥이라도 묻어 있을라치면 즉각 떼어내는 일을 즐겁게 해 나갔다. 틈만 나면 지게를 지고 들판으로 나가서 좋은 풀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 뭐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아무리 사료 값이 아까워도 그렇지. 요새 세상에 풀로 소를 키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소는 장사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당게.”

사람들은 좋은 풀을 찾는다고 지게를 지고 들판을 헤매는 나를 볼 때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랬다. 풀로 소를 키우는 시절이 아니었다. 구덕을 지고 꼴을 베러 나가는 소년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과거에 소를 먹이던 볏짚이나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은 조사료 즉 간식으로 가끔 한줌씩 던져줄 뿐인 것이고, 미국산 옥수수와 밀과 기타 등등으로 구성된 배합사료가 아니면 소를 키울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때문에 날마다 소꼴을 벤다고 지게를 지고 나서는 나는 매우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타깝고, 안타까워서 보면 그냥 충고를 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소를 대량 사육하는 심성 고운 후배 한 녀석은 아예 나를 붙잡아 앉혀놓고 장시간 경제원칙에 입각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남자의 하루 일당으로 배합사료를 구매하면 소가 최소한 열흘은 먹고살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데, 그런데 형님은 돈을 벌 생각은 안 하고 꼴을 베겠다고 지게나 지고 다니니 이게 뭔 퇴행적인 손실이냐 하는 뭐 그런 설명을 열심히 하고 있는 후배 녀석을 나는 그저 무연히 바라보기나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내가 소를 키우는 목적은 돈이 아닌 다른 데 있단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말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그 다른 목적이란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그리고 피부로 와 닿을 수 있게끔 설명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나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꼴을 베러 다녔고, 그리고 소는 혼자서 새끼를 낳았다. 사방이 희끗하게 밝아오는 새벽 무렵이었다. 외양간 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마자 옷도 못 입고 그냥 달려갔다.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 있었다. 어미 소가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핥고 있었고, 그 앞에서 작은 물체가 꿈틀거린다 싶더니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초식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일어나서 뛰어야 포식자들의 공격을 피해 살아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나니 감개가 무량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뒤로 육 개월쯤 뒤에 어미 소는 다시 암내가 나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게 암내난 소리인 줄도 몰랐다. 하도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러대서 무슨 병이 들었는가 싶어 마을 어른들에게 여쭤본즉 암내난 소리라는 거였다. 그리하여 어미 소는 또 임신을 했고, 때가 되어 새끼를 낳았다.

이번에는 난산이었다. 새끼가 절반만 밖으로 나온 채 더 이상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우여곡절, 간난신고의 과정이 두 시간을 넘어 세 시간, 한나절이나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어떻게 내 손으로 새끼를 빼낼 수 있었던 것인지,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 그 엄청난 일을 치른 뒤에 나는 몸이 마구 떨려서 꼬박 이틀 동안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그야 어떻든 내 어깨는 이제 한껏 무거워져 있었다. 소 세 마리를 부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먼저 낳은 새끼는 이미 중소로 자라나 있었고, 먹성이 어찌나 좋은지 풀 한 짐을 베어다주면 두 시간도 안 돼서 다 먹어치웠다. 그래도 나는 그런 노동이 즐겁기만 했지만, 그런 즐거움이 마냥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내 배가 고팠다. 소꼴을 베어오는 일에만 열심을 파는 사이 동전 한닢까지도 남김없이 나는 다 먹어치워 버리고 있었다. 게다가 집 주인이 의논 한 마디도 없이 집을 팔아버렸다.



# 이런 풍경이 왜 그리 정겨워보이는지...


이사를 해야 했다. 아니 새로 살 집을 구하러 다녀야 했다. 그리고 내 배도 채워야 했다. 어느 한 가지도 돈이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그러면 소는 어떻게 하지? 생각만으로도 목이 떨리고 눈물이 나왔다. 눈을 감아야 했다. 두 눈을 꾹 감고 후배 녀석에게 부탁해서 트럭에 어미 소와 중간 소 그리고 송아지를 모두 실어버렸다.

한밤중이었다. 아니 새벽이었다. 아직 먼동이 트기도 전에 영광 우시장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화톳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는 거간꾼들 사이에서 소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소는 울지도 않고 고개를 처박은 채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었다. 차라리 나를 향해 나쁜놈이라고 뒷발질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아무 소리도 없이 슬픔만 깨물고 있으니 내 속이 그만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후배 녀석이 거간꾼 한 명을 데려왔다. 거간꾼이 우리 소를 한 번 쓰윽 훑어보더니 일도양단, 거두절미, 판정을 내렸다.

“아 이것은, 고기 맛은 좋겠지만 고기가 안 나와. 그래서 값이 없다는 거, 이건 미리 알고 있어야 해, 잉? 그리고 송아지는 요새 공짜로 줘도 안 가져간다는 거 알제?”

그날 알았다. 풀을 먹고 자란 소는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지만, 살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수입산 배합사료를 먹고 자란 소는 털에 윤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반면 살이 엄청나게 많이 붙었다는 게 그냥 봐도 한눈에 느껴진다. 살이 아예 출렁출렁 흔들릴 정도로 비대해진 소를 시장에서는 최상급으로 친다. 그래서 내가 키운 소는 상품가치가 없다는 얘기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소 세 마리를 도로 트럭에 싣고 돌아왔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한 달? 아니었다.

그게 벌써 십육 년 전이었다. 십육 년이나 흘렀는데도, 생각만 하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만 끔뻑끔뻑하던 소의 그 순하디 순한 눈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떠올라온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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