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예술이 되어가는 통영에서의 하룻밤(1)



# 물과 산과 집의 도시 통영


지난 해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내 몸이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그 험난한 갯벌 일을 한 달에 이십오 일 이상 이십팔 일까지, 한두 달도 아니고 다섯 달 동안이나 해냈다는 것은, 글쎄, 이것은 실로 대단하다는 말로밖에는 평가가 안 된다. 그렇게 대단했던 나를 격려하고 위로도 하는 차원에서 여행을 좀 떠나주기로 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도 아니고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나는 항상 자유롭다고 틈만 나면 외치곤 했었지만, 겨울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내게도 가진 것이 제법 되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자물통을 새로 사다가 걸어야 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고, 날씨가 너무 추워서 보일러가 얼어붙어 버리면 어쩌나, 눈보라가 몰아치면 어쩌나 하는 뭐 그런 것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결국은 여행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말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나는 그 누구한테도 나눠 갖자고 말할 수 없는 가난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인데, 여행 중에 연탄보일러가 얼어 터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허접한 걱정에 치여서 포기했던 겨울 여행이 두고두고 내내 아쉬워서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지난해 칠월 이후 줄곧 혹사당해온 내 몸뚱이를 아무런 위로와 격려의 절차도 없이 그냥 겨울이나 훌쩍 보내게 해서는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역시 그놈의 연탄보일러가 얼어 터진 뒤의 일은 감당이 안 되는 것이어서, 일종의 편법을 쓰기로 했다.

떠나기 직전에 연탄을 갈아놓고 불구멍을 꽉 막아놓으면 아마 열여덟 시간은 견뎌낼 것이다. 그 뒤에도 일정 시간 동안은 온기가 남아 있을 테고, 그렇게 저렇게 계산을 해보면 넉넉잡아 하루 정도는 얼어터질 염려가 없다는 추산이 나온다. 게다가 낮에는 얼어터질 염려조차 반으로 줄어들고 보면, 아침 일찍 떠났다가 다음날 저녁 늦게 돌아오면 된다는 계산이 척척 나와 주고 있었다.



# 통영은 목욕탕이 많다.


그렇게도 어렵게 잔머리 잔뜩 굴려가면서 나선 길인데 찜질방 같은 데서 궁상을 떠는 건 우리 자신에게 너무 미안한 일인 것 같고, 여관이나 모텔도 역시 뭔가 우리 스스로를 홀대한다 싶어 사치를 좀 하기로 했다. 호텔, 그 이름도 입에 잘 안 붙는 호텔에서 낯선 경험을 해보는 것도 여행을 한 뼘쯤은 풍성하게 격을 높여줄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쓱 들어섰건만, 그런데 말끔한 차림의 직원이 나를 시험하신다. 바다가 보이는 특실은 일박 요금이 얼마이고, 바다가 안 보이는 보통 객실은 얼마인데 어느 쪽으로 하시겠냐고, 시험하는 직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뭐가 그리도 부끄러웠던 것인지.

“아 뭐, 난 특별한 걸 안 좋아하니까, 보통으로.”
이 소리를 차마 크게는 하지는 못하고, 내 뒤쪽의 그녀조차 들리지 못하게 가만히 소곤거리는 투로 말하고는 카드키를 받아들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객실 문을 어떻게 열기는 했지만 실내등이 안 켜져서 한참을 허둥거리다가 카드키를 제 자리에 꽂은 뒤에 실내등이 켜지는 것을 보고 아하, 이것을 깜빡 잊고 있었구나, 어쩌고 중얼거리며, 키득거리며 창문을 열어보니 이게 뭐냐, 꽉 막혔다.

호텔 뒤쪽이 경사가 심한 산비탈인데 원룸이다 연립이다 온갖 형식의 집들을 지어 놓았다. 이 집들이 층층이 계단처럼 늘어서서 저마다의 꼴을 보여주고 있는데 빨랫줄의 속옷 빨래서부터 쓰레기통을 뒤지는 들고양이와 바람에 날리는 검은 비닐봉지까지, 그야말로 다종다양해서 볼 것이 많기는 하지만 그러나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다. 오 이런, 보통은 역시 이런 것이로구나.

어쩌랴. 방을 바꿀까 하는 고민을 잠깐 해보기도 했지만, 호텔 방에 들어앉아 창문 너머의 경관이나 구경하자는 게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고 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뭐 있겠나 싶어 일단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샤워시설만 거창하게 현대식으로 되어 있을 뿐 욕조가 없다.



# 동피랑 골목에서 나의 그녀는~



이것도 아마 유행인가 보다. 뜨거운 물에 피곤한 육신을 푹 담가보겠다는 애초의 꿈을 재빠르게 버리고 유행대로 샤워나 간단하게 처리한 다음 옷장에 비치된 이른바 나이트가운이라는 것을 내 생애 처음으로 입어보고, 아니 입었다기보다는 그저 한 번 잠깐 몸에 걸쳐보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오후 세 시. 이제부터 우리는 통영 시내를 샅샅이 뒤져본다는 생각은 차마 꿈엔들 해볼 수 없다 해도, 어쨌든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열심히 눈동냥을 해두게 될 것이다. 생각하면 참 오래도 별러온 여행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 이 년여 전쯤부터, 그러니까 최소한 육백여 일 전부터 우리는 틈만 나면 통영, 통영 하면서도 길을 떠날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통영에 뭐가 있나? 글쎄, 이 질문에는 나 자신도 할 말이 없다. 내여자 그녀도 아마 딱히 떠오르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통영에 대해 아는 것도 별반 없었다. 수군통제영을 줄여서 통영이라 했다 하니 그 시작은 군사도시였구나 하는 생각이나 겨우 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다만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은 강하게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휩쓸고 간 뒤의 무엇인가가가 인천이나 군산, 부산과는 다른 형태의 이를테면 희미한 옛 그림자처럼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아 있는 그 무엇인가가 2년 전의 어느 날 갑자기 궁금해졌고, 보고 싶었던 셈이다.



#동피랑 관광객


처음에는 버스와 기차를 타는 한가한 여행을 생각했었지만, 일정을 일박 이일로 아주 영세하게 잡고 보니 뜻밖에도 한가함은 사치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타고 다녔던 레토나 한 대를 오십 만원에 폐차처리한 뒤에 현금 일백팔십 만원을 더해서 한 달여 전에 새로 구입한 카렌스2를 몰고 집을 나섰다.

레토나는 소리도 마치 울부짖는 돼지처럼 엄청 크고, 길에서 가끔 시동이 꺼져버리는 등으로 우리를 적잖이 불안에 빠뜨리곤 했었지만, 카렌스2는 걱정 하나 할 것 없다는 듯이 부드럽고 조용하게 그리고 어쩌면 우아스럽기까지 하게 달려주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바야흐로 이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세상 끝까지 마차를 타고 달려가 보겠다는 듯이 느긋하게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틀어놓고 웅장하게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통영을 가면서 윤이상이 아닌 차이코프스키가 웬 말이냐 싶기도 했지만, 겨울의 고속도로는 확실히 차이코프스키와 궁합이 썩 잘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결국은 착각이거나 환상이었다 해도, 우리는 이미 러시아에 들어서 있었다. 눈 쌓인 들판에 줄줄이 서 있는 백양나무들 사이로 트로이카 마차가 달리듯이, 이파리를 죄다 떨쳐버린 나무들 사이로 길게 뻗어 있는 고속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네비 아가씨마저 고용하지 않은 까닭에, 다른 잡소리는 하나도 없이 오직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그 음악에만 집중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 입장료가 필요한 거북선


네비 아가씨를 고용하지 않은 데서 오는 것이 물론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길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와 긴장은 필수 항목이었다. 고창에서 통영을 가자면 서해안 고속도로를 아주 잠깐 달리다가 고창 담양 간 도로로 빠졌다가 다시 호남 고속도로를 타다가 또 다시 빠져서 남해안 고속도로, 그러고도 한 번 더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니 이게 참 아차 한눈 한 번 팔면 길을 놓쳐서 되돌아가야만 하는 낭패를 치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길 한 번 놓치지 않고 잘 왔다. 네비의 잔소리 없이 음악은 음악대로 풍성하게 감상하면서, 한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러시아의 백양나무 가득한 평원을 달리는 듯한 착각 내지 환상을 즐기면서, 섬진강 휴게소에 들러 자판기 커피도 한 잔 빼들고 “아 참 오늘은 싸구려 커피도 고급으로 느껴지네” 어쩌고 조붓하게 키득거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저렇게 어떻게 달리고 또 달리는 동안 우리의 몸은 어느새 통영 시내로 들어와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차이코프스키고 뭐고 어느 한 분야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일단은 그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어디에 차를 세워놓고 누구에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길이 갈라지는 곳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읽고 판단할 시간조차 낼 수가 없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숨 가쁘게 반복되는 도로의 양쪽 인도 주변은 이미 자동차가 빽빽하게 마치 붙박이처럼 서 있었고, 중앙선 쪽에서 달리는 차량들은 앞차가 조금만 머뭇거리면 뒤에서 빵빵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네비 아가씨를 고용할 걸 잘못했나 하는 후회를 몇 번이나 곱씹어가며, 그저 앞만 보며 달리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호텔 간판은 거두절미하고 구세주와 같았다.



# 꿀빵이 익어가는 시식코너에서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나와서 버스를 타고 얼마쯤 통영 시내를 객관적으로 달려본 뒤에서야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바다와 산과 집 그리고 사람이 한 몸처럼 섞여서 움찔움찔 하고 있는 듯이 여겨지는 도시 통영, 이렇게도 불안정하고, 불안정하면서도 나름의 뭔가를 굳건하게 세워놓고 열심히 달린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도시는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문학이며 연극이며 예술 같은 많은 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었으리라.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몸과 마음이 두루 편안한 부르주와는 예술의 향락적 소비에 탐닉하긴 해도 생산자는 되기 어렵다고.  

요즘은 어디를 가나 거리가 주차장이 되어 있지만, 통영의 사정은 한눈에 그냥 봐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집은 처음 지을 때의 규모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골목길 또한 마을이 형성될 당시의 넓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자동차는 계속 늘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고서도 이내 알겠다. 관광객을 잔뜩 태우고 들어온 관광버스는 주차장이 없어서 도로가에 세워둔 채로 관광객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시에서 도로를 넓히고자 해도 오래 전에 이미 지어져 있는 가옥들을 철거해야 하니 그 보상금이 아마 천문학적일 테고, 그래서 감히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것을, 이 또한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이내 알겠다.

그 중에서도 목욕탕 굴뚝은 가히 진풍경이라 할만 했다. 최근 십 년 내에 어느 도시에서 이렇게도 높은 목욕탕 굴뚝을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런데 통영에서는, 도로 하나를 지나면 목욕탕 굴뚝이 보이고, 언덕 하나를 넘어서면 또 목욕탕 간판이 한눈에 쓱 들어온다.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로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하게 솟아있는 목욕탕 굴뚝은 그 자체가 통영의 삶과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이름도 시민탕, 대성탕, 주민탕, 태평탕 등등으로 뭔가 개인주의보다는 여럿이 한데 어울려 호흡하는 공간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 앞을 봐도 생선 뒤를 봐도 해물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쓰고 있었다. 산과 물의 도시 통영, 그 중에서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죄다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조선인들은 변두리로 밀리고 밀리다가 끝내는 가파른 산비탈에 널빤지 같은 것으로 한 칸, 두 칸, 방이라는 이름의 잠자리를 만들고 부엌을 만들어서 밤낮으로 기어 나오고 기어 들어가는 삶을 살았다고 요약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윤이상 선생은 어디에선가 쓰고 있었다. 그런 동네 중의 하나가 벽화마을로 최근에 널리 알려진 동피랑이다.

동피랑은 이순신 장군 시절의 동포루(東鋪樓)가 현존해 있는 벼랑 끝 마을 이름이었다. 한자음 동포루가 세월과 함께 무디어지면서 보다 부르기 쉬운 동피랑으로 변환되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는, 경사가 사십 도 이상 되는 이 가파른 마을을 가쁜 숨 내쉬어가며 오르고 또 오르고, 돌고 또 돌다 보면 동포루가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통영의 거의 모든 것이 다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답답한 가슴이 활짝 열리면서 이제야 살겠다는 듯 푸우, 하는 소리가 저 깊은 곳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온갖 생선과 어패류와 통영의 명물 꿀빵이 익어가는 시장거리를 웃고 떠들어대며 어슬렁어슬렁 그야말로 한가하게 걸어서 동피랑으로 향했다. 멀리서 태양이 길게 바닷물 속으로 주황빛 노을을 내리고 있는 시간인데도 동피랑 고개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돌아갈 줄을 몰랐다. 우리도 사실은 놀라고 있었다. 국민소득 사만불 시대를 외치는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에 아직 이런 동네가 있었구나, 하는 그런 어떤 애잔한 것이 우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골목은 두 명 정도가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는 곳도 제법 있었지만, 대개는 한 사람이 연탄 한 장을 들고 지나기에도 불편하게 옹색했고, 집과 집 사이는 어른이 다섯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끝나기 일쑤였다. 한 뼘짜리 부엌 한 칸에 두세 평짜리 방 한 칸이 전부인 집이라는 것이 그냥 증명되는 셈이었다. 목욕탕 굴뚝이 그토록 많아야 하는 이유를 동피랑 마을이 온 몸으로 증언해주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을 구경하는 한편 사진을 찍는 재미에 취해 돌아갈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감자먹는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난의 한 장면을 뚝 떼어내서 다른 곳에 놓아두면 예술이 된다. 그리고 그 예술은 몸과 마음이 두루 편안해서 딱히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주요 소비층이 된다. 그런 원리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동피랑 마을에서 그 동네 사람들의 핍진한 숨결은 거의 느껴볼 수 없었다. 가난이 온갖 형태의 벽화로 치장되어진 이후 동피랑은 예술이 되었고 통영시의 자산이 되었으며 관광객들이 꼭 들려야 할 순위 몇 번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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