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철희의 문화재 답사-4> 고희문중유물




# 고희 영정(사진 위), 효충사(사진 아래)ⓒ부안21



고희문중유물/(보물 제 739 호)
- 지정일: 1982. 11. 9
- 소재지: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473
- 소유자: 고상호
- 시 대: 조선 중종17년(1522)~고종31년(1894) 372년간
- 수 량 : 215점


임진왜란 호성공신 영성군 고희 장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지 꼭 200년이 되던 조선 선조 25년(1592년), 왜적이 쳐들어와 산천과 강토를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렸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몽진 길에 오른다. 임진강, 대동강 같은 큰 강을 건너고, 험준한 태산준령을 넘어야 했던 선조의 몽진 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마다 왕을 등에 업는 등 극진히 호종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성군(瀛城君) 고희(高曦) 장군이다.

고희 장군은 제주고씨 문충공 경의 10대손이며, 순충보조공신 병조판서 제원군 사렴의 아들로 명종 15년(1560) 1월 14일 지금의 부안읍 봉덕리 안쟁가리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선조 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했다.

장군이 선전관의 직에 있을 때인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 길에 올랐다는 전갈을 들은 장군은 왕에게 달려가 밤낮으로 어가를 호위했다. 임진강에 다다르니 비는 오고 밤은 어두워 장졸들이 우왕좌왕 할 때에도 장군은 신명을 다하여 왕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다. 왕의 수라거리가 어려울 때에는 장군이 몸소 여러 마을에 가서 수라거리를 구해 온 후, 만일의 불행을 막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먹어 본 뒤에 왕에게 수라상을 바쳤다고 한다. 이어 대동강에 다다르자 무도한 왜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는데도 장군은 한 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왕을 업고 강을 건너다가 적의 칼에 오른쪽 귀를 잃었으나, 의연히 호위하며 무사히 강을 건너 위기를 모면했다.

급박하고 위험한 피난길에서도 왕명을 받들어 호남, 호서 지방의 관찰사들에게 달려가 징병하라는 명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외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단걸음으로 왕에게 돌아가 복명했다. 이러한 어가를 호위하는 이외에도 겸직으로 내자시 주부직에 제수되어 모든 재정 출납을 책임 담당하기도 했고, 군기시 주부가 되어 병기를 정비 보충하였으며, 대동 찰방에 제수되어 평안도 일대의 통신시설을 정비하기도 했다.

왕의 행차가 영변에 이르러 동궁인 광해군의 행차와 만나게 되자 왕은 의주로, 동궁은 함경도 쪽으로 각각 나뉘어 피난 가야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 왕을 호위하던 많은 장졸들은 젊은 동궁 쪽으로 혹은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왕의 곁에는 오직 장군과 몇몇 중신, 장졸들만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이때 장군은 이 광경을 개탄하고 충의에 넘치는 "허신사(許身辭)“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 첫 귀절이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때가 위태로우니 어찌 목숨을 아낄소냐"라는 충정이 담긴 시를 지었다. 이해 6월에 곽산 고을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장군이 그곳 군수로 제수되어 단 열흘 안에 은의와 덕으로써 난을 평정한 후 관서 지방의 군량과 군기를 보급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돌아와 다시 왕을 호위했다.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10월에 왕을 모시고 무사히 서울로 환도하니 이로써 왕에 대한 호위의 대임을 완수하게 된 것이다. 이때 장군의 나이는 34세였다. 장군은 그 이후 도총부 경력, 위원, 덕춘군수, 훈련원 판관, 부령부사, 박천, 홍원, 용천군수, 군기시 판관, 훈련원 부정 등 관직을 두루 거쳤고, 선조 35년(1602)에는 당상관인 정삼품 통정대부로 승진, 풍천 도호부사를, 38년(0605)에는 오위장을, 40년(1607)에는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한편, 선조 37년(1604) 10월에 임진왜란 때의 논공을 책훈할 때에 장군에게 호성공신 3등을 책록하고 영성군에 봉했으며, 화상을 그려 영구히 봉안케 하고, 특히 유교서와 공신회맹록, 단서철권, 반당 4명, 노비7명, 구사 2명, 전 60결, 은 5냥, 표리 1단, 내구마 1필 등을 하사했다.

유교서는 승정원 승지 신지제가 글을 짓고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 이 영정과 유교서 등은 영성군의 가문 13대 372년간의 유물 20종 215점과 함께 1982년 11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739호로 지정되어 현재 효충사 영내에 세워진 유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선조 41년(1608) 2월, 왕이 승하하자 장군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7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다가 광해군 7년(1615) 12월 1일, 향년 56세로 별세하니 나라에서 정2품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했고, 이듬해인 광해군 8년(1616)에 예관을 보내어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에 있는 조부 공조참판 세호의 묘소 아래에 예장하고, 산 주위 사방 10리 일대의 땅과 바다 등을 사패지로 정하였으며, 특히 부조묘(不祧廟) 특설의 은전과 충훈부 완문을 하사했다.

그 뒤 10년이 지난 인조 3년(1625) 3월에는 나라에서 장군의 묘 옆에 부조묘 사당 효충사를 세워 장군의 위패를 모시게 하고, 매년 지방 유림들이 제사를 올리며, 또 그 옆에 영정각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게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허철희 님은 자연생태활동가로 ‘부안21’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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