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시골 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십팔 년째나 되었지만, 나는 아직 메주다운 메주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메주다운 메주가 정말로 메주다운 메주인지 여부는 장담하기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메주다운 메주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것이 전부이니까.

어린 시절에 보았던 메주란 따뜻한 방안에서 냄새를 온 집안으로 풍겨내며 하얗게 그리고 파랗게 곰팡이가 피어나고, 저 끔찍한 것을 어떻게 먹을까 싶지만 짚으로 엮어서 처마 밑에 달아놓았다가 봄에 박박 문지르고 씻어서 간장을 담그고 된장을 담그면 그저 맛있다 여기며 먹기만 했을 뿐 곰팡이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그런 그림이다.

그런 메주를 메주다운 메주로 여기고 있는 내 눈에 요즘 시골에서 담그는 메주는 도무지 메주다운 메주가 아니었다. 우선 곰팡이부터가 내 기억속의 그것과는 질이 달랐다. 양파 망에 하나씩 쓱쓱 넣어서 비닐하우스에 대충 매달아놓으니 곰팡이 균이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고, 어떻게 겨우 곰팡이가 생성된다 해도 미래에 맛있는 된장을 담보할 수 있는 곰팡이는 아무래도 못 된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런 메주를 볼 때마다 혼자 속으로 ‘얼치기메주’라 생각하곤 했었다. 물론 그런 ‘얼치기메주’를 담글 수밖에 없는 시골의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새가 빠지게 일을 해도 자기 자신의 일당조차 건지기 어려운 판에 무슨 정신으로 메주다운 메주를 담가먹을 수 있으랴. 아마 그래서 더욱 속이 상했을 것이다. 사람이 먹는 것을 생산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시골 사람들이 메주다운 메주 하나 담가먹을 정신조차 가질 수가 없다니 이 무슨 서글픈 농담 같은 현실인가 말이다.



# 콩을 씻는 전영숙씨


내가 게을러서, 견문이 짧아서 메주다운 메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그랬다. 그야말로 메주다운 메주를 판매용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이 그리 멀지도 않은 이웃에 있었다. 농사 경력이 오래인 사람도 아니었다. 초짜도 왕초짜라고나 해야 할, 신세계를 찾아서 시골로 내려온 지 겨우 이 년째인 오형열씨 부부를 만난 것은 나로서도 행운이었다.

그런데 신세계 것이 이 지구상에 있을까? 없을까? 어떤 사람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등 매우 비관적인 말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어놓기도 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일체유심조를 들고 나와서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놓았다. 그래, 그것이 있었다. 같은 것이라도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찾아보면 뭐든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은 발견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조차 없다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가난이 일상이었던 시절에 사람들은 도시로 가면 새로운 무엇이 있을 거라는 믿음에 취해 있었다. 믿음이 현실화되어 도시에 굳건한 뿌리를 내린 사람도 물론 많았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기는커녕 정신의 기둥마저 잃어버린 채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로 많았다.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노예 생활이라도 익숙해지면 편하게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런저런 모든 편안과 익숙함을 떨쳐내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다는 게 쉬운 일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망설이고, 고민하고, 이런저런 계산을 짜보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실제로 ‘그날’을 만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용기를 내서 어떻게 간신히 귀농열차에 올라탄 사람도 처음 이삼 년을 못 견디고 다시 도시로 가버린다. 심지어는 부부가 함께 와서 아내 혼자 도시로 가버리는 이산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 뽕나무장작으로 콩을 삶는 중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곳으로 왔지만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귀농이 실패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큰 줄기는 역시 하나였다. 도시에서의 생활 습관을 고스란히 시골로 가져오고자 했다는 것, 정신은 여전히 도시에 두고 있으면서 몸만 살짝 시골로 데려왔다는 것, 이런 방식의 신세계는 실패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벼랑 끝에 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결코 이런 한가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낭비하지 않는다.

오형열씨의 부인 전영숙씨는 서울에서 인생 중년도 막바지에 이르러 남의 식당 일을 나가야만 할 처지에 몰렸다. 동네 슈퍼를 거쳐 음식점 등등 자영업 생활 삼십여 년 만에 닥친 일종의 불운이었다. 불운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천성이 명랑해서 남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일처럼 즐겁게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어느 하루 문 닫을 시간이 됐는데도 일어설 줄을 모르는 손님이 있었다. 혼자 들어와서 술잔만 비우고 있는 남자, 그 뒷모습이 쓸쓸하고 안쓰러워서 영업시간까지 연장하면 기다려 주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날밤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다가가서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문 닫아야 하는데…”하고 말끝을 줄였다. 그 순간 손님은 괴물로 돌변했다. 그녀의 싸대기를 느닷없이 올려붙이는가 싶더니 맥주병을 들고 휘둘렀다. 입에서는 ‘씨’로 시작해서 ‘년’으로 끝나는 욕지거리가 다발로 쏟아져 나왔다.



# 빻은 콩을 틀에 넣어 두드리면 메주 완성


그날 이후 그녀의 삶은 크게 흔들렸다. 딱히 무엇이다, 특정해서 말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 이를테면 거대한 느티나무 같은 것이 가슴속에 들어와서 밤낮으로 가지가 찢어지게 흔들린다는 느낌이었다. 도시 생활에도 넌덜머리가 났다. 하지만 감히, 차마 시골 생활을 꿈꿔보지는 못했다. 시골 출신의 남자와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고향은 서울이었다. 시골에 대해서는 그저 살기가 힘들다는 것 정도밖에 몰랐다.

어느 하루 남편이 희한한 소리를 했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것도 아니고, 어디 멀리로 여행이나 좀 다녀오자는 참으로 낯선 말이 남편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그녀는 어리벙벙했다. 이 남자가 미쳤나. 여행은 무슨 여행? 아, 그런가보다. 지 마누라가 그동안 힘들게 살았다고, 힘들면서도 힘들단 소리 한 마디 안 하고 가정을 지켜왔다고, 그래서 딴에 선물로 여행 계획을 세웠나 보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까짓 것 뭐, 그런 돈이야 있건 말건 일단은 믿어보지 뭐.

그녀는 남편을 따라 나섰다. 충청도 속리산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풍경을 봤는지 사람을 봤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사진도 몇 장 찍고, 밤이 되어 잠잘 곳을 찾다가 모텔 간판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카운터의 남자는 이런 방이 있고 저런 방이 있다고, 그 중에 어떤 방을 쓸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외쳤다.



# 1차 발효중인 메주


“삼 만원까지만 쓸게요.”
“네?”
“삼 만원 이상짜리는 필요 없다고요. 아 막말로 밤에 들어가서 얼굴 좀 씻고 잠  자고, 그리고 아침에 나오는데 삼 만원 이상짜리 방이 왜 필요하냐고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 말을 하고 난 뒤에 그녀는 깨달았다. 여행이야 뭐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이 쓰는 돈이 아내인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엄연한 진리를 깨달았다. 게다가 여행이란 몸과 정신으로 하는 것이지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행 기간 내내 밤만 되면 삼 만원을 외쳤다. 순천만의 갈대숲을 바라보며 짱뚱어 탕을 먹고 난 뒤에도 삼 만원 이상은 쓰지 않는다고 외쳤고, 고창의 선운사와 모양성을 둘러보고 난 뒤에도 역시 삼 만원  이하면 모를까 그 이상은 어림도 없다고 외쳤다.

그렇게 그 날은 왔다.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귀농 혹은 귀촌을 결행하게 되는 그날, 그날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왔고,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결정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모양성 인근의 부동산 소개소를 찾아들고 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이 남자가 뭔 느닷없는 짓을 한다냐, 하는 마음이었을 뿐, 앞으로 시골 살림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해보지 못했다.



# 2차 발효중인 메주


돌이켜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그날 그녀는 무슨 마약에라도 취했던 것 같았다. 농부의 삶을 살아본 적이 전생에는 몰라도 이승에서는 한 번도 없었건만 그녀는 여기에 뭔가 있다는 상서로운 느낌을 받고 있었다. 들판 한가운데 뽕나무밭이 있고, 저온창고와 비닐하우스 그리고 조립식건물 한 채가 달랑 있을 뿐인, 게다가 공동묘지는 아니라지만 남의 조상 묘까지 세 기나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살림을 살겠다는 생각을 누가 함부로 해볼 수 있으랴. 어쨌든 그녀는 꽂혔다. 부동산 소개업자가 소개한 뽕나무 밭에서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은 묘지 옆에서 어떻게 사냐고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둘이만 살면 너무 심심해서, 이웃이 세 집이나 있으려니 여기니깐 뭐.”

사람들이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서 웃는다. 웃음소리가 너무 맑고 명랑해서 사람들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이 여자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하는 식의 생각은 안 한다. 진정 어린 목소리로 “아 참 대단하네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리고 술잔을 내밀면서 위로와 감사의 잔을 채워주고자 할 뿐이다.

광주에 어떤 유복한 사람이 투자 목적으로 땅을 사서 뽕나무를 심고 이런저런 시설을 갖춘 다음 관리인을 두고 관리해 온 땅이었다. 그런데 관리인과 땅 주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그래서 그냥 처분하기로 했다. 이런 경우는 그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 부부는 운이 좋았다. 아니 어쩌면 운이 좋았다기보다 그들 부부의 진정성이 통했다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 금방 만들어낸 메주


그날로 구두계약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정리한 다음 내려와서 계약금을 치르고, 뒤이어 잔금을 치르고 이삿짐을 싸기까지 반 년도 채 안 걸렸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는 속담을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볼수록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 아무런 답도 안 나온다는 것을 벼랑 끝에 서본 경험이 있는 그들 부부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행정적으로 고창군민이 되었고, 내려오자 마자부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놀면놀면, 쉬엄쉬엄, 일을 시작했다.

“천국이 어떤지 모르긴 해도,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아침에 눈 뜨고 밖으로 나오면 눈에 보이는 풀들이 모두 나물인 거예요, 나물. 히히.”

영숙씨의 맑은 웃음소리에는 자신감이 짙게 배여 있었다. 시골 살림을 한 번도 안 살아봤지만, 안 살아봤는데도 보면 그냥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있단다. 그래서 이것저것 아무 것이나 두려움 없이 해본다. 시행착오도 없지는 않지만, 잘못 된 것조차도 그녀에게는 잘된 것으로 여겨져서 자신감은 배가 된다. 

그녀의 남편 오형열씨는 오래 전에 시골을 떠나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시골에 와서 이것저것 둘러보니 많은 것들이 틀려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의 시골과 현실 속의 시골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그 다름은 가짜였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엉터리였다. 빨리빨리, 얼른얼른, 보기에만 좋게, 등등 이런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엉터리 가짜가 시골의 도처에 저격수처럼 매복해 있었다.



#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맨 처음 그가 주목한 것은 메주였다. 여기를 가서 보아도, 저기를 가서 보아도 메주가 모두 이상해 보였다. 메주는 곰팡이가 생명인데 곰팡이라고 다 같은 곰팡이일 것인가. 아니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시골에는 메주를 제대로 쑤는 사람이 거의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한 번 해보자. 제대로 된 메주를 만들어서 도시 사람들에게 팔자.     

첫 해에 콩 한 가마니를 사서 메주를 만들었다. 그것을 서울의 아는 사람들에게 팔았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금년에는 콩 세 가마니를 사다가 무려 열흘을 꼬박 메주 만들기에 매달렸다. 너무 힘들어서 기계를 사다가 쉽게 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했지만, 아내가 반대해서 포기했다. 삶은 콩이 쇠붙이로 구성된 기계와 접속하는 순간 본연의 맛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고추 빻는 기계 같은 것으로 쓱쓱 갈아서 짚으로 싸놓고 전통 메주라고 판매하는 새로운 차원의 ‘얼치기메주’를 만들어낼 수야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육체의 편함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본래의 맛은 사라질 것이다. 굳이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렵게 힘들게 하면 할수록 그 맛은 웅숭깊어지는 게 세상사의 이치이니까. 그나저나 콩 세 가마니로 쑨 메주가 다 팔릴까? 다 팔리면 내년에는 얼마나 더 콩을 삶아댈까? 나는 벌써부터 그게 궁금해진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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