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게 되면서 장흥지역에서도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껏 역적으로만 알았던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의 명암이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관군 후손들과 동학농민군 후손들 양자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10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격전지인 석대들 전투를 치르며 무려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피흘려 숨져갔던 동학농민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92년에 이곳 충렬리 언덕 위에 동학혁명기념탑을 세웠지만, 정부기관과 관군 후손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동안 공식적인 제막식을 가져보지 못했다가 지난 2004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에 관한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2004년 4월 26일 비로소 기념탑 조성 12년 만에 제막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장흥의 동학혁명기념탑앞에서 우리는 110년 전 동학농민군이 외쳤던 폐정개혁안 12조 ‘동학도와 정부가 원한을 풀고 서정을 협력한다’ 는 조항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 대둔산전투

비장한 최후-대둔산 전투 
 
금산(錦山)접주 최공우(崔公雨)가 이끈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패한 후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자 남하하자 무리를 이끌고 전북 완주군 운주면(雲洲面) 산북리(山北里)에 있는 대둔산 미륵바위(715.1m) 정상으로 근거지를 옮겨 저항의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대둔산은 전형적인 바위산입니다. 수년 전 대둔산 항전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주위가 온통 바위로 되어 있어서 오르기가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둔산 케이블카 정상 정류장에서 서쪽 계곡 아래에 있는 육각정(六角亭)으로 내려가서 서쪽 가파른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가서 가파른 고개를 넘어 석도골 골짜기로 다시 내려가 거대한 바위를 좌측으로 끼고 계곡으로 올라가면 정상 능선이 나옵니다.

여기서 조금 가다보면 좌측에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는 데 그곳이 미륵바위로 좌측 옆을 돌아가면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미륵바위 꼭대기에는 30, 40여 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한 공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당시 동학농민군들은 정상에 있는 평평한 공간에 제1 초막을 지었습니다. 사방이 낭떠러지 암벽으로 되어 있어 적이 쉽게 접근하기 곤란한 지형입니다.

일본군 기록에 초막이 3채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여기서 동쪽으로 내려가다 좌측 바위틈을 빠져나가면 1초막보다는 절반 정도 크기의 평평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는 제 2의 초막을 쳤고 제1초막에서 25m 쯤 남동쪽 계곡으로 내려와 제 3초막을 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 함께 들어간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최학연(崔鶴淵 崔士文)과 최공우(崔公雨), 김재순(金在醇), 김석순(金石醇), 진수환(陳秀煥), 강태종(姜泰鍾),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 30여 명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895년 1월 9일(양 2월 3일) 충청감영은 대둔산에 입산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관군을 출동시켰습니다.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대둔산 산세를 보고 접근하여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몇 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하여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동학농민군 공략이 여의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심영병(沁營兵=壯衛營兵)과 일본군 3개 분대가 터골에 도착하여 1895년 1월 24일(양 2월 18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니 상황은 급박해졌습니다.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 의하면 동학농민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합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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