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 씨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 앞에서 열리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목요집회에서 우연찮게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86.남) 씨를 만났다. 안 씨는 1953년부터 42년을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다 1995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안 씨는 보안관찰법에 따라 출소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3개월마다 동향을 보고해야한다. 안 씨는 “나는 조금 더 큰 감옥으로 이감됐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안 씨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다. 
 

▲ 비전향 장기수 안학섭(86.남) 씨


안학섭 씨는 1930년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만주사변(1931), 중·일 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으로 전쟁을 확대하며 이른바 민족 말살통치를 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형 둘은 징용을 끌려갔다. 둘째 형은 훈련소에서 도망했고, 안 씨와 가족들은 도망자 신세가 됐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모든 것이 좋아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군정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들을 중용했다. 안 씨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불만이 쌓이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0년 자발적으로 북으로 갔다.

민청훈련소에서 정치교육을 받은 그는 서울정치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1952년 10월, 전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당시 임무는 강원도(지금은 경북) 울진에 있는 강원도당에 가서 지시를 받는 것. 하지만 안 씨는 강원도당까지 가지 못하고 1953년 4월초 강원도 정선에서 수색에 걸려 붙잡혔다.

포로 규정에 따르면 북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정전 이후 북송 돼야했지만 그는 재판에 넘겨진다. 안 씨는 1953년 11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이후 선고공판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특별 사면으로 형집행 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42년이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전국의 교도소를 옮겨 다니며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이 기간 동안 모진 고문이 행해졌고,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가거나 전향하는 동지들은 늘어갔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거짓으로라도 전향하는 것이 낫지 않았겠냐는 질문에 그는 “양심이라는 것은 위압적인 환경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출소를 했을 때, 이십대 중반의 청년은 육십대가 돼 있었고, 부모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출소를 하려면 보증인이 있어야했다. 한 번 면회 오지 않던 형이 보증인이 됐다. 형을 따라 강화의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살던 집이었다. 하지만 그가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비전향 장기수였던 그를 출소 이후에도 계속 감시했다. 전화 한 통화까지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정부에서 안 씨를 감시할 수 있는 것은 보안관찰법 때문. 보안관찰법은 이미 형기를 마친 보안관찰대상자들에게 보안관찰처분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1975년 박정희 정권 때 제정된 사회안전법이 1987년 폐지되면서 하위지침인 보안관찰이 보안관찰법으로 1989년에 대체 제정된 것이다.

이 법에 따라 안 씨는 3개월에 한 번씩 신고를 해야 하는 의무도 지고 있다. 보안관찰법 제18조 신고사항에는 △3개월간의 주요활동사항 △3개월간 통신·회합한 다른 보안관찰처분대상자의 인적사항과 그 일시, 장소 및 내용 △3개월간에 행한 여행에 관한 사항 △관할경찰서장이 지시한 보안관찰 관련사항을 신고하도록 돼 있다. 신고하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지난달에도 신고 의무를 하지 않았다며 경고장이 날아왔다. 안 씨는 “나는 조금 더 큰 감옥으로 이감됐을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부에서 20년 동안 나를 사찰해왔는데, 도로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 내가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 아니냐. 나이 86세의 노인이 뭐가 무섭다고 아직도 감시하는 줄 모르겠다. 그냥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의 감시와 신고 요구도 괴로웠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도 안 씨를 힘들게 했다. 결국 그는 고향 강화도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선 4년간 조선족복지선교센터 임광빈 목사의 보호아래 생활을 했다. 2000년 무렵, 안 씨의 삶도 평안해지는 듯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탕제원을 운영했다. 또한 30살 연하인 아내 이혜경씨를 만나 결혼도 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며 남북 간의 분위기도 좋아졌고, 그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도 나아졌다.

감옥에서 나올 때는 통일 운동 등 우리 사회를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닥치니 먹고 사는데 급급해서 어떤 일에든 매달릴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강화 양민 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하게 됐다. 안 씨의 작은 형은 강화에서 전쟁 때 부당하게 학살당했다. 유족회 활동과 현황 조사 등을 위해 2003년 11월에 운영하던 탕제원도 그만 뒀다. 강화의 전 지역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화점면, 길상면, 송해면, 교동 등을 조사했다.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사기를 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를 날리게 됐다. 그간 벌어둔 돈도, 아내가 아이들 피아노를 가르치며 번 돈까지 몽땅 날리게 됐다. 집도 잃고 한 순간에 거리로 나앉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내는 우울증에 걸렸다. 아내는 모든 사람들이 사기꾼처럼 무섭게 느껴진다며 산에 가서 조용히 살자고 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한동안 부산에 거주하다 다시 강화로 돌아왔다. 집안의 재산 분배를 둘러싼 분쟁도 골칫거리. 현재 안 씨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소송이 진행 중인데 지게 된다면 또 다시 거리에 나앉게 될 판이다.

요즘 안 씨는 감옥에서 본 한시가 자꾸 생각난다. 방을 옮기게 됐는데, 누군가 한시를 한 구절 써놓았던 것이다. “발붙일 곳 없는 벼랑에 매달려서 살겠다고 바둥거리느니 차라리 손을 놓는 것이 남아답지 않은가”라는 뜻의 한시였다. 당시 방의 원주인을 수소문하니 재일교포인 서준식 교수가 그 방에 머물렀다고. 서준식 교수는 복역하던 중 분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안 씨에게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벼랑에 매달린 그에게 우리 사회가 손길을 내밀 수 있길 바라본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