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의 자연에세이> 봄, 그 위대한 섭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도 있지만, 봄이 무르익은 대지는 이미 파릇한 풀빛으로 가득하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둔덕길에 앉아 먼산바라기를 한다.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아, 정녕 봄이란 말인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은 참으로 오묘하면서 생뚱맞다.


들판에는 진작부터 씀바귀며 냉이, 쑥 따위의 봄나물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봄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논과 밭에서는 농부들이 흙갈이를 하느라 분주하고, 풀밭에 누운 암소가 게으른 하품을 하는가 하면 어디선가 종달새 우짖는 소리도 아련하게 들려온다. 


어제는 모처럼 집에서 가까운 강변으로 봄나들이를 다녀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흙먼지 이는 신작로를 가로질러 강변에 다다르니 일상의 묵은 때가 말끔히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과 따사로운 봄볕, 초록으로 뒤덮인 들판, 어깨동무를 한 야산,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자우룩이 돋아 오른 들꽃, 청아한 새 소리, 파란 하늘, 그리고 나들이 나온 이들의 즐거워하는 표정이 그렇게 정겨울 수 없었다.

 


# 설봉산 진달래


# 강정보 앞의 낙동강에

 


삶에 지친 이들에게 자연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결국은 자연과 공존 공생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이 같은 삶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록기에 접어든 이맘때, 우리나라 산천은 온통 연초록빛이다. 어느 수필가는 이맘때를 일러 ‘천(千)의 초록, 만(萬)의 초록을 산야에 깔아놓는다’고 했다. 산천초목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것은 자연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연둣빛 여린 싹에서 솟는 힘은 인간이 이룬 어떤 위대한 것보다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모든 이들이 찬탄하는 발명이나 업적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사상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계를 고루 누리고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축복이다. 바람에 실려 오는 향훈이 마냥 좋은 이맘때, 어디를 가 봐도 생명들의 잔치 마당이다.

 


# 낙동강을 바라보는 벤치


# 반곡지는 보는 위치에


생명들의 속삭임은 어디서나 들린다. 가까운 야산에 올라가 보라. 갖가지 모양의 들꽃들이 지천이다. 진달래, 산벚꽃은 말할 것도 없고 할미꽃, 괴불주머니, 얼레지, 피나물, 서울제비꽃, 노루귀, 봄까치꽃, 너도 바람꽃, 모데미풀, 현호색…. 그야말로 들꽃 세상이다. 바람이라도 불면 분홍빛 파도가 일렁인다. 그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문득 신세계에 온 듯 황홀감에 휩싸인다. 들꽃은 삭막한 세상살이에 샘물 같은 맑음을 전해주는 자연의 고마운 선물이다. 


4월에 피는 들꽃들은 무리지어 피는 종류가 아니면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들꽃을 찾아 헤매는 재미는 겪어보지 않고는 잘 모른다. 들꽃을 찾아냈다면 식물도감을 펼쳐들고 생태를 익혀둘 일이다. 사진이라도 찍어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들꽃의 어린잎이나 꽃잎, 뿌리는 대개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들꽃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소식이다. 들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들꽃을 마구 채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다수의 들꽃은 귀중한 자연 자원이다. 자연 사랑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풀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아끼고 보존하는 데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돌돌돌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따라가면서 보라. 계곡 가장자리며 숲속 그늘, 바위 틈새 할 것 없이 오종종 모습을 드러낸 들꽃 무리. 양지쪽 비탈에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곁에 두고 있으면 세상의 시름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동화(童話)속으로 들어온 듯 마음이 다사로워진다. 이것은 지나친 감상이 아니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사소한 일이다. 이런 심상(心想)을 통해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풍족함이 넘치는 시대이지만 그 옛날 봄은 곤궁(困窮)의 상징이기도 했다. 춘궁기(春窮期)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곳간에 있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봄에는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자주 쓰던 말이다.


요즈음의 자연 빛깔은 연두색이다. 연두색은 봄의 색깔이고 젊음의 색깔이다. 연두색을 가리켜 어느 학자는 “처음, 시작, 출발의 색이 연두색이다. 아니, 연두색은 실제로 존재하는 색이 아니라 초록을 향해서, 푸름을 향해서 가고 있는, 솟아오르고 있는 화살표의 색채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렇다. 봄은 색깔로 그 실체를 넓혀가고 있다.

 




내가 봄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꽃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이다. 더구나 봄꽃은 그 화사함과 청초함이 유별나다. 꽃눈이 활짝 열리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져 저마다의 마음에 꽃 멀미를 일으키겠지. 이 설렘을 주체할 수 없어 종종 어린 아이가 된다.


봄물 든 산천은 내 어릴 적 추억을 새록새록 샘솟게 하고, 여기저기 다투어 피어난 꽃들은 눈물 나도록 아름답고 애틋해 뵌다. 그 모습이 하도 정겨워 봄노래 한 소절 읊조려 보는 봄날 오후.


꽃바람이 분다. 누구에겐가 새봄의 첫 편지를 쓰고 싶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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