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비밀이 많으면 행복할까?



# 바다에 나가면서 대화는 시작되고.


천하는 공물(公物)이다.

바다에 들어가 있으면 가끔 그런 말이 생각나고는 한다. 여기서 저기까지 한정된 면적을 갖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사유재산일 수 없다는,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재산이기 때문에 먼저 태어난 사람이 먼저 태어났다는 기득권 하나만으로 여기서 저기까지 말뚝을 박거나 금을 그어놓고 여기는 내 땅, 하고 주장하며 자식들한테까지 물려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천하공물’ 사상의 핵심이다.

이런 사상을 기치로 내걸고 사회변혁을 꾀한 사람은 지구상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제대로 성공한 사례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의 없다. 법치주의라든가 민주주의 같은 용어가 일반화되면서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절대군주 체제는 전설로나 남게 되었지만, 인간의 욕망과 행복을 극대화시켜준다는 장밋빛 환상과 함께 등장한 자본주의는 오히려 절대군주 이상으로 인간 개개인을 숨 한 번 제대로 내쉬기 어려운 진공상태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어쨌든 바다에 들어가 있으면 가끔 그 말이 생각난다. 천하는 특정한 주인이 없다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이며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착각일지도 모르는 그런 생각이 나를 가끔 황홀하게 한다. 일단 바다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든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바다에서는 할 일이, 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약한 사람은 약한 대로 할 일이 있고, 강한 사람은 강한 대로 할 일이 있으며, 뚱뚱한 사람이거나 메마른 사람이거나, 키가 큰 사람이거나 작은 사람이거나 누구나 자신의 크기에 맞춰 할 수 있는 일이 바다에는 얼마든지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침대 길이에 맞춰 사람 다리를 잘라야 하는 상황을 연출해내고 있다면, 바다에서의 자본주의는 극소수 혹독한 예외가 있다고는 해도 전체적으로 보자면 사람 중심으로 돌아간다. 적어도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무엇이 있다. 하루 일을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안 나가고 싶으면 안 나가도 된다는 식의 태평함 도 물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네 것과 내 것의 구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일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바다에는 있다.



# 아이고 물이 아직도 이만큼이여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친이 매우 큰 멸치어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유명한 얘기도 있듯이, 바다에도 네 것과 내 것의 구별이 대충 지어져 있기는 하지만,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는 게 대부분 동물이다 보니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이동을 거의 하지 않는 조개류조차도 바람이 심한 날 바람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획획 넘어가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획획 넘어오기도 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이런 자연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일찌감치 욕망의 크기를 줄였다고나 할까. 아니면 욕망 자체가 처음부터 불필요한 부분은 제거한 채로 생성되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바다의 사람들은 네 것과 내 것의 구별은 하면서도 보다 넓은 것, 우리 것이라는 보다 깊은 대의에 관심을 집중한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이용해서 내 이익을 키울까, 하는 점을 궁리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내 얘기를 자기 얘기처럼 열심히 들어줄까, 하는 부분에 더 큰 마음을 쓰는 바다의 사람들은, 그 정서를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자면 외로움의 근원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이렇게 말해도 아마 그리 큰 과장은 아닐 것 같다.

사람 치고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거대한 파도와 대찬 바람 속에서 온 종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살아가는 바다 사람들에게 있어 외로움은 죽음보다 깊다고는 못해도 아무렇게나 마구 언급할 수 있는 엄살의 성격은 분명 아니다. 입으로는 결코 외롭다거나 외로워 죽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온 몸으로, 행위로써 그것을 드러낸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말이다. 이야기.

틈만 나면 이야기를 쏟아내는 바다의 사람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끌어들인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여기서 저기서 그야말로 온갖 사람들이 모여든다. 뭔가에 실패한 사람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뭔가에 성공한 사람이 견문을 좀 더 넓히고자 갯마을에 합류하기도 한다. 그러면 바다의 사람들은 그들을 금방 동생으로 삼고, 형님으로 삼고, 언니로 삼는다.



# 선별 작업중에도 대화는 이어진다.


육지에서는 대체로 남편의 서열에 따라 그 아내들의 서열도 정해지지만, 갯마을에서는 육지의 불문율이 통하지 않는다. 남편은 남편들대로 형님 동생을 삼고, 아내들은 아내들대로 형님 동생을 삼는다. 나보다 한 살 많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언니라고 부를게, 그래? 나보다 한 살이 아래였어? 그럼 넌 이제부터 내 동생, 뭐 이런 식이다. 그렇게 일단 서열이 정해지고 나면, 서로가 경쟁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소재는 무궁무진해서,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다. 발가락이나 손바닥 크기에서부터 지난 번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했는가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라도 숨기는 게 있으면 큰일이라는 듯 시시콜콜 다 털어놓는다. 그러다 보니 사흘 전에 한 이야기를 오늘 또 한다 해도 새롭게 느껴진다. 남자들끼리만 있을 때와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의 표현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들끼리만 있을 때와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의 이야기 소재는 확실히 다르다. 남자들이 대체로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즐거워한다면, 여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남편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놓고 칭찬을 한다거나 험담을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자와 여자가 거의 반반씩 섞여 있을 때는 이야기의 양상이 사뭇 달라진다. 뭐랄까. 거대담론이 된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시작된 이야기가 한 시간이나 두 시간쯤 뒤에 보면 교육부를 폭파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느닷없는 주장에 모두가 박수를 치는 식이다. 가끔은 오래 전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우리 집 사람이 십 만원을 그냥 덜컥 받아와 버리는 바람에 그걸 써버렸는디 말입니다. 아 그것 참 영 찝찝하네요.”

무슨 인과관계가 있어서 그런 느닷없는 얘기가 터져 나온 것은 아니다. 물속에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던 중에 잠시 말문이 끊겼을 때, 그때 불현듯 마음속에 가시랭이 하나가 목구멍을 통해 쏟아져 나온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너무도 당연하다.



# 종패를 뿌리면서도 틈만 나면 입을 열고...


“뭔 소리냐?”
“아 지난 번 선거 때 말이라우.”
“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도 고민을 한단 말이냐?”

“아이고 형님,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사실 뭐, 아직 일 년도 안 지났단 말이거든요. 잊을 수가 없어요. 잊어지질 않는데 어떻게 잊냐고요. 모르겠어요. 그 돈이 액수가 많아서 우리 살림에 큰 도움이라도 됐다면 혹시 내가 이렇게까지 찜찜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뭐. 근데 꼴랑 십 만원이었단 말이거든요. 마누라가 십 만원을 받았어요. 뭐, 나한테 줬다면 안 받았겠지만, 하긴 또 모르죠. 받았을지도. 어쨌든 마누라가 받았으니까. 그걸 왜 받았냐고, 나는 그렇게 큰 소리를 쳤지만, 그러면서도 그걸 돌려주러 가자는 말은 안 했거든요. 못 했거든요. 애써 모른 체 하기로 했던 거죠 뭐. 그게 잘못이었던 거예요. 그때 바로 돌려주자고 했다면 내 마음이 깨끗해졌을 텐데 말이에요.”

“그건 그려, 나는 뭐, 그런 돈 주는 놈도 없더라만, 말이야 바로 말해서 네가 거지냐? 돈 그까짓 십 만원, 야야, 웃음도 안 나온다.”

여기서 잠시 씁쓸한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다. 뒤에서 갑자기 매우 진지한 목소리가 씁쓸한 웃음을 지워 버린다.

“네 생각이 잘못이다. 십 만원이라서, 꼴랑 십 만원이라서 그렇다고? 나는 인마, 천 만원을 가져왔더라.”
“천 만원이요?”
“그렇다니까. 내가 누구냐. 생활체육회 00면 00부분 지회장 아니냐. 회원이 서른 명도 넘어야. 회원들 모아놓고 밥 사고 술 사고 봉투 하나씩 만들어서 나눠주라는 거였단 말이거든.”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잉? 그런데 그게 왜요? 받았다고요? 안 받았다고요?”



# 본격적인 대화의 시간


“아 글쎄, 그것이, 그렁게, 받았다니까. 받아버리고 말았다고. 집안 아저씨뻘 되는 양반이었거든. 집안 아저씨가 주시는 돈이라서, 감히 사양은 못하고 받기는 받았단 말이다. 일단 받기는 받았는데, 받고 나니 눈앞이 캄캄하더란 말이다. 캄캄한 와중에도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지. 까딱 잘못하면 내가 감옥 가고, 나한테 돈을 받은 사람도 감옥을 갈 것 아니냐. 그런 짓을 내가 미쳤다고 할 것이냐. 돈도 그까짓 천 만원, 나 혼자 먹어도 개뿔이나 그까짓 것 간에 기별도 안 간단 말이거든. 안 그렇냐? 내가 누구냐. 응? 내가 누구여.”

우리는 돈을 건네주려 했던 그 후보자가 누구인지 묻지는 않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시골 살림이란 그런 것이었다. 누구네 찬장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는 설령 모른다 해도, 누구의 어떤 친척이 무슨 일로 살림을 망해먹었는가 정도는 알고 싶지 않아도 그냥 알게 되어지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얼결에 받은 돈 천 만원 때문에 일시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기는 했지만, 생활체육회 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수년째 맡아보는 등 조직생활을 해본 사람답게 그 질긴 올가미를 빠져나오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이지. 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한 다음에 돌려드리니까 말이다. 이 양반이 얼굴이 벌개져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여, 그러면서도 돌려주는 그것을 안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 돼 있으니까, 알았네, 미안스럽네. 이 한 마디를 툭 던지면서 재빨리 받아서는 넣어버리더라고. 아이고 참말로, 그 순간에 내 마음이 어찌나 가뿐해지던지, 사람이 참말로, 살다 보니 그런 꼴도 당하게 되더라. 내가 그때 그 돈 천 만원을 받아서 나 혼자 게눈 감추듯이 썼다면, 그랬다면 지금 내 속이 편안하겠냐. 아니거든. 그러니까 네가 십 만원 받아먹고 마음 찝찝한 것이, 그것이 액수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이여 내 말은.”

“그래도 형님은 대단하네. 그걸 어떻게 돌려줄 생각을 할 수 있었죠?”
“얘가 또 왜 이런다냐 이거, 내가 누구냐, 응? 내가 누구여? 지들이 아무리 날고 뛴다 해도, 나도 그에 못지않단 말이거든. 잘 됐다. 너 한 번 말해봐라. 내가 그 사람들보다 못하냐?”

“차라리 신고를 해버리지 그랬소? 받은 돈의 몇십 배라든가, 몇백 배라든가, 하여튼 겁나게 포상을 해줘버린다더만.”
“야 인마. 내가 짐승이냐. 사람 가죽을 쓰고 말이다, 응?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 나가지, 그러면 안 돼지, 그러엄.”



# 틈만 나면 소곤소곤~


그래, 그런 것이 있었다. 인지상정이라는 것.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 하겠다는 마음. 크나 작으나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바로 그런 마음을 먹고 사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단호하게 어찌해볼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신고를 한다 해도, 그 마음이 편할 수는 없는 것, 까딱 잘못 하면 고장에서 쫓겨나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 그런 것이 있다 분명, 시골에서는.

어쨌든, 그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나 작으나 정치를 소재로 벌이는 이야기의 향연만큼 끝도 없이 줄기에 줄기를 타고 이어지는 게 또 있을까. 그리하여 그날의 이야기는, 권력의 최정점이랄 수 있는 대통령으로까지 확장되어 갔다.

“그나저나 요새 우리의 대통령 각하는 신세가 워째 그렇게도 요상한 것이여?”
“내가 아는가, 자네가 알겠는가.”
“비밀이 그렇게도 많아서야 원, 어떻게 살지? 머리가 빠개지지나 않을라나 몰러어? 그것 참, 영판 불쌍해 보이는디 말이여 잉?”
“불쌍이나마나 대통령 머리가 뽀개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여? 행복한 거여 불행한 거여?”
“그걸 내가 아는가, 자네가 아는가. 당해봐야 알겠지.”

하기는 그렇다. 누가 알겠는가. 당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그렇다 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고 일어나면 고단한 노동밖에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 해도 알 것은 안다는 것. 비밀이 많은 사람치고 그리 썩 훌륭해 보이지는 않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산다는 것.

그나저나 어떨까. 비밀이 많으면 행복할까? 그래서 비밀을 창조하고, 또 창조하고 잇달아 계속 창조해내는 것일까? 천하는 주인이 따로 없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게 와 닿았던 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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