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서울 그때를 아십니까?


세월에 따라 강산도 변한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은 굳이 세월이라고 할 것도 없이 빨리 빨리 변하고 있는 게 서울의 모습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빌딩들…. 아주 정신을 못차릴 정도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많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도 사방에선 고공크레인이 하늘을 찌르고,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는 모습들 뿐이에요. 이러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찾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변화속도가 빨라졌을까요? 그건 근대화 이후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에요. 조선 왕조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서울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시골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건 알고 계세요? 이에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에요.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울을 매주 소개해볼까 해요. 사진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오늘의 기반이 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더욱이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죠. 옛 서울의 모습도 감상하고 변화하는 생활상도 느껴보세요. 





1. 경성중앙방송국 

 1927년 2월 경성방송국이 설립돼 전국에 전파를 내보냈다. 호출부호는 JODK였다. 동경, 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네 번째로 생긴 방송국이었다. 정동 언덕 위에 2층 건물로 설립된 경성방송국은 우리말 방송과 일본말 방송을 섞어 내보냈다. 1933년부터는 일본어방송과 조선어방송이 분리돼 조선어방송은 제2방송이란 이름으로 독립했다.

 


2. 조선방송협회 연희송신소

2중방송 실시에 따라 1kw인 방송출력을 10kw로 증강시키기 위해 연희송신소를 1932년 세웠다. 연희송신소의 송신기는 1933년 1월 10일부터 기계 설비에 착수하여 4월 6일부터 시험방송을 거친 후 같은 해 4월 26일부터 2중 방송을 시작했다. 연희송신소에 소요되는 150kw의 전력은 당인리발전소에서 배전됐다.

 


3. 경성방송국 방송 장면

 



4. 동아·조선일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조선신문, 중외일보 제호

`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일체의 조선인 신문을 폐간하고,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일본인용)와 그 자매지인 매일신보(조선인용), 그리고 영어로 된 경성프레스만 두었다.
경성일보는 총독부 일어판 기관지였으며, 매일신보는 한글판 기관지로 경성일보 자매지였다. 물론 둘 다 조선총독부의 대변지였다. 두 신문사는 대화정(필동)에 같이 있다가, 1914년 시청자리로 옮겼으며, 1923년 사옥이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1924년 사옥터를 경성부청사터로 넘겨주고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사옥을 마련했다.
매일신보는 경성일보 사장과 편집국장의 지휘를 받았다. 구한말 민족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총독부가 인수해 매일신보로 고쳤는데, 나중에는 다시 매일신문이라 고쳤다. 총독부기관지였기 때문에 당시 매일신보에 들어간 조선인 기자들은 매신(賣身)이라고 욕을 먹었다.


 


5. 동아일보 사옥

일제는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우면서 조선인 신문을 허용했다. 그 결과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됐고, 조선일보는 일본인이 경영하다 1933년 광산왕 방응모가 인수했다.


 


6. 동아일보 사옥과 사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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